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폴에서 굳이 래플스 호텔을 고집한 것은 단순히 술 때문이었다. 칵테일 싱가폴슬링을 처음 만들었다는, 우리말로 족발집 간판 맨 첫머리에 붙는 <원조>라는 수식어가 100% 진실인 래플스 호텔의 롱바에 들어섰을 때 바닥에 산재한 땅콩껍데기가 생소했으나 이내 익숙해졌고 5분 후에는 나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연신 땅콩을 먹고 껍데기를 바닥에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감정들은 과거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나는 정확히 10분 후 진짜정말원조 싱가폴슬링에 대해 대단히 실망했기 때문이다. 서대문구 홍제동 변두리 카페에서 5분만에 뚝딱 만들어 주던 그것보다 심심했으며 너무 달기만 했다. 맛이 어때요? 확실히 다르죠? 가이드가 자랑스럽게 물었고 나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잃었다. 그래, 확실히 다르다 달라. 차라리 소주를 한 컵 달라. 바닥에 수북한 땅콩의 잔재들도 못마땅해졌다. 나는 그때도 아마 다른 생각을 했거나 지나치게 무모했던 탓이리라. /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롱바도, 터번을 쓴 래플스의 명물 도어맨도, 심지어 싱가폴슬링의 맛도. 단지 예전에 비해 잡생각과 눈물과 뱃살이 늘어난 대신 조금 덜 무모해진 나를 제외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