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아, 그거는... 깨놓고 말해가꼬... 그 누가 그런 물음에 대해서... 긍정적인 답을 할 수가 있겠노. 내도 그렇고, 돼지도 그렇고, 니도 그렇고... 우리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내 생각엔 말이제. 니가 와 그런 말을 하냐며는 니가 바라는 게 다른 사람들하고 달라가꼬 그런거 같다...."
사슴이 우물거리는 말투로, 비틀거리는 83에게 말한다. 결국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아니구나. 83의 표정은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저기 밤 하늘의 어두움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색이 있다면, 지금 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어느 술집 구석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 정도일 것이다.
"그래, 내 생각도 그렇다이가.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있제, 적어도 니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없다. 니 친구 중에 그렇게 성공한 놈도 없고, 그렇게 착한 사람도 없다. 니가 묻는 말에 대해가꼬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생각에 아마 없을기야. 다들 니가 묻는 거에 대한 답을 찾아볼라꼬, 쪼매씩 가다보며는 머 글로 갈 수 있겠제 하면서, 우리처럼 밤 되면 술이나 처 빨아가꼬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가는기다. 어디 한번 생각을 해봐라. 니 머리 좋잖아? 83아. 니 다른건 몰라도 머리 하나만큼은 좋잖아?"
머리가 좋다고? 뭐 좋다고 말했을때 나쁘다고 말하는 건 그리 좋은 건 아니지. 그렇지만, 이 특성 하나때문에 그 좋은 머리가 죄다 묻혀버린다는 것에는 공감할걸. 나는 남의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있다는 걸, 말야. 자신의 생각 외의 관점에서, 무엇을 바라보는 능력이 아예 결핍되어 있다는 것 말야.
"......"
83은 말이 없다. 어느덧 지하철 역이 보인다. 여전히 사람들은 바글거리고 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왠지 말이 없다.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에게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짙어서이다. 그 그림자는, 어느덧 라디오헤드의 신곡을 논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서글픔으로 흔들리고 있다.
분명히 울 것 같은 표정이다. 하지만 83은 울지 않는다. 83의 친구들은 그가 우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약한 소리를 하는 것 조차도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들은 죄다 83이란 사람의 가면이라는 걸. 그리고 그는 가면과 그 속의 연약한 알맹이가 괴상하게 붙어 있는, 불쌍한 피조물 중 하나라는 것을.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꼬?"
83은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 문득 중얼거린다. 중얼거린다고 해도 83의 목소리는 낮은데다가 힘이 있다.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거의 사슴이 말하는 목소리의 크기에 필적하는 성량을 내었다.
"내가... 머리가 좋다꼬? 웃기고 앉아있구마. 정작, 이렇게 중요한 질문에 대해가꼬 대답을 몬하는데 뭐가 머리가 좋은기고?"
경상도 사투리는 얼핏 들으면 꼭 격앙된 기분으로 이야기하는것 처럼 들린다. 그 특유의 억양 때문이다. 경상도 사투리의 그 깊은 억양을 한껏 구사하는 83의 크나큰 목소리는, 주위 사람들이 마치 싸움이라도 난 것마냥 자신을 쳐다보게 하는 재주를 지녔다. 그 옆의 두 사람은 짐짓 그런 상황을 눈치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흐흐흐흐흐흐흐...."
갑자기 그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웃기 시작한다. 지하철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가면서. 다분히 연극적인 액션. 그 뒤를 마치 모르는 사람인듯 따라가는 두 사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왠지 오늘은 연극이 좀 슬프다. 이렇게 슬픈 모습을 연기하는 83의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지하철 역을 내려가는 두 명의 친구들의 얼굴에도 어느덧 그의 그림자가 조금씩 드리워지고 있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