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넌 만날 때마다 할 얘기가 그거 밖에 없냐. 하도 들어서 내가 다녀온 것 같다. 이제는 정신 차려야지. 놀 만큼 놀았잖아. 널린 게 고학력 실업자라지만, 이건 아니지 않냐?”
복수가 친구랑 둘이서 술을 마시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문뜩 밤하늘을 바라보다 그만 화물차에 치이고 만다. 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밤하늘에서 무엇을 찾은 걸까? 한산한 도로에 피범벅이 된 복수가 혼수상태로 쓰러져 있다. 기사는 겁에 질려 잽싸게 차를 돌려 현장을 벗어난다. 인적이 드문 시각이라 도울 이는 없고 복수는 사경을 헤맨다.
나는 친구랑 둘이서 술을 마시고 헤어져 부모님이 깨지 않게 살며시 대문을 열어 살금살금 잠을 잔다. 꿈을 꿨다. 미라처럼 붕대를 칭칭 감은 노인이 절뚝절뚝 내게 묻는다.
“눈물겹게 그리운 필름이 있으신가?”
나는 한동안 글썽이기만 하다 부들부들 말문을 연다.
"그때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뭔들 못 드리리까."
기다시피 한 발 한 발 내딛던 노인이 점차 곧게 일어나더니 풍덩 불못에 낙화한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번쩍 눈이 뜨인다. 창을 내다보니 해 뜨기엔 한참 이르다. 나는 다시 혼곤히 잠을 청한다.
꼬마 소년이 엄마랑 함께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 소년은 마냥 신기한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엄마 손을 놓는다. 뒤늦게 엄마가 없음을 지각한 소년이 엄마를 찾아 헤매다 카트에 아기를 싣고 지나가는 부인에게 묻는다.
"아줌마는 왜 살아요?"
소년 질문에 황당해 할 법도 한데 부인이 소년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한다.
"아줌마는 가족을 위해 산단다."
부인이 다시 카트를 끌고 가던 길로 간다. 소년이 이번엔 교복 입은 여학생에게 묻는다.
"누나는 왜 살아요?"
여학생이 보던 책을 접고 대답한다.
“좋은 대학 가서 좋은 남자 만나려고 살지.”
여학생이 다시 책을 펴고 가던 길로 간다. 소년이 이번엔 말쑥한 청년에게 묻는다.
“형은 왜 살아요?”
청년이 스마트폰을 내리고 대답한다.
“인생은 즐기라고 사는 거야.”
청년이 다시 스마트폰을 주시하고 가던 길로 간다. 소년이 이번엔 남루한 중년에게 묻는다.
"아저씨는 왜 살아요?"
중년이 깊은 한숨을 내뿜고 대답한다.
"죽지 못해 산다. 왜?"
중년의 옹졸한 말투에 소년이 운다. 중년은 소년이야 울든지 말든지 가던 길로 간다. 꿈에서 깨인 나는 어제처럼 으르렁으르렁 빈 집을 지킨다.
서른한 살은 어떻게 사는 게 정답일까? 남들 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른다. 나는 내 안에 갇혀 산다. 여태껏 문밖을 나간 적이 없다. 더 이상 문밖을 외면할 수 없는 나이가 된 내가 두렵다. 아버지는 일흔이 넘으셔도 나 때문에 일손을 놓지 못하고 어머니는 환갑이 넘으셔도 나 때문에 마음 편한 날이 없다.
“무시라.”
어머니 한숨이 들린다. 나는 어머니 한숨을 애써 외면한다. 아버지는 힘들다고 말한 적이 없으시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건 아버지를 닮았나 보다. 우리 집은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다. 귀신이라도 나타나서 나 좀 잡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났든 못났든 이왕 태어난 거 사람답게 살고 싶다.
칩거로 는 건 잠뿐이다. 밤이건 낮이건 잠을 잔다. 잠에서 깨이면 호졸근한 청춘에 울컥 눈물이 난다. 꿈꿀 때가 가장 행복하다. 꿈은 언제나 달콤하다. 현실과 달리 꿈은 아름답다.
꽁꽁 얼어붙은 아스팔트 바닥에 피범벅으로 쓰러져 있던 복수가 부르르 덜커덩 부르르 덜커덩 뒤틀려 곧 다시금 싸늘한 침묵이 된다.
늦은 아침, 잠에서 깨어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집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딱히 갈 곳이 없다. 돈을 적게 쓰고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곳을 생각하다 졸업한 대학 도서관으로 가기로 정하고 요금 천 원을 들여 버스를 탄다.
교내 도서관 건물 앞엔 대학생이 대학생에게 홍보물을 배포하고 있다. 홍보물을 건네받은 대학생 대부분이 보지도 않고 구겨 버리거나 찢어서 땅바닥에 날려버린다. 나는 땅에 버려진 홍보물을 주워 읽어 본다.
‘내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
슬로건이 가슴에 와 닿는다.
“작년 각 나라에서 해외 봉사 활동을 하고 귀국한 대학생들이 서울 코엑스에서 자신이 다녀온 나라를 소개하고 그 나라에서 겪은 체험담을 얘기해 주는 컬쳐를 열어요.”
고운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웬 여대생이 내가 펼친 홍보물을 보며 설명해 준다.
“저희랑 함께 서울 코엑스로 가요. 당일치기라서 학업엔 아무 문제없을 거예요. 물론 차비는 무료구요.”
공짜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진다. 생애 처음 가는 서울을 공짜로 갈 수 있다니 다신 없을 기회다. 가슴이 답답하던 차에 잘 됐다. 서울 바람이나 쐬고 와야겠다.
일러준 시일에 집결지로 가니 버스 한 대가 정차되어 있고 홍보물을 배포한 대학생과 배포 받은 대학생이 얼기설기 엮여있다. 버스 광고판엔 웬 교회명이 쓰여 있다.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가 어디든 상관없다. 공짜라면 무엇이든 다 좋다.
버스는 목적지에 닿기 전 한 휴게소로 들어선다.
“여기서 점심 먹고 다시 출발할게요. 버스에서 내릴 때 김밥과 바나나를 하나씩 챙기고 내리세요.”
일찌감치 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대학생들은 김밥과 바나나를 하나씩 챙겨서 야외 벤치로 걸음을 옮겨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식사를 한다. 나를 포함한 낯선 이들은 밀물처럼 그들 속에 스며든다.
드디어 서울 코엑스에 입성했다. 성전 안에는 각 나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과 각 나라 부스를 만들어 설명하는 사람들과 각 나라 부스를 돌아다니며 간접 체험하는 사람들이 얼기설기 섞여있다. 이곳은 나랑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지만 한평생 한번쯤은 머물고 싶은 낙원이다.
동이 터서야 주민들이 발견해서 신고하고 복수는 즉각 병원으로 이송된다. 부모님이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병실로 찾아왔지만 복수는 여전히 혼수상태이다. 어머니는 초췌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복수를 차마 볼 수 없는지 뒤돌아서서 눈물로 호소하고 아버지는 그렁그렁 부들부들 의사에게 묻는다.
“우리 아들이 언제 깨어날 수 있나요?”
“지금 상태로서는 언제 깨어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추후 경과를 지켜보는 수 밖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름방학이 오고 나는 그들을 따라 국내 대학생과 해외 대학생이 하나로 연합되기 위한 사주간의 행사에 참여하러 서울 올림픽 체조 경기장으로 간다. 흑인, 백인 구분 없이 이천오백여명이 통합된 대규모 행사이다. 나는 줄을 서서 접수를 하고 배정된 반을 확인해 이동할 버스로 짐을 옮기고 티셔츠를 건네받고 같은 반 또래랑 개막식에 착석한다. 개막이 선포되고 각 나라의 산뜻한 춤과 클래식 협주가 눈앞에 펼쳐진다. 눈으로 보고도 믿겨지지 않는 현실이다.
어느덧 개막식이 마치고 밖은 캄캄한데 내가 탄 버스는 밤에서 낮으로 달려 캠프장에 선다. 나는 배정받은 천막에 짐을 풀고 통합 천막으로 이동해서 그들과 같이 예배를 듣는다. 다행인 건 한 시간이 넘게 설교를 들어도 졸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여기서 졸면 동참하려는 의지가 적어 보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고 있는 느낌이다. 오전 예배, 오후 예배, 개인 교제 및 관광.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지금은 우기다. 마른 날보다 젖은 날이 더 많다. 밤새 세찬 빗소리에 잠이 오지 않는다. 갠 어느 날 천막에서 담당 목사와 단 둘이 개인 교제 시간을 갖는다.
“솔로몬 왕은 세상 모든 지혜와 부를 가졌고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누렸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는 인생은 헛되다고 말했어.”
솔로몬 왕이 성경에 나왔었나?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왕이 내가 아는 솔로몬 왕인가?
“지혜의 왕 솔로몬 알지? 한 아기를 두고 두 매춘부가 자신이 친모라고 주장하는 걸 솔로몬 왕이 진짜 친모를 찾아낸 이야기 알지?”
내가 아는 솔로몬 왕의 일화가 맞네. 솔로몬 왕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었구나. 나는 솔로몬 왕이 기록한 성경을 정독한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정말이네. 세상 모든 지혜와 부를 가졌던 솔로몬 왕이 왜 이런 말을 했지?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이건 모든 사람의 숙명이잖아.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간 죽는 게 당연하잖아. 지혜의 왕 솔로몬은 어떤 해답을 내놓았을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별 거 없네. 그런데, 지혜의 왕이 기록한 거라 그런지 납득이 가긴 하네.
밤낮없이 비가 내려도 예배를 듣고 간이 화장실과 간이 샤워실을 이용하고 끼니를 배식 받고 순번에 따라 설거지를 하고 또래들이랑 함께라서 그런지 즐겁다. 그들 울타리로 들어가고 싶다.
“오늘 말씀을 듣고 마음에 하나님을 영접하신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감사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두 손을 맞잡고 눈을 감는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눈을 뜨니 담당 목사가 내게로 걸어온다.
아침엔 개여 청명하더니 서울 시청 앞 광장엔 비가 오락가락한다. 이래서 공연을 할 수나 있을까? 서울 전역에 비가 온다던데. 빗물을 머금은 잔디밭에 박스를 깔고 앉아 위태롭게 공연을 관람한다. 공연 도중에 비가 쏟아지면 안 되는데. 나만 가진 위태로움인가. 무대 위 그들에겐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열정과 기쁨이 보인다.
늦은 밤 공연이 마치고 내가 탄 버스는 밤에서 낮으로 달려 항구에 선다. 항구엔 커다란 선박이 내린 계단을 이용해 그들이 승선하고 있다. 나도 그들에 뒤섞여 밀물처럼 들어선다. 생애 처음 가는 제주도라서 신날 줄만 알았더니 장시간 항해에 울렁울렁하고 어지럽다. 뱃멀미를 잊으려고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자려는데 반별 장기자랑으로 밖이 시끌시끌하다.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다. 얼마나 즐거우면 다들 저래? 나는 군중을 비집고 나가 바다를 내다본다. 바다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그들이 그림 같다. 그림을 관람하다보니 어느덧 제주도에 닿아 군중은 버스가 적재되어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대기한다. 선박 문이 열리고 나팔 소리가 눈부셔 나도 몰래 눈살이 찌푸려진다. 환영식에 그들은 미소를 띠지만 나는 어색한 나머지 졸래졸래 쫒기 바쁘다. 호텔에 짐을 풀고 버스를 타고서 컨벤션 센터로 이동해 저녁 식사를 하고 예배를 듣는다. 예배 후엔 호텔로 돌아가거나 컨벤션 센터에 남아서 반별 미팅을 가진다. 제주도의 첫날이 이대로 잠든다. 제주도의 푸른 물결이 친숙해 질 쯤 나는 그들과 함께 컨벤션 센터 근방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간다. 나는 그들과 어울리며 풋풋한 내일을 꿈꾼다.
행사 마무리는 제주도를 벗어나 대덕 교회에서 보낸다. 대덕 교회에서의 생활은 관광을 빼고 대부분 시간이 성경으로 이루어진다. 군중이 성경을 당연하게 여기듯이 나라고 특별히 성경에 거부감은 없으니까. 그들과 함께 예배를 듣고 강의를 듣고 반별 미팅을 가지다보니 불꽃처럼 폐막식을 맞이한다.
나는 학업 중에도 틈틈이 해외 봉사 활동 훈련에 참가한다. 대덕 교회로 팔도 대학생이 모여든다. 나는 중국을 지원했다. 국제 흐름은 나중 문제고 지원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꼬부랑 글이 싫다. 꼬부랑 글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 이런 내가 꼬부랑말을 쓰는 나라로 갈 리가 있겠는가.
나라별로 지원자가 같은 반이다. 나 역시 중국 지원자들과 같은 반이다.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니 죄다 낯선 이들뿐이다. 짐을 푸는 그들 옆에 머쓱하게 앉아 나도 짐을 푼다.
“안녕하세요.”
“......예!......예......안녕하세요.”
“몇 살이에요?”
“스물넷이요.”
“나랑 동갑이네. 우리 친하게 지내자. 이름이 뭐야?”
“복수. 넌?”
“최규호.”
함께 기상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예배를 듣다보니 어느덧 함께 거닌다. 그들은 마음에 질문하고 대답한다. 신앙 산꼭대기에 거의 닿아있는지 멀어졌다면 얼마나 멀어졌는지 토론한다. 나는 아는 게 없어 성경을 인용할 순 없지만 주눅 들긴 싫어 온갖 사고를 방출한다.
“복수야, 넌 구원받은 게 아닌 것 같다.”
담당 교사 말에 울컥 화를 내뱉는다. 순간 아차 싶다. 추방 위기에 놓였다 싶다. 이를 어쩌면 수습할 수 있을까? 수습할 방도가 있긴 한 걸까?
“미안했습니다.”
나는 자폭을 사죄하고 대덕 교회를 떠난다. 불합격은 당연할 텐데 내심 모르니 교회 창을 열어 확정된 단기 선교사 명단을 들여다본다. 긴 페이지를 드래그해서 중국을 찾는다. 중국 확정 명단에 내 이름이 눈에 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눈을 손바닥으로 비벼 청안을 닦는다.
단기 선교사로 확정된 팔도 대학생이 각 현지로 파송되기 전 대덕 교회에 모여 마지막 훈련을 받는다. 건너편 규호도 보인다. 나는 설렘과 기대가 공존한다. 딴 때도 그러했지만 훈련의 처음과 끝은 경청이다. 팔도 대학생이 방바닥에 빽빽이 오열을 맞춰 앉아 성경을 경청한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엉덩이에 종기가 생긴담. 애써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아픔이다. 방석을 두 개 깔고도 종기가 난 왼쪽 엉덩이를 들고 삐딱하게 앉아서 억지로 경청한다. 너무 아파 수치심 따윈 잊은 지 오래다. 여대생들이 듣든지 말든지 미간을 찡그린다. 위태롭게 성경을 경청하는 나를 담당 목사가 손짓해 불러낸다. 담당 목사는 일 톤 트럭 조수석에 나를 앉히고 교외 조그마한 병원으로 옮긴다. 백발 의사 말에 따라 간이 침대에 엎드려 종기를 드러내고 고름을 짜이니 그제야 가뿐하다. 종기 짠 부위에 반창고를 붙이고 대덕 교회로 복귀해 곧게 경청하니 한결 잘 들리는 듯하다.
하얼빈이래. 나는 하얼빈으로 정해졌다. 초인이 눈 먼 역사를 처단한 올곧은 페이지라 친숙하긴 하지만 낯선 외국 땅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가는 게 편치 않았는데 규호도 하얼빈이라니 한 섬 놓인다. 나랑 규호 말고도 장재영이 같은 지역이다. 재영은 나 보다 네 살 어린 대학생인데 몇 차례 어울려서 낯설지 않아 다행이다.
“복수야, 하얼빈은 되게 추운 지역이래.”
딴 지역으로 파송 받은 동갑이 정보를 준다. 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추운 곳이면 어떻고 더운 곳이면 어떤가. 지금 이 순간 내게는 기쁨만이 감돈다. 나는 거기서 그들과 이천오 년을 보내고 이천육 년을 맞이한다.
기쁜 소식을 품고 교회로 정진하다보니 들리는 얘기가 보인다. 하얼빈에서 함께 활동할 단기 선교사 중 나랑 같은 교회가 있단다. 그게 최민정이란다. 나는 여대생과 친하지 않다. 성격 탓인지 대화는커녕 눈조차 맞출 수 없다. 이런 나니 최민정과 마주칠 때마다 부끄러워지는 건 당연한 거다. 최민정은 나보다 한 살이 어림에도 나랑 같은 시기에 교회를 만났음에도 나완 다르게 당찬 구석이 보인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교회로 가니 곧 있으면 각국 단기 선교사가 될 이들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 속에 최민정이 보인다. 함께 웃고 함께 즐기는 모습이 왠지 부럽다.
나는 교회 부름에 즉각 반응해 글로벌 캠프 참가 준비로 벅찬 나날을 보낸다. 이번엔 하와이란다. 부곡하와이가 아니라 진짜 하와이에서 개최한단다.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고 처음으로 비자를 발급받고 처음으로 달러 환전을 하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촌스러운 내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간다. 이게 꿈만은 아니겠지? 하와이로 날아가기 전날 친구랑 둘이서 창동 시장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랑 순대를 사먹고 저녁엔 캐리어 가방을 열어 여름옷을 채운다. 거긴 여름이라 하기에.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 머리를 감고 아침을 먹고 어스름을 헤치고 교회로 간다. 교회 앞엔 이미 버스가 정차되어 있고 이미 학생들은 착석해 있다. 나도 짐을 싣고 착석해 금세 잠이 든다.
눈을 뜨니 인천국제공항이다. 말로만 들은 이곳을 실제 와서 보니 여태 꿈만이 아닌 게 확연하다. 나는 걸음마를 갓 배운 아이처럼 분별없이 그들을 쫓아 출국카드를 작성하고 그들이 지나간 길을 쫓아 비행기에 탑승한다. 이토록 세찬 날에 이토록 먹먹하다. 어제 사먹은 분식이 가슴을 먹먹히 하나 보다. 비행 여섯 시간 동안 답답함을 꾸역꾸역 버텨내어 꼬부랑 글로 입국카드를 작성하고 호놀룰루 국제공항에 간신히 도착한다. 별 탈 없이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밖으로 나오니 진짜 여름이다. 나는 두꺼운 점퍼를 벗고 반팔티를 드러내어 그들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린다. 그들 차량을 타고 우리는 컨벤션 센터에서 내린다. 컨벤션 센터 안에는 대덕 교회에서 본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나는 줄을 서서 접수를 하고 배정된 반을 확인하고 티셔츠를 건네받고 대극장에 들어선다. 안에는 개막식을 준비하는 스태프와 이미 도착한 대학생들이 흐트러진 의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다. 글로벌 캠프 모든 참가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자유시간이다. 나는 같은 지역에서 함께 온 동생과 둘이서 주변을 거닌다. 물결이 살랑살랑 반짝인다. 동생은 나들이가 즐거울 테지만 나는 가슴이 먹먹해서 아름다움이 들어오지 않는다.
개막식 시작 전에 참가자들이 숙박할 호텔로 대거 이동한다. 호텔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참가자들은 각자 캐리어 가방을 끌고 거리를 횡단해 호텔로 향한다. 그들 횡단에 동참하니 먹먹했던 가슴이 사르르 낫는다. 사인 일실로 나는 규호랑 같은 방이다. 계획된 시간 외에는 제 집 드나들 듯 자유롭게 호텔을 드나들었다. 진주만 공습 현장을 승선하고 하나우마 베이 스노클링을 하고 다이아몬드 헤드 등정을 가능하게 하는 건 절대로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울타리 안이어서 가능한 만끽이다. 세끼 식사는 컨벤션 센터 강의실 옆방에 갖춘 뷔페에서 해결한다. 매끼 빵, 샐러드, 시리얼이 대부분 메뉴인데 떠나기엔 좀 이른 오후 그들이 차려준 밥과 김치를 모처럼 입 안에 넣으니 달콤하다. 초콜릿 같다.
컨벤션 센터와 호텔을 오가며 관망하고 거닐기만 하던 와이키키 해변에서 규호랑 둘이 헤엄친다. 아니 나는 헤엄칠 줄 모르니 물장구나 쳐야겠다. 도심 한복판에 와이키키 해변이 있어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과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조금의 괴리감도 없이 조화롭다. 여기가 낙원이다 싶다. 규호는 곧잘 헤엄을 치는데 나는 완전 물병이라 물속을 걷는다. 걷다가 걷다가 푹 빠졌다. 턱까지 물이 닿긴 하지만 염려는 안 됐는데 발을 내딛으니 지면에 닿지 않는다. 순간 꼬르륵 숨이 가빠와 허우적거린다. 첨벙대는 나를 규호가 발견해 끌어 올린다. 하마터면 물귀신이 될 뻔했다. 거긴 여기보다 조금 깊어 끝까지 내려가서 박차고 일어나면 빠져나올 수 있는 데라고 규호가 말한다. 나는 거기로 다시 가서 지면을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다.
어느덧 글로벌 캠프가 마쳐 참가자들이 하나 둘씩 귀국하는 가운데 나는 비행기 시간으로 인해 하루 더 머무른다. 강의가 마치고 세례 받으러 컨벤션 센터 근교 해변으로 모이라고 한다. 나는 이미 대덕에서 세례를 받아 갈 필요는 없는데 빈 호텔 방이 싫어 컨벤션 센터 근교 해변으로 걸어간다. 걷는 도중 소나기가 내린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그냥 비를 맞으며 걷는다. 먼발치 근교에서 바라보니 비가 내림에도 침례를 하고 받는 모습이 아름답다.
새벽이 오면 공항에 가야 해서 빠짐없이 짐을 싸고 이른 잠에 든다. 일어나자마자 캐리어 가방을 끌고 호텔을 나간다. 건너편 보도에 함께 귀국할 인원이 이미 모여 있다. 나는 그들과 차를 타고 호놀룰루 국제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자랑스럽게 귀국한다. 본가로 내려오니 밤이다. 아직 들뜬 마음이 가시지 않은 앙상한 계절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려왔냐?”
“어, 집이야.”
“우리 만날까?”
“나도 너한테 해줄 말이 많은데 잘됐다. 내가 올라갈게.”
우리 둘은 근처 정자에 앉아 자정까지 얘기를 나눈다. 생애 첫 해외라 추위 따윈 잊을 만큼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많다. 친구랑 헤어지고 중국 출국으로 벅찬 나날을 보낸다.
이월 초순 저녁 중국서 생활할 짐을 교회 차로 실어 부치라는 연락이 왔다. 중국도 사계라 단출하게 사철 옷을 채워 실어 보낸다. 밤이 지나 동이 터서 교회로 갔다. 예배당으로 걸음을 옮기는 나를 사모님이 부른다. 식당을 들여다보니 최민정이 중국으로 가져갈 삼단 가방을 채우고 있다. 식당 안에 들어서니 사모님이 또 하나 삼단 가방을 채우고 있다. 곧 줄자를 든 장년 형제님이 들어와서는 내 사이즈를 잰다. 체크를 마친 장년 형제님이 식당을 나가고 어리둥절한 내게 사모님이 두툼한 흰 봉투 두 통을 건넨다. 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날름 받는다. 까닭을 들은 후에야 먼발치 최민정이 보인다. 장년 형제님이 차분한 양복 한 벌을 들고 다시 들어온다. 나더러 입어 보란다. 나는 차분한 사람이 아닌데 사모님이 챙겨주신다.
오전 예배를 마저 듣고 교회 버스에 짐을 싣고 귀국한 단기 선교사들의 사진전을 관람하러 올라간다. 사진전 주차장엔 각 지역 교회 버스가 주렁주렁 맺혀있다. 나는 스치듯 관람하고 곧 있음 중국 단기 선교사가 될 또래를 따라 양천 교회로 가는 버스를 탄다. 곧 있음 중국 각 지역으로 파송될 단기 선교사 중 남대생은 태반 보이는데 여대생은 태반 보이지 않는다. 다들 근방에 사나 보다. 밤엔 각기 모여 함께 숙면하고 낮엔 중국으로 가져갈 모자란 생필품을 채운다. 재영이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잠시 나 혼자일 때 슬쩍 약국으로 들어가 먹는 변비약을 사서 얼른 주머니에 넣어 숨긴다. 다행히 재영이는 모르는 눈치다. 지나치게 체질이 수줍어 차마 관장약을 살 수는 없었다.
드디어 이월 십사일 입성한다. 또래 동승자는 규호, 재영, 민정, 향용. 나랑 같이 하얼빈으로 가는 이름 모를 두 여대생과 동갑내기인 향용이랑 같이 대경으로 가는 이름 모를 여대생이 공항 카트에 짐을 싣고 함께 무리지어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선다. 여태껏 나는 셋의 이름조차 모른다. 그때 또 한 명 이름 모를 여대생이 풍성한 공항 카트를 밀고 와선 아무 거리낌 없이 무리에 섞인다. 나는 낯가릴 새도 없이 그들을 쫓기 바쁘다. 그들을 쫒아 짐 무게를 재고 맡기고 그들을 쫓아 스튜어디스에게 표를 보이고 비행기에 탑승한다.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창을 내려다보니 개척이 없는 광토가 보인다. 하얼빈 타이핑 국제공항에 착륙했는데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 역시 사람이 많다. 줄선 사람이 빽빽하다. 게다가 심사관이 공안이다. 군복 입은 그들 앞에 나는 죄인인 것 같다. 내 차례가 와선 어느새 사고가 경직된다. 무사통과. 살갗이 한빛에 닿을 때쯤 금테를 낀 목사님이 상냥한 얼굴로 우리를 반겨준다. 목사님 뒤로 또래가 포진해있다. 환대가 낯설어 얼떨떨하다. 우리 짐을 실어주고 승합차에 동승한다. 달리는 내내 어디다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창밖을 내다본다. 처음엔 광토이던 거리가 나중엔 한자 간판 천지다. 광활한 거리와 한자 간판이 나를 자각시킨다. 여기야말로 은어 떼가 꿈꾼 중국 대륙이다.
바랜 건물이 즐비한 도로에 승합차가 멈춰서고 그들이 한 건물 문을 여니 계단이 올려져있다. 단독 아파트다. 그들을 따라 층계를 올라 집으로 들어서니 휘둥그레진다. 티 안 나게 보이려 눈을 비빈다. 일층과 이층에다 잇는 계단까지 내부가 짙은 나무색이고 정면엔 고급 집에서나 있는 피아노, 카펫, 소파가 보인다. 두 사모님이 우리를 반겨준다. 한 분은 하얼빈 사모님이고 한 분은 대경 사모님이란다. 우리는 사택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단기 선교사 두 명과 사역자 두 분이 함께 대경으로 직행한다.
우리는 형제 숙소와 자매 숙소로 각자의 짐을 옮겨 중국 생활 신호탄을 쏜다. 밤새 눈이 내렸구나. 형제 숙소를 내려와 겉문을 여니 천지가 하얗다. 뽀드득뽀드득 아파트 단지를 나와서 사택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대로를 덮은 눈이 반짝인다. 포슬눈이 바람에 날려 셋의 머리랑 어깨에 닿는다. 저기서 선미 누나랑 민정이랑 자매님 셋이서 이리로 걸어온다. 자매 숙소가 여기서 멀지 않나 보다. 일 원 지폐를 내고 탑승해 사택으로 간다. 목사님 입을 통해 성경 말씀을 듣고 우리는 중국어 기초를 배우기 위해 대학교랑 어학원을 맞춤형으로 방문한다. 민정이랑 재영이랑 정아는 각자 현지 대학교에 입학하고 소진 누나랑 규호랑 나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어학원에서 수강하기로 한다. 선미 누나는 중국어를 꽤나 하는지 링컨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
이틀째 되던 날 재영과 나는 버스를 잘못 타서 길을 잃는다. 날은 점점 저물어 가는데 버스는 예상과 달리 낯선 길을 달린다. 버스는 다시 우리가 탄 거리로 돌아갈 거라고 애써 안심시키고 창을 내다보지만 연이어 낯선 길을 달린다. 해는 져서 까만데 어디로 가는 걸까? 텅 빈 버스가 밀집된 장소로 들어서더니 주차한다. 기사는 차 키를 빼고 버스에서 내린다. 우리는 후다닥 기사를 세웠지만 중국말을 모르니 머뭇거린다. 어떻게든 우리 상황을 전해야 한다는 강박이 실행한 모국어와 온갖 몸짓이 다행히 통했나 보다. 우리는 기사를 따라 낡고 허술한 사무실로 들어선다. 전구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인 장년들이 중국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들 사이로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가 보인다. 나는 지갑을 꺼내 명함을 뺀다. 길을 잃기 전 정아가 다닐 대학교에 등록하러 갈 때 따라갔었는데 거기서 건네받은 조선족 직원의 명함이다. 우리는 전화기를 써야 한다고 아무리 설명하지만 그들에겐 도무지 들리지 않나 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불빛 밖을 나와 까만 거리를 재회한다. 우리는 전화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공용전화를 보유한 상점으로 들어간다. 상점 주인이 말을 걸까 얼른 수화기를 든다. 동전을 넣어 명함에게 전화를 건다. 들려오는 모국어에 그제야 바싹 쪼그라든 긴장이 풀린다. 우리 사정을 말하고 상점 밖을 나와 추위랑 재회하여 덜덜 기다리니 현지 전도사님이 데리러 왔다. 승합차를 탄 우리는 중국 단기 선교사로 되돌아간다.
우리는 전도사님이랑 먼 지역 집회 참석차 기차를 탄다. 도중 정아랑 대화를 나눈다. 내 실토에 정아가 속내를 드러낸다. 자기도 환경이 바뀌면 변비가 생긴다고. 집회 건물에 도착한 우리는 전날 익힌 댄스 동선을 마저 맞추고 숙소로 내려가서 휴식 겸 저녁을 먹는다. 나는 이때다 싶어 몰래 챙겨둔 변비약을 삼키고 바로 일인 화장실로 가서 요대를 풀고 쭈그려 앉는다. 효력을 못 봤다. 혈압을 올려 간신히 변 토막만 봤다. 그나마 문이 트여서 다행이다.
저녁 집회 문을 서투른 우리 댄스로 연다. 이걸로 우리 역할은 끝난 줄 알았는데, 나더러 말씀을 전하란다. 나는 믿음이 무지한 사람인데, 어쩌지? 다행히 전날 마음에 흔적을 낸 말씀이 있어 성경을 편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나는 말씀을 읽고 간략히 말씀을 전한다. 그 후 우리는 곧바로 밤기차로 복귀한다.
오전엔 각자 중국어를 배우고 오후엔 독학 및 개별 시간을 갖는다. 온지 한 달이 지나 시야가 일상이 될 쯤 룸메이트 규호 말이 강제니퍼가 곧 올 거란다. 우리보다 어린 재미교포 여대생이란다. 머리카락은 노랗고 눈동자는 푸를까? 궁금하지만 나는 묻지 않는다.
셋이서 승합차를 타고 강제니퍼를 마중하러 공항으로 간다. 예상달리 강제니퍼는 청아하다. 우리는 승합차에 짐을 실어주고 사택으로 이동한다. 이걸로 우리는 완전체가 된다.
본인이 가져온 돈은 각자 소유한다. 나 역시 은행에 돈을 맡겨 필요 때마다 출금한다. 나는 관리가 처음이라 여태껏 방치해 놨는데 수업을 마치고 규호를 따라서 맞은편 은행으로 들어간다. 규호는 앞에서 일을 보고 나는 후면 벤치에 앉아 규호를 기다린다. 문 개폐가 울리더니 내 옆에 누군가 앉는다. 고개를 돌리니 소진 누나다. 한 건물에서 수업을 받아 우리는 자주 만난다. 등교 때에는 함께 할 수 없지만 하교 때에는 셋이다. 만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뭉게뭉게 누나가 스며든다.
학업이 쉬는 토요일엔 교실을 빌려 대학생 모임을 갖고 일요일엔 짝지어 타 지역 교회로 간다. 나는 정아랑 둘이 동승한다. 엄숙한 공간을 예상했는데, 어린애들이 모여 있다. 얼떨한 나는 애들 앞에서 정아랑 댄스를 보여주고 한 동작 한 동작 가르친다. 시간이 흘러 해는 저물고 둘이 시외버스를 타고 하얼빈 역으로 복귀했는데, 주머니에 지갑이 없다. 어디에도 지갑이 없다. 아마도 시외버스에 떨어뜨리고 내렸나 보다. 당황한 나는 시외버스를 잡으려고 달리는데 옆에 정아가 함께 달려준다. 나는 지갑 찾는 걸 포기하고 정아랑 둘이 시내버스를 타고 자매 숙소 앞까지 정아를 데려다 주고 형제 숙소로 혼자 걷는다. 걷는 내내 정아가 생각난다. 아마도 정아가 스며들었나 보다. 이후 지갑은 곁 어른들로 인해 내게 돌아왔다.
온지 처음으로 공연에 초청되어 우리는 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에서 늦은 밤 새벽까지 댄스 연습을 한다. 문이 열려 목사님과 사모님이 들어온다. 우리는 목사님과 사모님 앞에서 최종적으로 댄스를 선보인다. 애초부터 댄스를 싫어하는데다 모든 무대는 내겐 역부족이라고 목사님에게 첫 무대는 빼달라고 요구한다. 목사님이 허락으로 나는 첫 무대를 뺀 다음 무대에 집중해 첫 초청 무대를 무사히 마친다.
노동절 연휴 우리는 대학교 터를 빌려 봄맞이 한국어 캠프를 연다. 대부분 기존 또래지만 간혹 새로운 또래가 눈에 띈다. 우리는 반을 나눠 각각 팀을 이룬다. 함께 배우고 함께 말씀을 듣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게임을 하는 동안 우리는 어느덧 국경을 넘어 친구가 된다.
캠프 마지막 날 우리는 마라톤을 한다. 한 바퀴째 선두는 놓쳤지만 꽤 뛸만하다. 두 바퀴째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세 바퀴째 좁혀지긴커녕 추월만 당한다. 네 바퀴째 뛰다가 걷다가 뛰다가 걷다가 뛰다가 걷다가. 다섯 바퀴째 월등히 앞쪽이 많다. 여섯 바퀴째 이미 피니시라인을 통과한 이들이 계종하는 우리를 격려한다. 일곱 바퀴째 기다시피 헐레벌떡 피니시라인을 통과한다.
타 지역 교회로 혼자 갈 때가 더러 있다. 이제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쯤은 혼자서도 거뜬하다. 조선족 부부가 여전히 반겨준다. 그들 목회를 쫓아다니며 그들의 가치를 배운다. 부부 가정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아 머리를 감으려고 화장실로 들어서니 콘크리트 원색이 버젓이 드러나 있는데다 쭈그려 앉을 수 없을 만치 좁다. 변기조차 없다. 아마도 부부는 밖에서 해결하나 보다. 중국 거리엔 푸세식 공중화장실이 보편화 되어 있으니 말이다. 정면엔 높게 물이 채워진 걸 보아 이 공간에선 샤워만 하나 보다. 아무튼 이 공간에서 내게 머리 감기란 무리다. 나는 부스스한 모양새로 복귀한다.
이번에 방문한 타 지역 교회는 그냥 평범한 가정집이다. 형제 숙소만큼이나 넓다. 신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우리는 거실에서 말씀을 듣는다. 말씀을 다는 이해 못하지만 중국 생활이 익숙해진 만큼 우리들의 믿음이 익숙해진다.
이제는 사택까지 혼자 걸어 다닐 정도니 이제는 이곳이 고향 동네 같다. 주말이 되면 사택으로 가는 길가에 향연이 열려 내내 시야가 즐겁다. 어디서 이 많은 상인이 나타나 가시나무를 팔까.
나 혼자 어학원으로 간다. 간혹 혼자 가는 날이 있어 익숙하다. 수강을 마치고 일층으로 내려가니 소진 누나가 있다. 누나는 내게 말한다. 흑룡강대학교에서 공연 초청이 와서 함께 가자고. 다들 흑룡강대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흑룡강대학교는 민정이 배움터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흑룡강대학교로 간다. 얼마나 설렌 지 닿을 듯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내 마음을 누나는 모를 거다. 흑룡강대학교가 처음인 나는 누나를 따라 한 건물로 들어선다. 소파에 앉아 둘러보는 어느 틈엔가 민정이가 우리 곁에 와있다. 우리 셋은 밖으로 나가 딴 건물에 있는 구내매점으로 들어간다. 컵라면과 소시지를 사서 탁자에 놓고 소파에 앉는다. 우리는 물 부은 컵라면과 소시지가 놓인 탁자를 둘러앉아 둘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나는 익은 컵라면과 소시지만 먹는다.
“언니, 대경에 언제 가?”
이게 무슨 소린가. 소진 누나가 대경에 간다니. 대경 단기 선교사는 둘 뿐인데 비해 대학생 모임이 워낙 많아 우리 여덟 명 중 한 명이 대경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듣긴 들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사실이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 수 없다. 눈물이 삐져나온다.
“이번 공연 마치고 곧.”
며칠 전 본 게 꿈이 아니란 말인가. 사택 이층 방에서 자다 깨어 계단 밑을 내다보니 아래층 거실에 목사님과 소진 누나가 있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누더니 곧 소진 누나가 털썩 주저앉아 서글피 운다. 차라리 나였으면 이토록 슬프진 않으련만. 나를 대신 보내라고 말할까. 하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눈물이 들키지 않게 껌뻑껌뻑. 흔적을 가리고 둘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가니 나머지 우리를 만난다. 다들 제공 받은 연습실에서 공연 준비를 하는데 나만 누나와의 이별 준비를 한다. 어느새 공연이 마치고 하루하루 조마조마 물 위를 걷는 듯하다.
목사님에겐 보였나 보다. 대학생 모임 이후 나랑 정아랑 소진 누나랑 셋이서 타 지역 교회로 가라 하신다. 기쁜 소식에 나의 조바심이 잊히는 듯하다. 우리는 바로 택시를 타고 기차역으로 간다. 역 부근에서 허기를 채울 컵라면과 소시지를 사서 기차에 오른다. 둘은 아닐지 모르나 나는 잊지 못하리라.
마침내 누나를 떠나보낼 시간이 왔다.
“내일 소진이가 떠나니까 다들 사택에서 저녁 먹자”
나는 목사님 말에 객기를 부린다. 나랑 같이 어학원에서 수강하는 규호는 일주일에 한 번씩 태권도를 가르치기 때문에 수업이 마치자마자 링컨학교로 가고 나는 형제 숙소로 간다.
다들 이미 모였을 텐데 나만 누나를 보내지 아니한다. 형제 숙소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외면하고 싶지만 수화기를 건네는 중국 형제를 설득시킬 자세가 내겐 없다. 나는 밤을 걸어 사택으로 간다. 지금 심사로는 더딘 게 맞으련만 어느새 사택 앞이다. 사택으로 들어서니 다들 식사 중이다. 나더러 식탁에 앉으라 하지만 나는 이미 저녁을 먹어 배부르다고 거절한다. 맞은편에서 식사하는 목사님이 배불러도 먹으란다. 나는 재차 거절한다. 순간 목사님이 주먹을 뻗어 나의 배를 타격한다.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파 이층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쓰러져 운다. 누나를 떠나보내는 아픔을 치유할지 몰라 눈물만 주룩주룩 흩날리는데 창으로 달빛이 들어와 전등을 켜지 않아도 따사로이 다독여 밝힌다.
문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사모님이다. 문을 열어 사모님을 경청한다. 진정되거든 내려오라 하시고 문을 닫고 나가신다. 그제야 눈물이 마른 듯하다. 일층으로 내려가서 목사님과 화해를 하고 우린 사택 밖을 나선다. 나는 미리 준비한 편지를 누나에게 콩닥콩닥 건네고 머뭇머뭇 택시를 태워 보낸다.
학업을 종결한 우리는 본격적으로 또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오전엔 사택에서 우리끼리 성경 모임을 갖고 오후엔 짝지어 흩어져 또래를 만난다. 그러다 공연 초청이 오면 하나로 뭉친다.
누나를 보낸 지 얼추 보름이 지난 그날도 우리는 대학생 모임을 갖고 선교학교 맞은편 식당에서 저녁 대접을 받고 사택으로 가는 길에 민정이 휴대폰이 울린다. 소진 누나다. 민정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사람은 소진 누나다. 서운함 때문일까. 그리움 때문일까. 나는 저만치 앞질러 걷는다. 민정이가 나를 부른다. 내겐 휴대폰이 없어 민정이 휴대폰으로 걸었나 보다. 나는 못 들은 척 더 빨리 걷는다. 선미 누나도 나를 부른다. 나를 못 이기는 척 휴대폰을 건네받는다. 나만 남기고 다들 사택 건물로 들어간다. 전화일 뿐인데 마치 옆에 있는 듯 설렌다.
“지났지만, 생일 축하해.”
아흐레가 지난 내 생일을 누나가 기억하고 있다니 가슴이 벅차올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하얘진다.
이후 우리는 대경을 방문한다. 자매 숙소에서 공연 연습은 아니 하고 나만 줄곧 누나만 바라본다. 한동안 멎어있던 그리움이 울긋불긋 단풍든다. 공연을 마치고 하얼빈으로 복귀해서도 한동안 누나 곁을 머문다.
목사님이 하얼빈을 비운 사이 우리는 무전전도여행을 명받는다. 자매들이 먼저 무전전도여행을 떠났지만 나는 수긍할 수 없다. 무전전도여행 기간 동안 이춘으로 피신할 궁리를 한다. 은행에서 사비를 빼 만반의 준비를 하고 무전전도여행 날만을 기다린다. 마침내 출발 날이 왔고 나는 가기를 거부한다. 일탈로 싸맨 가방을 챙겨 도주하는 나를 현지 형제가 붙잡아 둘과 택시를 태워 기차역으로 보낸다.
기차역엔 향용이가 미리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넷은 기차를 타고 흑하로 간다. 나의 시무룩이 얕은 평안을 품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다. 역을 나와 우리는 택시를 타고 산골 깊숙이 들어간다. 그새 밤이 오고 우리는 라이트 빛만을 의지해 목적지로 전진한다. 이리도 밤이 깊은데 목적지는 아니 보이고 동승자가 쉬가 마렵대서 도중 내려 밤하늘을 바라본다. 별이 빼곡하다. 아름다워 규호에게 찍어달라고 하니 찍어봤자 배경이 어두워서 별이 나타나지 않는단다.
우리는 다시 라이트가 비추이는 길을 전진한다. 완공도 채 되지 않은 너저분한 건물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이딴 곳에 택시가 정차하다니. 나는 얼떨떨한 기색으로 차에서 내려 셋을 따라 막다른 길을 관찰한다. 차가 진입할 수 없게끔 흙더미가 쌓여있다. 기사는 인부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는 택시를 돌려 숲을 빠져나간다. 우리는 공사장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을 대접받고 흙더미를 샛길로 넘어 물컹물컹 전진한다.
여태껏 찾던 곳이 여기였구나. 우리는 악륜춘 마을에 입성해 규호가 인솔하는 대로 집집마다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신비롭게도 끼니를 대접받는다. 복음을 전하는 게 이토록 즐거울 줄이야.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다. 이대로라면 나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도 하얼빈 복귀가 가능할 것도 같은데. 복귀해라는 날짜가 지났단다. 복귀해야 할 날짜가 정해져 있었다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기도뿐이다. 셋을 따라 시늉을 하긴 하지만 우리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저들에게 은혜를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 아닐까. 하나님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아니지 않을까.
셋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며 복귀를 감행한다. 나는 침묵으로 동참한다. 우리는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이곳에 무전전도여행을 왔고 가진 게 한 푼도 없어서 숙박비를 지불할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주인은 어이가 없는지 외면하고 옆자리 어른이 대뜸 우리더러 한국 노래를 불러주면 숙박비를 대신 내주겠다고 한다. 그들에게 찬송가를 불러주고 우리는 공안국으로 이첩된다. 거기서 우리는 하룻밤을 묵고 끼니를 대접받고, 이곳은 이전보다 훨씬 널찍하고 훨씬 해가 잘 드는 마을이다. 우리는 근처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택시가 보이고 규호는 기사에게 역까지 가는데 얼마냐고 묻는다. 기사는 백 원을 달라고 하고 그때부터 나는 갈등에 빠진다. 나의 허물을 드러내면 셋이 원망할 테고 모른 척 눈감아도 복귀 확정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기사에겐 잠시 기다리라 하고 셋에겐 내게 돈이 있으니 여기서 나가자고 말한다. 우리는 짐을 챙겨 택시를 타고 역으로 간다.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 묵기로 한다. 침대에 눕기도 전에 규호가 복음을 전하러 나가잖다. 세 명 의견에 따라 근처 가게마다 들러 복음을 전한다. 옆에선 복음을 전하고 창밖엔 소나기가 내린다. 셋은 비가 오든지 말든지 복음만을 외치고 나는 비가 그치기만 기다린다.
내일이 밝아 창을 내다보니 날이 개었다. 우리는 여관을 벗어나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표 네 장을 산다. 한 장당 오십삼 원. 나만 일탈하면 될 것을 그들만의 무전전도여행을 망친 건 아닌지 못내 미안하다.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이 오고 우리는 북방 단기 선교사 모임 참석차 연길로 간다. 모임 장소로 들어서니 다들 이미 모여 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성경 말씀을 듣는다.
이틀째 되는 날 원계획대로 우리는 금식을 시작한다. 다들 잘 견디는데 나만 왜 이러지. 눈 뜨고 한 끼도 못 먹어서 정신이 혼미하고 시야가 흩어져 좀체 성경이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려고 그나마 차가운 부엌 바닥에 앉아 성경을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시야는 더욱 더 흩어져만 간다.
눈 한번 껌뻑였을 뿐인데 방 안 침대에 혼자 누워있다. 비몽사몽 화장실을 다녀와서 침대에 누워 혼곤히 잠에 빠진다.
비몽사몽 허우적이는 나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정신 차리라며 목사님이 흔들지만 여전한 탓인지 철썩 나의 뺨을 때린다. 나는 아파서인지 아이처럼 엉엉 울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누구야?”
목사님이 묻는다. 나는 퍼붓는 눈물에도 소진 누나라고 대답한다.
나는 깨어나 죽을 먹고 그들과 동석해 저녁 말씀을 듣는다.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원계획에 없던 백두산을 관광하러 우르르 승합차를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매표소 앞에 주르르 서서 기대 반 설렘 반 입장권을 매만진다. 우리는 셔틀버스를 타고 들목으로 이동한다.
등반 내내 탄성을 자아내는 수려함이 역시 명산이다. 어느덧 정상을 밟으니 눈앞에 천지가 펼쳐져 있다. 온갖 대중매체를 통해 보고 듣긴 했지만 이토록 영롱할 줄이야. 우리는 정상에서 몇 장의 추억만을 남기고 하산한다. 숙소로 복귀하는 내내 감동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그새 날이 저물고 우리는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스르르 잠이 든다.
나흘째 되는 날 다들 주 활동지역으로 흩어진다. 우리는 복귀 전 관광차 두만강으로 간다. 이곳이 국경임을 중조우의탑이 증명한다. 두만강 이편과 저편이 별반 다른 게 없는데 뭐가 다르다는 걸까. 우리는 몇 장의 기억만을 찍고 기차역으로 이동한다. 하얼빈으로 복귀하는 기차에 오르니 스르르 눈꺼풀이 감긴다.
복수가 식물인간 판정을 받은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삐ㅡ”
굉음이 적막을 깨우더니 어머니가 겁에 질려서는 고래고래 의사를 부르며 병실을 뛰쳐나간다. 의사가 비몽사몽 허겁지겁 들어와서는 심폐소생술로 복수를 되살리려 한다. 창밖에는 밤이 깊고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티비에는 캐럴을 합창하는 거리 공연인과 그들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자욱하다. 복수의 맥박이 돌아오자 어머니가 넋을 잃고 털썩 주저앉는다.
겨울이 오면 하얼빈 거리는 따사롭다. 밤이나 낮이나 곳곳 상점들마다 아이스크림 같은 냉동식품을 밖에 내놓는 진풍경을 이룬다. 하얼빈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겨울인데, 나는 처음 보는 경관이다. 교제와 행사로 일궈낸 홍등 점등식이 희열로 충만하던 터에 어느덧 겨울이 무르익고 귀국발표회 준비로 북방 단기 선교사 모두가 하얼빈으로 모였다. 귀국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바심과 아쉬움 보다는 다들 모였다는 기쁨이 앞서는 순간이다.
우리는 오전엔 간증과 말씀을 듣고 오후엔 뭘 할지 자료를 찾고 구상을 해서 연습을 하긴 하지만 며칠째 해답이 나오지 않자 목사님이 다들 대학교로 불러 모아 공연을 참관하게 한다. 목사님은 관람한 댄스 중 ‘녹의’가 좋겠다고 하시고 우리는 그 뜻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녹의’는 여성들만으로 이루어진 부채춤이어서 남성들은 그저 어영부영 시간을 때운다. 물어 본적은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잘된 일이다. 나는 워낙 몸치라서 그들에게 걸림돌만 될 테니까.
우리는 헤어지기 전 하얼빈빙설제를 관광한다. 나는 들어서자마자 휘둥그레진다. 우아한 얼음덩어리가 이곳저곳 널려 있다. 이런 곳에 그들과 함께 있으니 내가 마치 우아한 존재가 된 듯하다. 우아한 시간도 어김없이 필름 속 추억만이 되어 사진 속 이들을 뿔뿔이 흩어놓는다. 우리는 귀국 전 파타야에서 다시 만나겠지만 그때 우리는 우리가 아닌 그저 글로벌캠프 참석자 중 일원일 뿐이다.
글로벌캠프가 폐막하고 다들 본향으로 귀국했는데 우리는 북경으로 복귀하여 천안문을 관광한다. 하하호호 웃다보니 어느덧 제니퍼를 보내야 할 시간이 왔다. 제니퍼는 공항으로 가고 우리는 거리를 이리저리 구경하다 날이 저물어서야 하얼빈행 기차를 탄다.
사택에는 목사님과 사모님이 이미 와 계셨다.
“오늘밤은 사택에서 묵고 내일 아침 일찍 각자 숙소로 가서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가자.”
목사님의 말이 못내 울컥하다. 나는 슬금슬금 사택을 빠져나와 형제 숙소까지 마지막이 될 이 길을 혼자 걷는다.
복수가 눈을 떴다. 환자복을 입고 혼자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이 이상한지 두리번두리번 껌뻑껌뻑 까르르 자지러진다. 창밖은 젖빛이고 가루눈이 내리고 있다. 창으로 가려 하나 팔뚝에 꽂혀있는 링거 바늘 때문에 가지 못해 아파 엉엉 운다. 병실 문이 버럭 열리고 물병을 든 어머니가 부들부들 들어선다. 깨어나 있는 복수를 보고 그만 물병을 놓친다. 어머니가 와락 복수를 껴안고 펑펑 운다.
“깨어난 것이 기적이긴 하지만 환자의 지능이 유아 수준으로 역행하였습니다.”
의사 권유대로 부모님이 복수를 퇴원 시킨다. 집이 머지않아 복수가 목이 마르다고 보챈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근처 대형마트로 복수를 데려간다. 오르락내리락 이리저리 찾아봐도 정수기가 보이지 않아 물을 살 수 밖에 없다. 벌컥벌컥 갈증을 해소한 복수가 이번엔 쉬가 마렵다고 보챈다. 남자 화장실로 복수를 들여보내고 어머니는 여자 화장실로 들어간다. 몹시 급했던 모양이다. 복수가 지퍼도 내리지 않은 채 오줌을 질러버렸다. 바지가 흥건해지고 복수는 울먹거리며 남자 화장실을 나와 어머니를 찾아 헤맨다.
터벅터벅 걸을 뿐인데 스치는 사람들마다 복수를 동물 쳐다보듯이 구경한다. 뒤늦게 화장실에서 나온 어머니는 복수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복수가 시식하는 빵을 차마 먹지는 못하고 군침만을 삼키고 있는데 불쑥 옆에 꼬마 소년이 나타나서는 시식 빵 하나를 집어먹더니 또 하나 집어서 복수에게 내민다.
“아저씨 이거 먹어봐. 되게 맛있어?”
복수가 냅다 받아먹는다.
“나 아저씨 아닌데?”
“아저씨가 아니면 뭐예요?”
“......”
“봐, 대답 못하잖아!”
벙어리가 된 복수 입에 소년이 시식 빵을 집어 넣어준다.
“아저씨는 왜 살아요?”
“나 그런 거 몰라. 이거 되게 맛있다.”
복수는 시식 빵을 집어 먹는 데만 정신이 팔린 듯하다.
“그럼, 이제부터 생각하면 되겠네. 아저씨는 왜 살아요?”
“......”
머뭇머뭇 울먹울먹 복수는 끝내 대답 대신 철퍼덕 주저앉아 엉엉 울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