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연다. 나즈막한, 들릴듯말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파.. 파랑이라는 이름은... 파란 바다처럼, 파란 하늘처럼 모든 것을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고 붙여준 이름이라는데... 저, 전 아무래도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헤헤, 보듬어주기는 커녕 이렇게 늘 다른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는데요, 뭘... "
예상했던 대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대답을 한다. 다분히 공상가적인 느낌이 든다. 현실에서도, 공상에서도 각기 어중간하게 발을 들이민 채로 양 쪽 모두에게 절망하고 있는 83에게는, 공상적인 사람과 현실적인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 아무래도 공상적인 사람은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대해 뜬구름 잡는 대답을 늘어놓는 데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83 그 자신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좋은 이름이네예. 그라믄 이제부터 잠시 동안이라케도, 저 불쌍한 입시 기계들을 잘 좀 보듬어주이소. 물론 저 안드로이드들을 보듬는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순간 현실로 돌입해버린다. 현실과 공상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는 83의 대화 스타일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사람들에게는 아리송한 말로 들릴 뿐이고, 공상적인 사람들에게는 감수성이 떨어지는 말로 들릴 뿐이다.
"예? 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이끌어주세요."
"아닙니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데이. 저도 이 바닥에서 논지는 얼마 안되가꼬 잘 모르긴 하지만요."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자의 무뚝뚝한 표정을 보며 흠칫, 하고 놀라더니 고개를 떨구고 만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려는 걸까. 주저하는 모습. 다시 빨개진 얼굴에서 이걸 말해도 괜찮을까 라는 글귀를 읽어낸다. 물론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수 없다. 무슨 말을 내게 하려는 거지? 이 여자는. 83은 흘낏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 뒤에는 시계가 걸려있다. 9시 20분. 시간이 얼마 없다.
"저, 저기..."
"자, 그라므는 이제 요 소설 부분만 쫌 더 설명을... 아, 예?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꺼?"
거의 동시에 뱉어낸 첫 음절에서부터, 여자보다 약 10배 이상 큰 성량을 가진 남자의 목소리에, 간신히 꺼낸 여자의 말은 묻혀 버리고 만다. 얼굴이 급격하게 붉어지면서 눈물이 글썽거린다.
"아, 아니에요... 그, 그것보다 우선 저는 신경쓰시지마시고 그 소설 부분을 서, 설명해주세요...."
"아..."
신경쓰지 않을 수가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다람쥐보다 동그란 검은 눈동자에서는, 마치 만화에서나 볼 수 있을 듯이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다. 바로 위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서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마치 순정만화 속의 히로인 같은 여자의 앞에 소년만화 속의 악당같은 남자가 앉아있다는 게 문제다.
마음이 심히 언짢아진다. 언짢다라는 어휘로는 적절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 감정이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쓰는 게 더 맞겠지만, 아직 이런 감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일은 끝내놔야만 한다. 83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한다.
"자, 자. 그러면 언능 설명해드릴게예. 이 [광장] 이라는 소설에서 6문제 정도 나온다고 하는데, 제시문으로 나올 부분은 여기 앞쪽의 중립국을 선택하는 장면, 마지막의 갈매기를 은혜와 딸의 화신으로 인식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 이렇게 되어 있거든예. 잘 아시다시피 우선 핵심적으로 체크해주셔야 할 부분이 밀실, 광장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셔야하고요... 그리고..."
둘만의 조그마한 광장. 사랑의 광장. 갈매기. 은혜. 무덤에서 몸을 푼 여자. 동굴. 전쟁. 타고르 호. 부챗살의 사북자리. 그리고... 파아란 바다. 사랑... 그대의 이름은 블루... 파란 방... 창문... 보듬어 줄 사람...
......
"저, 저기 83 선생님...?"
순간 퍼뜩, 하고 정신이 든다. 이런 니미럴. 순간 멍 때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저기... 무슨 생각하실 거라도 있으세요?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으셔서..."
"아, 아뇨. 죄송합니더. 제가 잠깐 멍 때렸나봅니다. 하하하..."
앵두같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채, 아이같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남자는 똑바로는 아니더라도 비스듬한 각도로 여자를 바라본다. 뭐였지...? 방금 전의 그 생각들의 나열은? 이 여자를 만난 이후로 왜 내가 이렇게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거지? 아직 가슴은 전혀 뛰질 않지만 갑자기 여러가지 일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을 맴돈다. 이 여자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부터.
"자, 그라믄 설명을 마저 해드릴게예. 여기 마지막의 바다라는 공간은, 그 뭐시기고 주인공 이명준이가 마지막으로 택한 광장으로써, 그... 사, 사랑의 공간, 은혜와의 사랑의 공간, 둘 만의 광장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예. 이 점이 이 글의 핵심이니꺼, 강조해서 얘기해주셔야합니더."
사랑의 공간이라는 말을 할 때, "사랑" 이라는 말을 한 번에 뱉어내지 못했다. 사랑, 이라는 말을...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