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이 세상은 내게 강요한다. 아니면 이해하든지 말든지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거나. 그렇지만 보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내가 이미 전부 이해하고 있었지만 받아들이려고하지 않았던 일들이 그런 일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83은 주섬주섬 옷을 입으면서, 그러한 생각을 해본다. 생각을 통해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므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따지고 보면 생각만큼 무용한 것도 없다. 생각이 효용이 있으려면 그 생각의 결과가 행동으로 반영이 되어야만 한다. 혹은 다른 생각의 모태가 될 수 있어야한다. 생각 그 자체로 고립되어버린 생각, 어쨌든 멀리 돌아가는 길이라고는 해도 인간 세계의 범주로 그 결론이 튀어나올 수 없는 생각은 생각할 가치가 없다. 그렇지만 83의 머릿속에서 맴도는 수많은 생각들은 대부분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복잡한 사유의 체계가 잠식한 두뇌 속에는 다른 실용적인, 일상적인 생각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생각의 무용함을 입증할 만한 또 다른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은 이런 생각 그 자체도 생각할 가치가 없다. 생각이 생각을 잡아먹는다. 생각해봤자 의미가 없다. 생각하지 말자.
저녁 노을이 지고 있다. 차가운 붉은 빛이 점점이 검게 저무는 하늘에 맴돈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다. 삐죽삐죽 솟은 건물들 사이에서 춤을 추는 것 같다. 어지러이 흔들리는 저 아련한 것들은 무슨 의미를 가지기에 사람의 시선을 고정시키는가. 생각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지? 감정? 감정은 생각의 영역에서 다룰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조그마한 창문 너머로 흔들리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노을이 예쁘군. 조금은 서글프면서도. 왜 이런 생각을 하는거지? 그 근거는 뭐지? 또 다시 생각의 영역이 쓸데없이 고개를 내민다. 의미가 없다.
방의 불을 끈다. 창문으로 투사된 붉은 빛이, 방 전체에 드리운 깊은 심해 속으로 빨려들어온다. 흔들흔들, 짙은 어둠 속으로 몇 줄기의 그림자가 춤을 춘다. 마치 뭐가 번져가는 것 같다. 깊은 어둠 속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파고들어 흔들어대는 것 같다. 이 조그마한 창문에 커튼을 드리워버린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커튼을 드리우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어둠 속을 춤 추는 것이리라. 물론 그 그림자가 왜 춤을 추는지, 그것을 보면 왜 아름답거나 슬프다는 생각이 드는지는, 몇가지의 과학적 원리로 설명할 수야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그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할 수는 없다.
지금 내 마음 속의 방은, 내 마음 속의 파아란 방은 창문에 커튼을 드리워놓은 것인가. 그 자그마한 창문은 햇빛이 들어온 적이 없는 건가. 아직 내 마음 속에는 노을빛이 저물지 않은 것인가. 노을빛은 그렇다고 쳐도, 최소한 아침조차 찾아오지 않은 것인가. 내 마음이라는 밀실에는? 아니면 밀실인가, 광장인가? 이 자그마한 파아란 방은 밀실인가? 광장인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의문에 해답을 구할 수 없다. 생각만 해서는 그 어느 것도 이룰 수가 없다.
83은 낡은 문을 닫고 거리로 나선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