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곗바늘이 저녁 7시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1교시 수업은 D고 B반이다. D고나 K고나 마찬가지지만, 성적이 좋은 A반보다는 성적이 좋지 않은 B반이 훨씬 더 수업이 수업답다. 수업 중에 휴대폰 문자를 하는 놈도 있고, 몰래 소곤소곤 떠드는 놈도 있고, 개그를 치면 웃고, 딴지를 걸고, 갈구면 반항하고. 그래, 이게 고등학생들의 일반적인 쌤에 대한 반응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내가 옛날에 학원을 다닐때만해도 그랬었다고. 그렇지만 A반은 죄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수업을 듣고만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해는 A반 녀석들이 더 잘하고 성적도 A반 녀석들이 당연히 더 좋지만, 83은 왠지 A 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 그라믄 일단 1교시 수업이 있으니꺼 하고 올게요. 한시간 동안 찬찬히 읽어주이소."
"예, 열심히 하세요..."
열심히 하라고? 내가 지금 무슨 인생의 첫 수업을 하러 가는줄 아는가보다. 벌써 이 짓은 이골이 날 만큼 했다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타박을 주기에는 왠지 마음 한 켠이 뜨끔거린다. 그냥 씩, 하고 웃고 프린트 몇 뭉텅이를 팔에 낀 채로 교무실을 나선다.
왠지 뒷통수 한켠이 뜨겁다. 왜 이러지? 이런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마치 무언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그 동안 쌓아놨던 것으로 억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교시는 국어 수업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니까 아직은 언어영역이 아니다. 중간고사 시험범위에는 몇개의 시와, 소설, 비문학 지문들이 포함되어있고, 83 그 자신도 프린트를 보지 않으면 기억이 나지 않는 문법적인 내용들도 여럿 출제된다고 한다. 그 포함된 작품들, 연구 자료에 대한 자세한 주석을 프린트에 인쇄해놓았다. 그 것들을 나눠주고, 그 동안의 수업한 내용들에 덧붙여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한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몇 문제쯤 나온다고 했노?"
"아마 울 학교 쌤이 그런데 한 대 여섯 문제는 나온다고 했을걸요."
"대 여섯 문제라. 그라믄 15점에서 20점은 이 이상한 소설이 다 잡아 먹는다는 얘기겠다, 그쟈."
몇몇은 낄낄거리며 웃는다. 최소한 다른 선생들에 비해서, 83은 상당히 직설적이고 더러운 말들을 잘 구사하였기 때문에, 조금은 수업을 하는 데 있어서 친밀한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자~ 그라믄 이 이상한 소설을 함 봐보자. 쌤이 소설이 문제로 나왔을 때 뭐부터 봐야된다켔노?"
"인물, 사건, 배경이요."
"글체. 어째 대답을 하는 넘이 주성이 야 하나밖에 없노. 쌤이 맨날 랩을 해가면서 주입시킨 건데."
다시 낄낄거리는 소리. 그나마 대답을 한 놈이 하나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머리라도 쓰다듬고 싶다.
"그라믄 어디 보자. 여기서 먼저 인물부터 봐볼까. 여기 주인공이 이명준이라는 잉여가 있는데, 지금 배타고 어디 가고있다 그쟈?"
"어째서 잉여인데요?"
"앞의 줄거리를 쪼금이라도 들어봤으면, 야가 남한에도 북한에도 적응을 몬해가꼬 중립국으로 가고 있는 부적응자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지 않겠나."
절반 이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잠시 후 끄덕거린다. 이 것들이 학교 수업시간에 그냥 잠이나 자고 있었던가보구나. 학원은 학교 수업을 보충하는 곳이다. 그 사실이 파괴된 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지만, 여전히 이런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소설이라는 건 말이제, 뭐라뭐라해도 결국은 이야기 거든. 그런데 시험에 나온다고 한 부분은 그 기나긴 이야기중에 딱 한 토막뿐이란 말이다. 그러니께 그 한 토막을 이해할라믄 대충이라도 이야기 전체에 대해서 어느정도껏 알고 있어야지 않겠나, 그쟈."
소설을 가르칠때면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듯 고개를 끄떡인다.
"방금 전에 한 얘기에서 말했겠지만, 야는 남한에서도 적응을 못하고 북한에서도 적응을 못했다고 했다 그쟈. 그라믄 왜 적응을 몬했을까?"
묵묵부답.
"자, 이제 프린트를 봐바라. 1페이지다. 광장과 밀실 이락고 나와있제? 임마는 남한에는 광장이 없음에 절망했고 북한에선 밀실이 없음에, 그리고 광장이 썩어버렷음에 절망했다는 기라. 사람이 살기 위해서, 이 두 공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 것이 안 되었기에 임마는 이토록 좌절을 한기다."
아무래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글로 설명하는 것이 편하다. 프린트에는 83이 뱉어낸 약간은 두서없는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있었다.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인물이 있기에 사건이 있고, 인간은 배경에 의해 지배를 받는거라고 봤을 때, 이 소설 속의 상황인 남과 북 이라는 두 체제의 차이에 대해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될기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읽었던 소설을 마치 수십 수백번은 읽은 듯이 장황하게 설명하기를 몇 분이나 지났을까. 문득 푸른 광장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바다다. 파아란 바다. 이명준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사랑이라는 광장. 그 곳을 날던 두 마리의 갈매기. 파아란 바다. 파아란, 눈부시도록 파아란.
왜 갑자기 오늘 만난 그 여자가 떠오른 건지는 잘 모르겠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