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저 빛나는 선율을 만들어내는 흰색과 검은색의
징검다리를 일부러 시간 내어
세어보지 않는다.
그가 그녀에게 물어볼 때에 ‘혹시 그거 알아요? 흰 건반과 검정색 건반의 숫자들을..’ 이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에 ‘당신이
만들어낸 이 아름다운 멜로디는 누구의 곡이며, 얼마나 오랫동안 그것을 배웠나요?’ 라고는 물을 수 있다. 그녀가 만들어낸 흰색과 검정색의 조화..
여기에는 미세한 손가락의 악센트와 그 리듬을 체득한
그녀의 실루엣이 담겨져 있다.
라디오에서 퀴즈가 나온다. 검정색과 흰색의 숫자에 대해서..그러나 그와 그녀의 교감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제나 말도 필요치 않을 것이리라.
그가 들었던 그 사람의 마지막 피아노 소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스쳐 지나갔던 어느 학원에서 흘러나왔던 그 음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듣지 못했으리라.
오늘 유독 쌀쌀해진 방의 기운과 마디마디 긴장되어
있는 손가락이 대체 어떤 글을 쓰기 위해 이 글을 적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온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서울에서의 실황 공연 그리고 bibo no aozora 라는 의미를 분간하기 힘든 제목의 피아노
곡을 플라스틱 타자와 함께 치고 있는 중이다. 인간 내면의 고요함 속에 울려 퍼지는 흑백의 조화로움은
신기하리만큼 천연의 이미지를 선사해주며,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왠지 지금 이 순간이 생각날 것 같다는
암시를 전해 주는 것만 같다.
길가의 모퉁이에서 문득 몇 년 전쯤 꿈꿨던 광경이
펼쳐지는 것과 같이 시간이 흘러 어딘가의 그는 지금 이 순간을 끄집어내어 생각에 잠길 수도 있으리라.
우주의 신비와 각자의 영혼 속에 담겨져 있는 신비로움은
서로 이어져 있으며, 이런 연결의 끈은 사고에도 연결되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과거의 그는 현재의 그에게 미래의 그는 현재의 그에게 말을 건네고 행동할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탁월한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탁월한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미 그 안에 담겨져 있으며, 그것을 끄집어내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만남, 책을 통한 체험 그리고
여러 시도하는 행동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흰색과 검정색의 숫자라기보다
하모니가 만들어내는 음율을 가슴 깊이 느끼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인생의 한 순간을 감사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아나가는 데에 있으리라.
88개의 흑백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