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로 들어선다. 저 쪽 한 구석의, 그의 책상 근처에 있는 테이블로 간다. 몇 개의 널브러진 프린트들이 보이지만,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에는 녹차를 마시고 내버려둔 빈 종이컵 두 개가 덩그러니 하고 놓여있다. 어디로 간걸까. 잠시 화장실이라도 간 모양이지. 지금부터 밤 10시까지는 수업이 없다. 10시부터 사탐 보충 수업이 시작된다. 그래서 그 두시간 동안 그 여자에게 설명을 해야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그 여자가 없다. 1분도 안 되어 돌아올 거라는 것 쯤은 알지만, 왠지 모를 서운함을 숨길 수가 없다.
녹차를 마시던 컵을 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녹차 두 컵을 따라온다.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프린트를 집어든다. 조잡하게 밑줄이 그어져있는 한 장. 아마 여자가 밑줄을 그어가며 내용을 정리한 듯 하다. 동글동글한 글씨들이 씌여져 있다. 거친 그의 글씨체에 비해 상당히 예쁜 글씨체다. 주인을 닮는 건가. 피식, 하고 웃는다. 왜 이러지.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거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약간의 호감을 가지게 되는 건 왜일까? 그리고 그래서 내가 이 호감을 애정으로 바꿀 수 있는 걸까.
무심코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옆에는 또다시 얼굴이 새빨개진 자그마한 여자가 어쩔 줄을 몰라하며 서 있다. 자신이 보던 프린트를 유심하게 살펴보고있는, 험악하게 생긴 그녀의 직장 상사.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정도면 당황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여자는 너무 자주, 곤란해하는 얼굴을 한다. 얼굴은 너무 자주 새빨개지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뚝 떨어질 것 같은 눈가엔 종종 이슬이 맺혀있다.
"오셨어요? 오셨으면 앉으이소.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 드릴게니께."
"죄...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2분도 채 기다리지 않았지만 왠지 아주 오랜 시간을 이 테이블에서 기다린 듯한 느낌이 든다. 아주 약간의 서운함을, 아주 약간의 농담과 장난으로 대체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글쎄요~. 와 보니께 쌤이 안 계셔서 휙 하고 어디 가버리신근 아닐까 걱정했지예."
"예? ... 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얼굴이 더 새빨개진다. 재미있다. 자신보다 한 여섯 살은 어리려나. 그렇지만 또 다시 울어버리려는 표정을 한다. 커다란 눈망울은 벌써부터 글썽거리고 있다. 어, 그렇다고 울어버리면 안되는데. 지금 연애를 하는게 아니라 수업 준비를 하는건데. 퍼뜩 정신을 차린다.
"어...? 아, 농담입니더, 농담! 자, 자 이제 수업 준비를 해야지예."
"예...? 아... 예..."
시선을 딴데로 돌리는 그녀의 눈빛에서 약간의 원망기를 읽을 수 있다. 원망하게 해선 안되지.
"죄송합니더, 너무 긴장하시는거 같아가꼬... 죄송합니더."
"예?? 아니,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제가 데차지 못해서 그런걸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나즈막한 속삭임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빨라진다. 그와 동시에 다시 얼굴이 새빨개진다. 흠, 내가 잘 한 짓일까. 문득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본다. 왠지 그의 얼굴도 약간 빨개진 듯 하다. 다른 쌤들은 수업 준비를 하거나, 수업을 나가버려서 지금 이 조그마한 테이블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그와 그녀, 두 사람만이 이 곳에서 첫 만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남, 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그라믄 우선 여기 국어 파트부터 정리를 할게요. 지금 D고에서는 여기 여기가 시험에 나온다니까..."
마치 1대 1 보충 수업을 하듯 차근차근, 설명을 해준다. 끄떡 끄떡, 고개를 끄떡인다. 왠지 귀엽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어떻게 어느 부분을 강조해야 할지 설명해준다. 그러다보니 분량이 긴 소설 부분은 맨 뒤로 밀려졌다.
아홉시. 조금 쉬기로 한다. 마지막 녹차 한 모금을 쭉, 하고 들이킨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프린트를 바라보고 있다. 원 교재와 이리저리 대조를 해보면서. 그렇지만 왠지 이해력은 그렇게 뛰어나보이진 않는다. 머리가 발달된 타입은, 그가 보기에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왠지 마음이 발달된 타입처럼 보인다.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전염시키는 그 따스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를 뒤로 쭉, 젖힌다. 여전히 오래 앉아있다보면 허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심결에 툭, 하고 뱉어본다.
"쌤의 이름이 파랑이라고 했지요? 참 예쁜 이름 같은데, 무슨 의미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교?"
순간 커다란 눈망울 두 개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다. 83의 얼굴이 빨개진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