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라며는 우선 앉아보세요. 그리고 방금 복사하신 프린트 두 장만 꺼내주세요. 저는 잠시 녹차라도 타 올게예."
"아... 아뇨, 녹차도 제가 타올게요. 8선생님은 그냥 여기 앉아계세요..."
황급히 프린트 뭉치를 책상에 올려놓더니 이리저리 뒤적인다. 1 페이지가 100장, 2 페이지가 100장... 이렇게 인쇄를 해놨으니 여러 페이지를 모아서 한 단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 페이지가 다음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클립으로 표시를 해둔다. 적어도 이 허둥거리는 여자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 글체. 이 지랄을 첨 해보는 사람이 그런걸 알리가 없제.'
83은 정신없이 프린트를 뒤지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간다. 저기, 이건 제가 할 테니까 가서 녹차나 좀... 그 순간 여자는 문득 고개를 돌린다. 185cm의 험악한 거구가 바로 앞에 서 있다.
"꺄 ㅡ 앗!"
순간 프린터 더미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진다. 동시에 그 자그마한 여자도 의자 아래로 넘어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부장 쌤을 포함해, 교무실에 있던 두어명의 쌤들이 동시에 이 곳을 바라본다.
"저...저기예, 괘안아예?"
"죄... 죄송해요... 프... 프린트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찾지를 못해서... 죄송해요..."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다친데는 없어보이지만 비정상적으로 얼굴이 빨갛다. 덥석, 하고 그녀의 손을 잡는다. 자그맣다. 그렇지만 따뜻하다. 주걱만하지만 아무 온기가 없는 83의 손에 쥐어진 그 느낌은, 마치 아기 새를 보듬고 있는 그러한 느낌이다. 손을 잡아끌어, 그녀를 일으켜세운다. 검정색 치마에 먼지가 묻었다. 굽이 그렇게 높지 않은,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어디에 떨어졌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자기의 발 바로 아래에 있다.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다. 다시 얼굴이 새빨개진다.
83의 얼굴에 당황했다는 표정과,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씌여진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안경을 고쳐쓴다. 미간을 찡그린다. 이로써 그 표정들을 나타낸다, 라고 적어도 그는 생각하고 있다.
"어이, 8쌤. 처음 온 신참이라고 너무 갈구는거 아냐? 적당히들 하라구."
널브러진 프린트를 주워들고 있는 비쩍마른 사내가 말한다. 영어선생이다. 말이 별로 없는 이 남자는 언제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인상을 준다. 항상 묵묵히 자기가 맡은 바 일을 잘하기 때문에 원장쌤은 이 남자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그 차가운 냉기를, 적어도 83만큼은 분명하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 83처럼 겉으로 차가운 척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두렵고도 기분나쁜 유형이었다.
"아... 아닙니더. 그럴라고 그런게 아닌데... 어짜다보니 제가 놀래킨 꼴이 됬네예.."
"죄... 죄송해요..."
널브러진 프린트를 같이 주워모으고 있는, 여자가 역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말버릇인가보다. 뭐, 죄송할 짓을 하긴 했지만. 그렇지만 전혀 화가 나지는 않는다. 그저 곤란하다는 생각만 든다. 왜 그럴까? 왜 곤란하다는 생각이들까? 지금 이 여자의 부주의함때문에 내가 오해를 받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그렇지만 난 왜 이 여자에게 화가 나지 않을까? 왜 이 여자 잘못이 아니라고 보호해주고 싶은 걸까?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서 잘 모르겠기는 하지만... 이건 뭔가 이상하다.
"허허~ 이 사람들이 왠지 알콩달콩하는구마잉. 자, 여기 녹차 타왔응게 언능 일들 허라고."
부장쌤이 건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녹차를 타왔다. 꾸벅, 하고 고개를 숙인 뒤, 녹차를 받는다. 그리고는 영어쌤이 모아준 프린트의 각을 맞춘다. 휙, 휙. 페이지를 넘기며 제본할 수 있도록 프린트를 분류한다. 종이에 씌여진 것들을 관리하는 일은 83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 험악한 생김새와는 달리, 텍스트에 함몰되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일까.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새로운 프린트 뭉치들을 턱, 하고 쌓는다. 스테이플러로 찝기만 하면 이제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정리가 되었다.
"자, 파 쌤. 이제 요것들 찝어야하니까예, 한 요만큼만 쌤이 좀 도와주시겠는교."
끄떡, 하고 수줍은 듯이 고개를 움직인다. 적당한 뭉치를 건네준다. 스테이플러를 건네준다. 열 장씩, 조심조심 종이들을 모아서 그 끝을 찝는다. 허둥거릴때는 몰랐는데 나름대로 섬세한 면도 있다. 하지만 나는 섬세한 면이 없다. 마치 기계처럼 팍, 팍. 스테이플러를 찝는다.
다시 5분이 지났다. 삐뚤삐뚤하게 제본이 된 프린트들과, 반듯하게 제본이 된 프린트들이 쌓여있다. 83은 후, 하고 한숨을 내쉰다.
"생각해보니꺼 우선 이 짓부터 해놓고 난 담에 일을 했어야 했지 말입니더."
"그... 그런가요?"
무심코 내뱉은 말에 얼떨떨하게 반응하는 자그마한 여자. 83은 순간 아차, 싶은 듯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녹차를 쭉, 하고 들이킨다. 식었다. 씁쓸한 맛이 끝까지 배어나왔다. 그렇지만 왠지 방금전부터 이유도 없이 목이 마르다. 아니, 목이 타들어간다. 벌컥벌컥, 술 마시듯이 녹차를 들이킨다. 마치 이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려고하는 것처럼.
문득 바라보니 여자도 녹차를 마시고 있다. 차분한 자세로, 두 눈을 지긋이 감고. 다 식어빠진 인스턴트 녹차를 마치 다도茶道를 행하듯 마신다. 따뜻한 얼굴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왠지 파아란 빛처럼.
컵을 내려놓는다. 눈을 지긋이 뜬다. 커다란 눈망울이 깜빡거린다. 문득 앞을 바라본다. 한 남자가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 있다. 순간 여자의 동공이 커진다. 남자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닫는다. 시선을 딴 데로 돌려버린다. 여자는,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눈가와 입가 주위로 천사의 그것처럼 따스한 미소를 짓는다. 남자는 그 미소를 바라본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가 짓는 미소와 비슷한 미소를 짓는다. 남자의 가슴한 켠에 왠지 모를 햇살 한 줄기가 비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