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은혜와 그 딸의 환생? 그 것을 보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이건가...? 그렇다면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안식처로 삼았다는 건가. 또 사랑 얘기야. 그토록 손에 잡히지 않는 뜬구름같은 게 어디있다고. 명준은 은혜와 뒹굴었던 그 자그마한 동굴을 자신에게 남은, 손바닥만한 마지막 광장이라고 불렀다. 밀실이 아니라 광장이라고 했다. 둘이 있으니 밀실이 아니라 이건가. 그 자그마한 광장에서 그는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걸까.
감정이 메말라버렸다는 평가를 듣는 83에게는 다소간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마 첫사랑이라는 것을 하지 못했다면 감정이라는 단어 자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첫사랑이 그렇게 비참한 실패로 끝난 것도, 지금처럼 상황이 나빠져버린 것도 감정이란 것에 대해서 그가 너무나도 서툴렀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못한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조언도 듣지 않는다. 이는 감정 영역의 일에도 적용이 되어서, 내 일이 아니면, 내 감정이 아니면 남이 죽어나가든 무엇을 하든 아무런 동요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요전에 군대에 있을 때 다른 중대의 사람 하나가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적이 있었다. 부대 내에서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높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엄숙한 조총이 발사되었다. 도열해 있는 부대원들 중 상당수가 훌쩍거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었다. 그러나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한 사람만큼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창고 한 구석에 도망쳐서 꾸벅구벅 졸고 있었다. 니미, 일요일에 사람을 불러모아서 뭐하자는 짓거리야. 주5일제 군대라는 말은 또 개소리였냐. 그리고 내가 왜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때문에 이 지랄을 해야 하는거야. 그러면서 몰래 도망쳐 나와서 졸고 있었다.
그러다 깜빡 잠들어버린 순간,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이후부터 한 일주일 정도까지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결국 영창까지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죄명은 명령불복종이었다.
헤헤, 그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삐딱했던 시절이었지. 나는 쪼으면 쪼을수록 더 거칠게 반항하는 쓰레기의 근성을 지니고 있었다. 대신 누가 쪼지만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해코지하지 않는데. 꼭 나에게 덤벼드는 것들 때문에 문제다. 83은 그런 되먹지 않은 자만을 곱씹으며 책을 덮었다. 참견하지마. 내 일이야. 그 말을 모토로 삼은 채 이 기나긴 세월을 외고집 하나로 버텨왔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다.
왜 나는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거지? 그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낮게 중얼거려본다. 니미, 생각해본들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이 발달하지 못했는데.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영역에서만 그의 지능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바라볼까? 남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우선 여친이 있는 녀석이나 없는 녀석이나 다들 결혼을 생각하고 있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 중 하나로 삼고 있는데에 아무런 의심을 품고 있지 않고 있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결국 나를 제외한 그 어느 인간이 나의 사적인 영역에 침범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도전이다. 쓸데없는 고집인가. 종족 번식의 측면에서 보자하면 사창가의 하룻밤이면 수컷의 역할은 충분하지 않을까. 인간이라면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을테니까.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라는 측면은, 83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좋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거야. 그는 또 이러한 측면에서는 자기를 비하해버리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 물질적인 성공에 목이 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그러한 것을 위해서 살려고 한다. 아니면 자기가 매우 좋아하는 특정한 취미가 있어서, 그것에 몰입한 채로 살려고 하는 사람. 그것도 아니라면, 나처럼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를 몰라서 하루하루가 불만이지만, 그렇다고 죽어버리기에는 뭔가가 무서운 사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어제 만나 친구들은? 물질적인 성공에 목이 맨 녀석들은 아니다. 특정한 취미? 음악? 그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힘없는 눈초리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는 것이 느껴졌다. 뭐... 나에게로 치면 프로야구나 그런 것과 같은 건가? 그런데 그 것은 그저 재미있어서 보는 건데. 그것을 위해서 이 모든 인생을 바칠 수 있을만큼, 그러한 각오는 서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족? 사랑? 굳이 가족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있는 사슴이나, 여자친구를 찾아다니고 있는 돼지나 마찬가지였다. 저 피둥피둥한 돼지 녀석도 벌써 여자친구를 두 번이나 갈아탄 경력이 있다. 나는 한번하고 끝이냐. 쳇, 하고 그는 중얼거린다. 그 것을 위해서, 그 풀 죽은 녀석이나 말 많은 녀석이나 자신의 가장 내면의 깊은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사는 건가? 83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