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와도 같은 거리를, 83은 실론티 한 짝을 홀짝대며 터벅터벅 걸어간다. 차茶 에 대한 그의 갈망은 거의 병적인 수준이었다. 어쩌면 술도, 담배도 내켜하지 않는 그의 몸이 진통제 성분과 함께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카페인의 중독성이 그의 얇은 지갑에서 몇백원을 끊임없이 빼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몇백원짜리 합성착향제가 뿜어내는 은은한 맛을 아무렇지도 않게 홀짝거리면서, 그는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곳곳에 웅덩이가 고여있다. 아마 그 웅덩이에는 어떠한 생명체를 떨어뜨려놓는다고 해도 조만간 목숨을 잃으리라. 그 어떠한 생물도 이곳의 더러운 공기를 한껏 머금은 그 죽음의 샘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추측은 아마도 틀렸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당연해보이는 이론은, 한여름이면 이 곳에 범람하는 모기떼의 공습에 대해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기장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는 모기의 앵앵거리는 소리 그 자체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샷시는 갈아치우지 못해도 방충망만큼은 항상 꼼꼼하게 체크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 방충망은 절대로 열린 적이 없었다.
덜컹, 덜컹 거리는 소리는 귀에 꽂힌 MP3의 울림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운좋게 타자마자 앉을 수 있었던 자리 양 옆의 사람들의 뒤치닥거리는 촉감은 왠지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럴때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귀에 울려퍼지는 어느 슬픈 밴드의 멜로디에 주의를 집중해야만 한다.
이럴때면 그는 어릴적에 시장에서 보아왔던 닭집의 목 달린 닭이 떠오르곤 했다. 일반적인 통닭에서 모가지와 발을 잘라내지 않은 그 모습. 아마 어느 늙은 닭집 주인이 무심코 사람들에게 보이는 곳에 내어다 놓은 것이리라. 하지만 어린 시절에 그 비참하게 뒤틀린 닭의 표정을 보며 느꼈던 충격은 아직까지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시장을 지나가던 그가 할 수 있던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애써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에도 역시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익명의 다수 사이에 끼여서 덜컹거리고 있는 자신의 의미를 잊어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틈과, 슬픈 노랫자락 속으로 갈아타는 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들린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곧이어 웅성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 뒤를 따른다고? 실은 이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일게다. 아니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에게 등떠밀려왔거나. 왠지 이 수많은 사람들의, 약 0.5초 정도 마주칠 수 있을 시선에서 그런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음걸이를 반사적으로 내딛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몇몇의 사람들은, 역시 기운이 없어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왠지 꿋꿋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왜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83으로서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의 지하철 2호선은 속칭 "지옥철" 이라고 불리운다. 일찍이 서울에 먼저 갔었던 "사슴" 녀석이 예의 그 느릿하고 고요한 목소리로 내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약간의 세월이 지난 후, 그는 온몸으로 그 사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 곳은 어쩌면 지옥地獄을 가장 인상적으로 인간세계에 묘사해놓은 곳이 아닐까, 하고. 왜냐하면 인간에게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시작된 것이 5천년 정도가 지났고, 아마 그 정도 시간이면 대략 50억명은 넘는 사람들이 다 합쳐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죄다 지옥으로 떨어졌다면 아마 지옥은 지금 빈 자리가 별로 없을 것이다. 지옥의 간수들은 꽤나 걱정이 많을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 있는 60억명의 인간들은 거의 전부가 지옥 중에서도 생지옥에 떨어뜨려야 할 죄를 짓고있는데, 생지옥에 대한 대대적인 확장공사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성경책을 보아하니 천국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마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어린 젖먹이들이라면 천국으로 갈 수 있을거야. 문명 사회에서 지옥에 떨어질만한 죄를 짓지 않고 평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길거리에서 오물을 뒤집어쓴 채 헤헤거리며 웃고 있을 미친 병신들 뿐일거다. 아마 그런 사람들이 지금쯤 천국 어딘가의 길거리에서 헤헤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튼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으므로 이대로라면 지옥행 급행열차 티켓은 안전하게 예약할 수 있겠다. 이런 콩나물 시루 속에서 그 아수라장을 체험이나 해보자, 라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역시나 자동적인 스킨십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런 지옥 속에서 83은 형언할 수 없는 갑갑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지옥에 갈 준비가 안되었나보다. 쳇, 이럴 거면 내가 갈 지옥은 독방으로 해 주었으면 안될까. 염라대왕님께 특별 탄원서라도 올려볼까. 하지만 그게 되었을 거라면 진작에 이러고 살지도 않았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서 혀 깨물고 말지.
그가 홍대를 거닐 때마다 느낄 수 있었던 슬픔은, 지하철 안이나 밖이나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지하철 출구는 말그대로 지하철 안보다 더 북적거렸다. 출구 앞의 유흥가에는 잘빠진 몸매의 아가씨들과 잘빠진 몸매의 젊은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젊음을 내다버리고 있었다. 도대체 루저Loser 와 위너Winner 의 차이점이 뭐라는 말이냐. 170cm 대의 초절정 인기남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180cm가 넘는 루저들이 무더기로 양산되고 있다. 그 180cm 이상인 루저 중의 한 명인 83은 예의 그 무시무시한 뒷모습을 하고 터벅터벅 인적이 드문 골목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