세구밭 뚝에 감나무 _?xml_: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마을에서 북 서쪽으로 약 백 미터 지점에 밭이 있다 .면적은 칠백 평 이 조금 넘는다 .밭에 모통 이가 세군데 .가 있어서 아주 오래 전부터 세구 밭으로 불려 왔다 .
양지 바르고 밭 가운데가 조금 볼록 해서 불 빠짐이 좋고 무슨 작물을 심어도 잘 자라는 아주 좋은 밭으로 알려저있다 .이 밭뚝 에 세그루 에 감나무 가 있다 .
처음에는 고염 나무를 심어서 고염 나무 굵기가 흉고 에서 엄지 손 가락 굵기 만큼 자라면 감나무 에서 어린 가지를 양력 이월 하순부터 삼월 상순 사이에 꺾어다 저온 창고에 보관 하고 고염 나무가 봄이 되어 물이 오르고 눈이 트려고 볼록 볼록 해지면 적당한 위치에서 접목 울 하고 비닐을 감고 접목 끝에 초를 발라 수분이 증발 하지 않도록 해서 한달 쯤 되면 새 눈이 트고 새 순이 자라서 일년에 한자 정도 자라고 잘 자라는 나무는 일 미터가 넘개 자라는 수도 있다 .나무 주변 풀도 뽑아 주고 퇴비도 주고 하면 삼년쯤 되면 감이 열기 시작 해서 십년 은 자라야 한 나무에서 백개 정도의 감을 수확 할수 있다
처음 감이 열릴 때에는 신기 하기도 하고 해서 바라 보고 또 추석 명절에 따서 울켜서 제사 상에 도 올리고 객지에서 명절 쉬러 온 일가 친척 들과 나누어 먹고 나머지는 서리가 내리면 곶감도 켜서 말려 두었다가 조상 님들 제사 상에 올리는 정도 로 사용 하고 수입은 되지 못 하였다 .세월이 더해감에 따라 나무도 크고 감도 많이 늘어나서 가정에서 소비하기에는 양이 많아졌다 .그 당시에는 시골 장이 오일 만에 한번 열리는 장이 있었지만 이 시골 장에서는 감을 판매 할수 없었다 .지금은 계절이 많이 변하였지만 지금부터 한 삼십 년 전에는 추석을 전후해서 감 수확이 한창 이었.다
어정 칠월이 지나고 팔월이 접어 들면 파랗 든 감 들이 누릇 누릇 해 지면서 살이 오르고 감은 붉긋 붉긋 익어간다 망태에 줄을 달아 어깨에 메고 긴 대나무 장대 들고 감나무 밑에 가서 감을 따기 시작 한다 .아침 먹고 나가서 따기 시작 하면 점심 때 까지 혼자 따면 한 나절에 다섯접 약 오백개 를 따고 집 식구 하고 둘이 따면 일곱 접에서 여덟 접 을 딸수 있다 .감 따는 작업은 한나절에 끝내야 한다 .왜냐 하면 따온감 침도 주어야 하고 물도 끓여 독에 붓고 감 담그고 수수잎 따다 덮고 하다 보면 해는 서산에 기우러 지고 만다
감 담근 독에 온도가 떨어 지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하여 비닐을 덮고 또 그 위에 솜 이불을 덮어서 독에 온도 가 떨어 지 지 말고 새벽 까지 유지 되어야 만 감이 제대로 울어 나기 때문이다 .새벽 세시만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손등 으로 눈을 비비 면서 우선먼저 감 담가 있는 독을 더듬.어 본다 .독이 따듯 하면 마음이 안심 되고 독이 서늘 하게 식었으면 내 가슴도 썰렁 해진다 .부랴 부랴 이불을 걷어 치고 비닐을 비집고 우선 감을 집어서 물어 뜯어 본다 .
감이 잘 울어 나서 떫은 맛이 없으면 그대로 건저서 맑은 물에 씻어서 장에 갈 준비를 하고 만약에 물어 뜯은 감 에서 떫은 맛이 나면 부랴 부랴 물을 데워서 감을 다시 담근다 .감을 다시 담그고 조금 있으면 독에서 뽀골 뽀골 소리가 나면 순식간에 떫은 맛은 사라진다
정신 없이 건저 내어 맑은 물에 씻어서 장짐 을 구려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할미당 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 삼십 리 길을 가면 온 몸은 땀 투성이고 사람도 초 죽음이 된다 .늦어도 열시 까지는 전의 역에 도착 해야 한다 서울 이나 경기도 에서 감 장사 들이 아홉 시 열차에 내려 오기 때문에 만약 이 시간 을 대지 못 하면 전의 지방 장사 꾼에게 감을 팔아야 하고 트집도 많이 하고 가격도 서울 이나 경기도 에서 오는 장사 보다 값을 덜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거래도 몇해 뿐 사람도 나이 들고 감 나무도 크고 하다 보니까 감도 많이 열고 이제는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많은 물량을 해결 할 수가 없게 되었다 .
하는 수 없이 마을 분들이 공동 으로 자동 차 를 이용하여 천안에 청과 시장으로 발을 옮겨 .갔다 .때로는 하루에 한차 에 다 못 싫어 자동차 두대 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자동차 운임 주고 경비 쓰고 나면 큰 소득은 되지 않았지만 육십 년대부터 칠십 년대 후반 까지 가을철 한때 소득 원으로 감 나무가 효자 노릇을 톱톱 히 해냈다.그러나 세월에 흐름은 역사를 빠꾸고 말았다 .칠십 년대 중반부터 우리마을 에도 밤 나무 재배 운동이 시작 되었다 .그 이전에 도 산에 가면 산 밤이 많이 있었지만 혹벌 이라는 해충 때문에 밤 나무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어느 독농가가 병충해도 강하고 품질도 좋아서 농가에 소득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바람은 삽시간에 면내에 전파되어 우리 마을에도 그 영양으로 화전 밭이나 야산에 밤 나무를 심어 새로운 소득원으로 등장 하게 되었다 .따기 어렵고 담그기 까다롭고 시장 출하 까지 가려면 복잡하고 어려운데 비하면 밤나무 재배는 정부에서 벌채 허가도 잘해주고 생산된 상품도 가까이 농협이 있고 밤 상인들이 농가 마다 다니면서 수집해 가니까 편리 하고 소득도 감 따서 판매 보다는 월등 하게 좋으니까 감 나무는 하는 수 없이 뒷 전으로 물러서고 말았 .다 .
햇 가지 제처 주고 고목은 가지 치고 라는 농 가 월령가에 한구 절이 생각 나는듯 합니다 .
우리 농가에서 쓰이는 말로 전지 라는 말이 있다.배나무 전지 복숭아 나무 전지 밤나무 전지는 하지만 감 나무 전지는 별도로 하지 않는다 감 나무는 가을에 감을 따면서 전지를 하는 것이 된다 ,감딸 때 망 달린 장대로 따 든, 망이 없는 장대로 따든 감 달린 가지를 꺾어서 감을 따기 때문에 감나무 전지는 감을 꺾어 땀으로 자연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
초 가을부터 밤 수확에 들어 가면 한 달에서 사십일 정도 되어야 밤 수확이 끝나고 밤 수확이 끝나기가 무섭게 벼 수확에 착수 하다 보니 그 동안 감은 모두 물러 빠지고 만다 .
그렇게 소중하게 가꾸고 아껴 오든 감나무 추석 명절 때 겨우 감 접 이나 따서 명절 세고 가을에 서리 내리면 한두 접 따서 곶감 켜서 말려 두었 다가 조상님들 제사상에 올리는 정도 이다 보니 전에 말씀 드렸 드시 감을 따면서 전지도 해 야하 는데 전지가 안되니까 했가지 돋어 나지 못하고 나무는 점점 늙어가고 이제는 감도 열지 못하고 그나마 가지는 해가 갈수록 고사 목이 되어 사그러 들고 나무도 고목이 되면 오든 새들도 아니 온다 드니 해묶은 까치 집만 주인도 없이 허물어 져가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만 쓸쓸할 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