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은 후, 하고 한숨을 쉬면서 벽에 뒷통수를 쿵 쿵 들이받는다. 순간 이 상황이 웃긴 듯 피식, 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다시 맥줏잔을 집어든 채 술인지 음료인지 모를 액체를 홀짝댄다.
돼지는 이런 83의 행동에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다. 10년을 같이 친구로 지냈으니 서로가 서로의 어지간한 습관 정도는 죄다 꿰고 있다. 특히 이 둘은 다른 사람을 분석하는 데에 소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 이 새끼가 또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구나. 돼지는 이 정도로 해석을 끝낸 뒤, 다시 의미 없는 말을 쏘아붙이기 시작한다. 이 정도로 해석을 하고 넘어가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는 사실을, 돼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83도 이 폭포수같은 말들을 적당히 받아넘기며 홀짝홀짝 술을 마신다. 이 자식이 또 내 말을 그려러니하고 흘려넘겨버렸구나. 83도 이 정도로 상황에 대한 해석을 끝낸다.
"마, 그렇다고 갉아먹히고만 있을기가. 뚫고 나와야제."
응? 그는 갑자기 깜짝 놀란 듯 자세를 고쳐 앉는다. 이 녀석이 무서운 이유는 그 수많은 말들 중에서 몇개는 아주 정확하고 핵심을 짚는 말들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뚫고 나온다라. 뚫고? 나에게 그럴 능력이 있나? 애시당초 그럴 시도라도 했었나? 뚫고 나온다? 어떻게?
"머... 그그야 말처럼 됐으믄 진작에 했제..."
"야 이 갑갑한 아저씨야, 해보지도 않고 안한다는 거는 무슨 심뽄데?"
용기가 없는 비겁한 인간. 혹은 상식이 없는 무모한 인간. 83의 삶은 늘 그 두 가지 중 하나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중간이라는 것이 없었다. 전부냐, 무냐. 그가 자주 내뱉던 말이었다. 그런 극단적 인생관의 결과가 지금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그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글타믄... 내가 우얬으면 좋겠노?"
"그걸 내한테 물으면 쓰나... 니는 지금까지 늘 니 혼자 결정했다아이가. 내가 뭐 누구한테 머라머라 조언할 수 있는 처지의 사람도 아니고. 내 하나 먹고 살기에도 바빠 죽것는데."
늘 나 혼자 결정했다? 그는 남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췌 자신만의 논리와 세계에 함몰되어있을 뿐이어서, 꽤 넓은 인맥과 사회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의 내면과 제대로 된 교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그 사실을 짚고 넘어갈 수 있는 인간 중 하나가 이 서글서글하게 지방이 오른 녀석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렇다고 생각한 것도 순전히 나 혼자 내린 결정이잖아. 그럼 나 말고 누가 나에 대해서 결정해준단 말인가. 하느님? 악마? 운명? 그랬으면 최소한 가이드라인이라도 제시해주고 나를 천국이든 지옥이든 떼밀어주지.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채 떠밀려 다니는 건 괴롭단말야.
"그건 그렇고... 썅, 사슴 금마가 올때가 됐는데..."
"또 지 여친이랑 콩닥대고 있지 않겠나. 어...? 금마한테 문자 왔었네?"
5분쯤 뒤면 도착한단다. 그런데 문자가 도착한지 이제 10분이 넘었는데? 이런 제기랄. 난 시간 약속 안 지키는 인간을 경멸하는데. 마침 그 순간 호프집의 문이 열렸다.
"어~ 83이~ 돼지~ 미안... 내 쫌 늦었제?"
피둥피둥한 돼지나 험악한 83과는 달리, 이 사슴이라는 녀석은 비쩍 마른 몸에 갸냘픈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래로 처진 커다란 눈과, 발그레한 코 때문에 사슴이라고 불리워지는 이 녀석은, 나긋나긋하고 느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산만한 돼지나 괴상한 83과는 달리 그는 왠지 온화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됐고 인간아, 고마 앉아라. 여친이랑은 잘 놀다 왔나?"
"어..."
"왠지 쪼까 늦은 것도 그 것과 연관된 그 같은데..."
"응? 아니다~ 그 가다보니까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됐다, 83 이 자슥아 ㅋ 왔으면 되는기제, 멀 그라 사람을 갈구는데 ㅋㅋ"
"아니, 아니. 그란거 아니다. 그나저나 83아, 요즘 머 어째 지내는데?"
어찌 지내냐고 물으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지내고 있다고밖에 대답할 수가 없다. 의미라는 단어는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으니까.
"에효, 늘 그렇제, 뭐. 간신히 모가지에 쌀알이나 털어놓고 앉아있는기제. 니는?"
"내도 뭐... 그라믄 아직 시험이나 학원 같은 데는 달라진건 없나?"
사슴 이 녀석은 친구가 그렇게 많진 않다. 그렇지만 "말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사회에서 그는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그와 친해지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사슴은 야생 사슴의 그것처럼, 왠지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처음에 83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슴에 대해서 편안함을 느꼈으나, 곧이어 그 이야기가 왠지 겉돈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있게 되었다. 아마 이 의뭉스러운듯한,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7년된 여자친구 뿐일 것이다.
"달라진다 케도... 머 별로 의미도 없다. 이 상황이 근본적으로 개선될 그 같지도 않고..."
"안그라믄 83, 니도 정 안되믄 일찌감치 맘 잡고 학원에 말뚝 박아라. 니 정도 실력이면 잘 될거 같은데."
느릿한 말투로 듣는 사람의 내면을 찌르는 사슴의 충고와는 달리, 돼지의 충고는 속사포처럼 듣는 사람의 표면을 직접,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내다지른다. 그렇지만 말을 빙빙 돌리는 것과, 은유적인 괴상망측한 표현을 통해 핵심을 부숴버리는 데에는 83의 그 굵직하고도 퉁명스러운 말이 제격이었다.
"뭐... 그도 그렇겠제. 그런데... 니들은 지금 니들 삶에 어느정도 만족하고 사노?"
네 개의 커다란 눈동자가 두 개의 찢어진, 그러나 이상한 광채를 발하는 눈동자를 바라본다.
"예를 들어가꼬, 지금 니가 내일 아침에 눈떠가 내일 밤에 눈감을 때까지, 바라보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들에 대해가꼬, 니가 얼마나 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 자슥들아."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