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그 익숙한 치맥 호프 앞에서 그는 내부를 들여다본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돼지도 사슴도 아직 오지 않았다. 다들 조그마한 기업에서 서류가방을 들고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별로 출세나, 돈에 욕심이 많지 않은 인간들인데도 살아남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서 발악을 한다. 그러면 나는? 아무 애도 쓰지 않고 아무 발악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돈에 대한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 이게 83의 빈대 근성에 대한 궁색한 자기변명이었다. 그러나 실은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부터 나는 빌붙어먹는데에 도가 트지 않았던가. 역시 나는 돈을 만지는 데는 영 서툰가보다.
돼지 녀석에게 전화를 해본다. 너무나도 익숙한 패턴이다. 30분만 있으면 갈 테니 조금 기다려달란다. 그래, 얼마든지 기다려줄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약간 냉소적인 뉘앙스가 풍겨졌을지도 모르지만 딱딱 끊기는 사투리의 억양이 이를 덮어줬을것이다. 그럼 30분동안 무엇을 한다? 83은 구불구불한 머리를 긁적거린다. 휙 하고, 사방을 둘러본다. 이 근처 오락실이 어데였더라. 이 골목은 한창 때 공연을 한다고 돌아다니던 지하의 음습한 클럽들이 있는 골목이 아니라서 어디가 어디인지 확실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유흥가 쪽으로 나가본다.
신나게 무언가를 두드리면 죄다 잊어지려나? 고무 패드를 두드리고 있는 스틱에서 울려퍼지는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온 몸으로 스치운다. 그것도 금방 질려버린다. 미친듯이 애절한 노래를 부르면 죄다 잊어지려나? 대략 두 옥타브 정도를 낮춘 채 슬픈 노래를 부른다. 가뜩이나 낮은 목소리가 노래를 부를 때면 아주 심연 깊은 곳까지 음정이 추락해버린다. 대신에 가슴에서 울려퍼지는 그 슬픈 느낌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가 있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악을 써도 후렴 부분에서 만족스러운 느낌을 받지 못한다. 왜 이렇게 뱉어낼 수가 없는 걸까, 왜 이렇게 죄다 토해버릴 수가 없는 걸까. 이렇게 메스꺼운데, 이렇게 갑갑한데, 왜...?
83은 힘없이 마이크를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30분이 다 되어간다. 슬슬 가볼까. 오락실 문을 나서자 마침 익숙한 얼굴이 지나간다. 돼지 녀석이다. 다짜고짜 그 푸짐한 뒷모습을 불러세웠다.
"뭔데? ㅋ 니 여기 있었나?"
"그라믄 30분동안 손가락 빨고 기다리라꼬?"
"먼저 들가서 머 하나 시켜먹고 있지 그랬노."
"자슥아, 그랄 돈이 내한테 있을기라 생각했나. 잉여剩餘에게 사치란 말은 읎다."
"새끼 ㅋ 됐다, 마 일단 들가가꼬 얘기하자."
지금쯤 그 속사 기관포에 탄창을 끼워넣고 있을 것이다. 육중한 몸집과 대조적으로 그 녀석은 서글서글한 눈에 방정맞은 입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덩치값을 못하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모두 그 녀석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내면 아주 깊은 곳에서 왠지 사람들 주변을 겉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요~ 맥주 3000cc 랑 후라이드 반 양념 반 주세요~"
돼지 녀석이 능글맞은 표준어로 주문을 시켰다. 예전부터 적응력 하나만큼은 어딜 내놔도 자신있다고 말하던 인간이라서 그런지, 그는 적어도 겉보기로는 영락없는 서울 토박이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경상도의 강한 억양을 구사하는 83의 보조에 맞춰 그에 걸맞은 억양으로 이야기할 줄도 알았다.
"어이 83~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데?"
"인간아. 뭘 그동안이야. 저번주에도 만났으면서."
"아 맞다 그랬었제ㅋㅋ 그래 요즘 학원 일은 잘 되가나?"
"잘 되고 말고를 떠나가꼬, 다 산 입에 거미줄 치기 시러가꼬 하는 짓이다."
"임용고시 준비는?"
"준비할 게 머 있겐노. 이미 머릿속엔 다 들어가 있는데."
"하이고~ 또 나오셨네요, 잘나신 83형. ㅋ"
"잘나긴, 개뿔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원래 머릿속엔 다~ 들어가이써도 안 되는게 이 시험이다 안카나."
"그라믄 아예 학원가에 뿌리를 박아삐지 그라노."
"뭐, 이 지랄도 한 2,3년만 더 해보고 안 되면 확 때리치아뿌고 부산으로 내리가야제."
"부산? 캬~ 부산 그립네. 안 내려가본지 꽤 됐는데."
"몬해도 부산이라카믄 입에 풀칠 쯤은 할 만큼은 강사비가 나오겠제."
"뭐... 그렇지 않겠나?"
"니가 언능 결혼을 해야 느그 자식을 내가 가르칠낀데."
"그런 부정적인 경우는 생각하지 말자 ㅋㅋ"
벌컥벌컥, 돼지는 맥주를 들이킨다. 83은 조그마한 컵에 웰치스 주스와 맥주를 휘휘 섞고 있다. 이래야 최소한 따라마시는 시늉이라도 할 수가 있다. 그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사회 생활에 있어서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남들은 술을 마시면 알코올을 간에서 받아내는데, 83의 간은 그 노동을 거부했는가보다. 단 한잔을 마셔도 취기가 꼭지까지 치솟아올라 헤롱거리다가 쓰러져버린다. 생긴거만 보면 꼭 고량주를 댓병으로 빨 것만 같은 녀석이 이런 추태를 보이니, 대학 새내기 시절엔 여러 오해도 샀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준비한 것이 음료수였다. 이렇게 양을 부풀려서야 간신히 남들이 건배를 외칠때 그에 따라 건뱃잔을 부딛칠 수가 있었다.
"근데 83, 니 요즘들어가꼬 많이 늙은 것 같다."
"이 자슥이 또 한대 맞을라고 함부로 혓바닥을 놀리나."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하는 말이다."
"어델 봐가꼬?"
"내도 원래는 니가 하도 삭아서 더 이상 삭을 데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니 아닌거같다."
일단 툭, 하고 한대 돼지의 이두박근을 쥐어박은 뒤, 옆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뿔테 안경, 쭉 째진 눈, 좁은 이마, 각진 광대뼈, 면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무튀튀한 턱, 그리고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릿결. 객관적으로 절대 호감을 줄 수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외관상의 뚜렷한 차이는 없었지만, 83 스스로가 보기에도 왠지 예전보다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어이... 돼지."
"... 와?"
"이거는 말이제, 늙은 게 아니고... 갉아먹힌 거다."
"갉아먹힌 거?"
"그래... 이 잉여剩餘 라 카는, 생활生活 이라 카는, 무의미한 것들한테 죄다 갉아먹히쁜기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