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에는 언제쯤 비가 내릴지 모를만큼 짙은 먹구름이 하늘과 그 아래 세상을 뒤덮고 있다. 그렇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차라리 모든 것을 그 차가운 눈물 속에 다 씻겨가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만 이 세상이란 "차라리"라는 말조차도 쉽사리 이뤄지지가 않는 법이다.
83은 멍하니 침대에 누운 채로 매연에서 묻어나왔을 듯한 새카만 분진들이 가득 묻어있는 창문틀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저렇게 새카만 분진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걸 보면 역시 서울하늘의 공기는 못쓰겠나보다. 그렇지만 이 방 속의 산소를 너무 많이 써버린 탓으로, 조금씩 머리가 아파져오기 시작한다. 긴 팔을 쭉 뻗어 창문을 연다. 덜컹, 하고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가 난다. 아 썅. 자세를 고쳐잡고 창문을 약간 들어올린 채로, 그대로 쭉 밀어버린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비명이 울려퍼지면서 창문이 활짝 열린다. 이 빌어먹을 놈의 창문틀. 샷시 집에 전화라도 해서 새걸로 갈든가 해야지. 물론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저 해본 말이다.
그 순간 매캐하면서도 개운한 도시의 공기가,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채로 방 속으로 빨려들어온다. 땟국물이 묻긴 했어도 어쨌든 산소를 가득 빨아들이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후, 하고 내뱉는 날숨에는 담배연기 못지 않은 독극물이 들어있으리라. 그렇지만 이 곳에서 이런 방을 이런 가격에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때문에, 그 정도의 점진적인 자살행위는 어느 정도는 봐줄수도 있으리라.
"뭐, 공기가 드러우면 어떻노. 고마 상쾌하기만 하믄 되제."
83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린다. 창문가 아래에는 낡은 서랍장이 있다. 원래는 책상을 갖다놓으려고 했으나 비만 오면 물이 새는 바람에 포기했다. 그깟 70만원짜리 컴퓨터가 이십몇년동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보다 더 소중하단 말이냐. 하지만 컴퓨터에 물이 들어가선 안 될 노릇이다. 그래서, 영원토록 꺼지지 않을 컴퓨터가 있는 책상은 벽 구석에 놓여있다.
책장에는 책들이 나름대로 가즈런히 정리되어있다. 니미럴, 내가 결벽증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이 뭐같이 좁은 방안에 이렇게 많은 책이 뒹굴어다닌다면 그건 아마 책을 배게삼고 책을 이불 삼아 잠을 자야 할 것이다. 낡은 책장에는 포화상태가 되도록 쑤셔넣은 책들이 숨막힌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럼 뭐하냐. 먹고 살기 위한 지식을 담은 책은 손때가 덜 묻었어도,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잡雜스러운 지혜를 담은 책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쌓여있는데. 전혀 실용성이 없는 책장의 내용물들이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 책장 옆을 점령하고 있는 냉장고 문을 연다. 아무리 밀봉을 해도 쉬다 못해 썩어가는 냄새를 숨길 수가 없는 김치통 옆에 엽차가 든 생수통이 널브러져있다. 니미, 얼마 남지 않았으니 또 끓여놔야겠다. 지금 한 뭉텅이의 엽차 잎으로 한 4번 정도 우려냈으니까, 이번에 끓이는 엽차는 아마 탄 맛이 날 거다. 아니면은 곰팡이 맛이 나거나.
비록 탄 내가 나지만 83은 엽차의 그 씁쓸하고도 은은한 맛을 좋아했다. 특히 느끼한 음식을 먹은 뒤에는 꼭 마셔두는 것이 좋다. 안그러면 하루종일 속이 더부룩하거든. 이 곳의 식단은 지나칠정도로 담백하거나 지나칠정도로 느끼한 음식으로 이루어져있다. 담백한 음식이란, 머슴 밥공기마냥 한껏 퍼다넣은 고두밥을 쉰내나는 밑반찬과 함께 우겨넣는 것을 뜻하고, 느끼한 음식이란, 그 짓이 귀찮을 경우 라면, 혹은 기분좋을 때는 통닭이나 피자 등을 한없이 우겨넣는 것을 뜻한다. 그저 하루 살기 위해 쑤셔넣는 음식에서 이미 미각적인 탐욕을 추구하자는 욕심은 버렸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지만. 그런고로 냉장고 옆의 조그마한 싱크대에는 언제나 라면을 끓인 냄비와 밥공기, 반찬통들이 널브러져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설겆이도 안하고 그대로 다시 사용해버리곤한다.
뒤뚱거리는 몸을 이끌고 방의 1/4를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독립된 공간인 화장실로 향한다. 조만간 소핑Soaping 을 해야겠는데, "찌릉내"가 잘 발달된 후각을 파고든다. 그저 지금은 세수를 하려고 왔을 뿐이다. 허리를 숙여 물을 받는다. 둔탁한 통증이 허리에서부터 치고올라온다. 아 썅.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되었나. 욱씬거리는 허리의 저항을 무시한 채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다. 뜨거운 물이 나오게 하려면 약 1분 정도 물을 내다버릴 각오를 해야한다. 그리고 나면 펄펄끓는 뜨거운 물이 왈칵하고 쏟아진다. 그러면 그동안 모아놨던 물과 잘 섞는다. 일종의 생활의 지혜다. 물론 지혜라고 하기에는 조금 비참한 면도 있다. 그렇지만 한겨울에 머리를 감을 때, 각기 다른 두 가지의 감각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것은 사절이다.
그는 그의 신체 일부와도 같은 침대로 몸을 던진다. 우지끈, 하고 몇개의 스프링에 과도한 하중이 걸리는 소리를 느낀다. 편안한 자세로 몸을 뒹군다. 짐승같다. 누가 그렇게 욕해도 할 말은 없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건 사실이니까. 그 짐승이 뒹굴고 있는 방은 온통 파란색 벽지로 도배되어있다. 푸른 바다 속을 헤엄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라고 가끔씩 놀러오는 친구들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일부분만 맞았다. 나는 헤엄치지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가라앉을 뿐. 그리고 나의 이 방은 푸른 바다가 아니야. 푸른 바다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여긴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절망속에 지쳐빠져서 무덤덤해져버린 한 가련한 남자의 무덤이야. 그 남자가 수장水葬 당한 거라고 주장한다면 또 할 말은 없겠지만.
그저, 이 온통 파아란 방구석 속에서, 83의 젊은 날이 조금씩, 그러나 눈에 보일 정도로 점점 더 많이 갉아먹혀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분명했다. 그 외의 일은, 83에게 벌어지고 있는 그 외의 일은 그 어느 것도 분명한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이 그를 점점 더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