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동안 83은 아무 말이 없다. 학생들은 이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멍하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듯한, 이 이상한 거구의 쌤을, 어린 영혼들이 바라보고 있다. 적어도 그렇게까지는 삐뚤어지지 않은 영혼이라고, 믿고 싶다. 약간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길, 그는 마음 속으로 바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야들아, 그런데 니들 이번에 새로 쌤 한분 오신거 알고있나?"
당연히 알고 있을리가 없다. 학생들의 집중력이 수십배 이상 뛰어오른다. 학업에 대해 궁금한 것은 딱히 많지 않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한참 호기심이 많을 청소년들이다.
"어떤 쌤인데요?" / "어떤 분인데요?" / "예뻐요?" / "예쁘다니, 여자쌤이라는 확신이라도 있는거냐?" / "글쎄, 그저 여자쌤이었으면 좋겠다." / "헐, 완전 저질이야. 쟤." / "ㅋㅋㅋ..."
순간 도떼기 시장처럼 소란스러워지는 교실을 바라본다. 그렇지만 이 소란스러움은 통제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자그마한 지방방송들의 전파가 공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쌤도 잘 모르지만, 쌤이랑 같은 과목을 맡고 있다드라. 세훈이 네놈이 바라던 대로 여자쌤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탄성이 터져나온다. 여학생들은 약간 불쾌한 눈빛이지만 그래도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동자를 숨길 수는 없다.
"예쁘냐고? 글쎄올시다. 일단은 억수로 동안인거는 사실이다. 사람도 그렇게 무섭지도 않은 거 같고."
점점 더 교실은 축제 분위기로 접어든다. 테스토스테론이 과다하게 분비됨에 의하여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의 활성도가 높아졌음이 틀림없을,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이 서로 키득거리고있다. 나머지들도 [광장] 이라는 이야기 따위는 별반 관심이 없다.
끙, 이래서는 곤란한데. 시계를 바라본다. 1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원래 마무리를 시켜주고 자습 시간을 주려고 했지만, 이래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어떻게든 공부를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만 한다. 그렇다고 그는 강압적으로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타입은 아니다. 생긴 것으로만 봐선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타입이지만. 이 상황과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연관시킬 수는 없을까?
"근데 이 소설의 이명준이도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으로 마지막을 맞았제."
학생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본다. 자, 이제 무슨 말을 해서 이 가련한 것들을 학업의 길로 잘 구워삶을 것인가. 잠시 생각을 한 뒤, 83은 주절거리기 시작한다.
"혹시 모르나, 이명준이도 저 바다라는 광장에서 새로 오는 쌤 같은 사람이라도 보았을지. 결국 소설이라는 건, 대부분이 사랑 얘기인거라. 이 소설도 결국에는 사랑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거거든. 잘 기억해두그라이. 혼자만의 밀실이나, 자유가 말소된 광장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바다라는 둘 만의 광장을, 이 주인공은 선택했다라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는 걸."
일제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이해가 되었을라나? 흥분과 기대감이라는 감정을, 배우고 있는 소설을 이해시키는 데에 이용한다. 아이디어는 괜찮다.
그렇지만 한 마디가 마음에 남는다. 이명준이도 저 바다라는 광장에서 새로 오는 쌤 같은 사람이라도 보았을지. 이명준이가 바라본 게 아니라, 어쩌면 그가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직까지는 갈매기 한 마리가 그를 쫒고 있다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너무 생각의 비약이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이러한 생각을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런 것을 보고 짝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런 짓은 옛날에 정말 영혼이 부서질 만큼 처절하게 겪어보았다. 처절하게. 그래서 그 이후로 사랑이라는 것이 두려워졌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련이 두려워서 닫아놓은 커튼이 드리워진 밀실은 여전히 기나긴 심해 속을 헤메이고 있다. 혹시 이 사람이 그 커튼을 열어줄까.
그 파, 랑 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교무실로 향하는 그의 걸음이 갑자기 평소보다 빨라졌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