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두터운 눈두덩을 억지로 열어제낀 후, 흐릿한 시선으로 바라본 시계는 저녁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것은, 흐릿한 회색빛 하늘이 새카만 어둠에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학원 아르바이트가 없다. 일주일에 세번 있는 아르바이트에서 무미건조한 대입용 기술을, 짐짓 격정적인 톤으로 나불거리는 것이 그가 생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자금을 벌어들이는 방법이었다. 내가 학교나 학원에서 수업을 받았을 때 저렇게 무관심하게 칠판 앞의 사람을 바라보았을까. 83은 일을 하는 날이면 하루에도 수십번씩 그런 생각을 하곤했다. 그렇지만 칠판 앞의 사람들은 그런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나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어쨌든 오늘만큼은 그런 귀찮은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신경질적으로 침대 옆에 나뒹구는 수험서를 집어든다. 이래뵈도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는 하지만 어엿한 수험생이다. 물론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어느정도 알고 있다. 아마 안될거야, 어쩔 수 없지 뭐. 그렇지만 인생이 '어쩔 수 없지 뭐' 라는 말로 모두 해석이 가능한 거란 말인가?
몇 번은 봐왔을 수험서의 형광펜이 덕지덕지 칠해진 문장을 읽어본다. 수업 연구의 설계 과정에 대해서... 이런 니미럴. 너는 떠들어라, 나는 씹겠다.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래 너는 씹어라, 나는 떠들겠다. 라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무슨 빌어먹을 수업이라는 거야. 어쩌자고 내가 이렇게 썩은 바닥에 덤벼들겠다고 이 나이를 먹도록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더러 뭐 어쩌라는 거야,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단 말야. 그것들은 이미 내 손아귀를 벗어난 일이란 말야.
그렇지만... 아마도 현재와 미래도 내 손아귀를 벗어난 듯 꿈틀꿈틀 시간의 바다를 향해 도망쳐버리고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그런 절실한 깨달음은 강렬하지만 그것도 잠시만이다. 83은 곧 그 모든 복잡한 문제를 잊어버리고 지금 당장의 일들에 몰두해버리는 것이다. 글쎄, 아마 그러지 않으면 미쳐버릴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일까.
전화벨이 울린다. "돼지" 녀석이다. 또 술이라도 마시자는 거겠지. 문득 귀찮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그렇지만, 거의 동물적인 본능적 반사신경으로 83은 핸드폰을 집어들고 있다.
"여보세요."
"여~ 83. 내다. 머하는데?"
"잉여剩餘 가 머 하믄 머 하겠노. 그냥 잉여치고 앉아있제."
"어이구~ 불쌍한 새끼. 마, 고건 됐고 오늘 니 나올 수 있나?"
"어데로?"
"어데긴 어데겠노. 늘 가던 거기제."
"머... 알겠다. 근데 '사슴'은?"
"금마는 지 여친이랑 놀다가 늦게 온다든데?"
"썩을... 알겠다. 시간 맞춰 나온나."
"응~ 알겠다잉 ㅋ"
딸깍. 시간 맞춰 나오라는 말은 괜히 한 듯하다. 돼지 녀석은 나랑 알고 지낸지 10년동안 단 한번도 시간을 제 때 맞춰 약속장소에 나온 적이 없다. 어쩌면 지난 10년동안 단 한번도 약속 시간을 맞춘 사람은 83 그 자신 뿐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약속 시간에 대한 거의 병적인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 홍대까지 가려면 대략 지하철로 40분 정도 걸린다. 그것도 두번이나 지하철을 갈아타야만 한다.
한번만 갈아타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신도림역의 지옥 속을 통과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83은 서울에 올라온지 꽤 오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촌놈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굵직한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투리는 그렇다고 쳐도, 그는 사람이 득시글거리는 곳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제각기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다른 점을 나타내지 않고 웅성거리는 공간. 그저 고깃덩어리 하나로 밖엔 계량되지 못할 존재로써 걸어다닐 수 밖에 없는 공간. 83은 그런 공간을 싫어했다. 이 곳에서 살아가려면 그런 곳을 수도 없이 통과해야만 했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싫어하는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집어든다. 죄다 새카맣거나 검은 색 계열의 옷이다. 한 때 낡은 클럽에서 중얼거릴 때 입던 너덜한 바지를 입어볼까, 하다가 역시 그만둔다. 지금은 그때처럼 무언가를 신나게 중얼거릴 수 있는 기분이 아니다. 방 한켠의 옷장은 마치 밤하늘 처럼 어두운 색깔의 옷으로만 도배가 되어있다. 아무리 겨울이 다가오려고 하는 시점이어도 그렇지, 83은 문득 그 짙은 그림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하지만 지금 입고 있는 목티는 무려 15년이 지난 옷이다. 그는 옷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옷장에 널브러진 옷들을 대강 정리한 다음, 크게 기지개를 하고 약봉지를 챙긴다. 낡은 대문 앞에서, 그보다 더 낡아빠진 신발을 주섬주섬 신는다. 덜컹, 하고 열린 다음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짝 안의 파아란 방에는, 이미 새카맣게 내려앉은 어둠이 발하는 미묘한 빛과 뒤섞여 마치 심해深海와 같은 깊이의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