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마아아아아아아아아안!!!"
밤하늘에 울려퍼지는 그의 살기어린 목소리. 어둠 속에 그 공허한 절망은 형체도 없이 사그라져간다. 그와 동시에, 그 두사람을 에워싸고 있던 이상한 "회상"이라는 마법이 순간 찢겨져나가는듯했다.
"아.... 이,이런..."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이 없다. 그저 그 커다란 눈망울을 평소보다 더욱 빨리 깜빡이면서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다.
"죄,죄송해요, 저, 저, 너,너무 심한 말을 하,한 거 같아서, 죄, 죄송해요! ...."
하지만 그는 화를 내지 않는다. 아니, 화를 내기보다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억지로 막아놓았던 감정의 물꼬가 어느 한 순간 툭, 하고 터져버린 것 처럼.
"......"
잠시동안 83은 아무 말이 없다. 파랑은 여전히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뱉어버린거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데 그녀의 눈에 비쳐진 83의 모습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어께를 들썩거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두꺼운 안경을 벗은 채로, 두 눈을 가려버린다. 낮은 목소리로 그는 흐느끼고 있다. 파랑은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녀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도 왠지 눈물이 고여온다.
"선생님...."
"음.... 미, 미안... 내 갑자기 소리를 질러가꼬... 미안..."
"아, 아니에요... 제,제가 너무 심한 말을 해버려서..."
"......"
잠시동안 아무 말이 없다.
"파랑 쌤"
"네....?"
"내 잠깐, 옛날 얘기 좀 해줄까?"
"......"
근처 적당한 계단에, 그는 털썩하고 주저앉는다. 그녀도 작은 몸을 일으켜, 그의 옆에 앉는다.
"쌤을 보면은 왠지, 내가 옛날에 좋아했든 사람이랑 쪼매 비슷한 이미지가 있었그든..."
"네...."
"그른데... 이제 보아하니... 가슴 속에 남은 상처... 와 같은 그는... 오히려 내랑 비슷한 면이 있구마.."
"......"
"그래, 쌤 말이 맞다. 내도... 어찌보며는 장난감이었을지도, 모르겟다.. 우짜면... 걔한테는, 말이제..."
"저기, 괜찮으시면,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주실 수 있으세요..?"
"별로 재미도 없을긴데..."
"아뇨, 왠지... 선생님도... 겉모습은 많이 다르지만... 그이랑 왠지 닮은 면이 있어서요..."
겉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이제 보니... 선생님도... 그 전에 하신 말씀도... 다 이제는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거 같아요..."
"형체가 사라져버린, 가슴 속의 빈 자리..."
"왠지, 그 말이... 지금까지 제가 겪어왔었던 그 느낌을... 한 마디로 드러내주는 거 같아서..."
"젠장..."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니고, 쌤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게... 저로서는 좀 충격이었어요..."
"와 내가 그런 말을 하믄 충격이 되는거지...?"
"그이도, 그런 말을 늘 제게 해주었거든요... 시를 써준다거나... 내 외로움을 채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거나..."
그래서 나랑 닮았다고 한 거였을까?
"그런데... 그이는... 결국, 거,거짓말 쟁이였어요... 그런, 그런 말로 제 맘 다 뺏어버려놓고... 알고보니... 저같은 사람들한테는 그런 수법으로 접근한다고 하더군요..."
......?
"제 모든 걸 다 바쳤는데... 결국... 이렇게 버림받고 말았어요... 전, 전, 너무 멍청해서... 다 끝나버린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아버렸어요..."
그리고는 다시 훌쩍훌쩍, 흐느끼기 시작한다. 83은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사람과 내가 동일시되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걸까...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