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조명의 선술집. 두 남자가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는다. 두 사람 모두 늦은 밤 예고 없이 만나게 되서 인지 편한 복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 남자가 매우 격앙되어 있는데 반해, 다른 남자는 무덤덤하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문다.
조명이 점점 더 밝아지며 두 남자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한다.
A: "하.. 진짜로 이해가 안된다. 내가 보면 그냥 쓰레기 수집 같구만. 왜 그라는지 모르겠다."
B : " 그거 땜에 또 싸웠나. 제수씨 모으는거?"
A : "하.. 진짜 돌아 뿌겠다니까. 씨발.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거 좀 버리자 했다고 나가라 안 카나. 하.. 더러워서 나왔다. 이래갖고 우째 사노."
사실 A의 이러한 상담이야 벌써 여러해째 이어지고 있으니 못살 것이야 있겠는가. 나는 말없이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대답했다.
B :"그래서 또 자알 자고 있는 내 부르고? 근데 그.. 제수씨 한 10년 모았제? 니한테 듣기 시작한 거도 그 쯤된 거 같고"
A :"어,글치. 인자 집이 좁다, 좁아. 내가 손만 댔다 하믄 지랄한다 ! 그리고 한 두어 시간 앞뒤도 안 맞는 이야기로 강연한다 아이가. 하.. 생각만 해도 닭살 돋는다. 웃기는 기 나중에는 지도 말이 안 맞는거 아는지 내보고 그냥 나가라 한다."
생각해보니 나도 A와 제수씨가 그 문제로 다투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날은 A가 함께 집으로가 제수씨를 설득해보자 부탁했던 날 이였고 나도 그리하자 했다. 내가 A의 제안을 선득 허락한 것은 그 기이한 수집이 내가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수씨는 결혼하기 전에 어떤 NGO단체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수집도 그 당시 일과 연관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A가 굳이 나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언변에 재주가 없기 때문이라거나 부부싸움에 남을 끌어들일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자신의 수집에 대해, A에게는 큰소리도내고 걸릴 것 없이 일장연설 하는 제수씨였지만 어째서인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래 알고지낸 나에게조차도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A는 제수씨의 그런 성격을 알기에 나를 동원해 둘 사이의 대화가 이성적으로 진행되길 바랬던 것이다.
우리 둘은 의기투합해서 집으로 찾아갔다. 제수씨는 그런 우리를 영문도 모른 체 반갑게 맞아주었고, 가벼운 술상까지 차려주었기에 그날 승산이 있겠거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제수씨의 수집에 대해 말을 꺼내자마자 제수씨는 대꾸도 없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 A는 무슨 짓이냐며 당장 나오라고 소리쳤지만 제수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격분한 A가 안방 문을 부셔버리겠다 했고, 나는 A를 말리며 괜찮다고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제수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이럴 거면 다시는 나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꽥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오랜 시간동안 제수씨를 보아왔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A :"가는.. 꿈 먹고 산다 아이가. 그기 뭐라꼬.. 인자는 다 지나간 일인데 뭐 중하다고."
B :"원래 글타 아니가. 세상에 '소중한 거'라고 이름 써 있는기 있더나. 그냥 '소중타'카고 보면 소중한기지"
A :"그렇긴 한데 내말은 저기 정신도 못 차리고 눈 디비지 갔고.."
A는 끌끌 혀를 차다, 내게서 담배 한 개비를 얻어가 입에 물었다. A의 금연은 내가 알기론 오늘로 두 달 정도 되었고, 이것은 다시 말해 제수씨와의 다툼도 그 정도 기간 만에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A는 두 달 동안 몸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답답함을 담배연기로 훑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 한참 후에 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A :"으이구 으이구.. 그니까 가는 아다 아. 나이는 먹는데 대가리는 빈기라. 나이를 다 어디로 쳐 묵는지 몰라."
제수씨가 어른스럽지 못하다며 핀잔하는 A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몇 일전 A와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본 날이 떠올라서였다. 그날 A는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다 결국 가게주인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가 하룻밤을 붙들려있었고, 제수씨는 그날 경찰서에서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사과를 연신 해대며 A의 등짝을 불이 나도록 두드렸다.
사실 그날 A의 난동은 축구 경기로 부터 이기는 했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처음엔 옆 테이블의 손님들과 과거 국가대표 시절의 이야기로 서로 흥에 겨워, 술잔을 몇 번이고 맞추며 신나게 술을 마셨다.
사실 내게도 고등학교 시절 보았던 월드컵은 잊을 수 없는 명 경기였고, 그 후로 벌써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한국 축구에 이제는 실망보다 그리움만이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다들 축구경기가 있는 날에는 '그날 축구경기를 보기위해 모인다.'가 아니라 과거 '히딩크 매직쇼'를 추억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라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사실 A는 프로 축구선수가 되고자 한 적이 있다. 실력도 꽤 있는 편이였는데, 고등학교 시절 지역 내에선 꽤 유명했고 몇 번 지역신문에 인터뷰 기사가 나가기도 했었다. 다만 A는 축구자체보다는 멋있게 축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기에 가끔 감독에게 혼이 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주전이었다.
하지만 전국대회의 출전이 걸린 중요한 경기에서 A는 무리하게 볼을 끌고나가다 상대편 공격수에게 빼앗겨 결승골을 내주게 되었고, 그해 A의 학교는 축구부 창설 이래 최초로 전국대회 출전권을 놓치고 만다. 그 때문에 A는 축구부 감독에게 큰 미움을 사게 되고, 결국 축구부를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A는 축구경기를 볼 때면 언제나 골키퍼에 관심이 많았다. '골키퍼는 잘해도 본전이다. 아무리 백번 천번 잘해도 한번 실수하면 사람들은 그것만 기억한다.' 라며 자기의 축구 인생도 딱 그랬다며 씁쓸하게 웃고는 했다.
그날도 A는 옆 테이블의 사람들과 한국월드컵 시절의 주전멤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A는 당대 골키퍼계의 한 획을 그은 김병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히딩크의 단한가지 실수는 김병지를 놓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A의 주장에 김병지의 실수는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히딩크의 선택은 현명했다며 다들 입을 모았다.(물론 나는 A의 과거를 알기에 말없이 담배만 한 개비 더 피웠다.)
그런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은 주제거리였고, 평소의 A라면 웃으며 넘어갈 만 했지만 그날 적당치 않게 취한 A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옆 테이블 손님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지 시작했다.
"사람은 티끌만 보면 안 되는 기다. 아나? 어? 아냐고? 그러면 티끌에 지는거다. 티끌에 지는거라고!!"
A는 자신을 나와 가게주인이 뜯어내고 경찰들이 경찰서까지 끌고 가는 동안 내내 티끌에 져서는 안 된다며, 몇 번이고 고함치고 흐느끼고 억울해 하였다. 다들 그런 A를 의아하게 봤지만, 나는 그 말의 뜻을 알고 있기에 입을 다물었다.
A는 축구부에서 제명된 날 학교에서 전화로 아버지께 그 소식을 알렸고 그날 저녁 A의 아버지는 만취된 상태로 집에 들어와 자고 있는 A옆에 앉아 한참이나 A를 위로하셨다.
"A야, 니 마더테레사 알제? 그분이 하신 유명한 말이 있다. 한 번에 하나씩이라고, 한 번에 한사람씩이라고 절대 대중을 구할라고 하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니도 이번일 하나로 뭐 전부 다 끝장났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알제? 그러니까.. 작은 티끌하나가 니한테 생긴거 뿐인기라. 그런거에 니가 홀라당 티끌이 되면 안 되는기다. 알제? 알제?"
사실 나는 A의 아버지가 한 말은 그저 A를 위로하고 싶어서 했던 횡설수설 이라고 생각했지만, A는 그 말을 듣고 밤새 울었다고 했다. 그때 이후로 A는 그 '작은 티끌'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 괜찮은 대학에 진학했다.
A의 좌우명은 그때 이후로 '티끌에 지지 말자'가 되었고, 더 이상 옛날 축구부 얘기가 나와도 그다지 힘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A의 외침이 씁쓸하였다. A가 아직도 그 티끌에 매달려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사실 그것은 티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B :"니는 뭐 어른이가 임마야. 어제도 월드컵 예선보고 지랄 발광을 하드만."
A :"내는 그거 본다 해서, 가한테 뭐 피해 줬나. 가스나 지도 같이 보고 좋아했는데"
나도 A도 며칠 전 사건을 알고는 있었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A :"하.. 우리집 와서 봐라. 잘때가 없다 아이가. 사람이 현실을 볼 줄을 알아야 안되나. 가시나가 정신 못차리고.."
B :"현실적인거 비현실적인거 그런게 뭐 따로 있나. 그기 다~ 현실이지. 있는 거에 이름만 갖다 붙인 거 아니가."
A :"임마, 또 선문답하네."
B :"그런 말 있다 아이가.
'바다에 나갈 배를 만들고 싶으면, 배 만드는 기술보다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배워라'"
A :"지랄을 하세요. 누가 그라대? 금마 또라이네."
사실 나는 A를 위로하고 싶었다. A는 축구부에서 제명된 이후 티끌에 지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남부럽지 않은 성과를 내긴 했지만, 한 번도 티끌에서 벗어나진 못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다시 말해 A는 자신의 행복을 유예 시켜두었다. 스스로 인정할 만큼의 성공을 이루기 전에는 행복이라 부르지 못 하도록. 사실 이것은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고, 단지 그날의 사건으로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것이 A를 더 강하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유롭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A는 지금 투자회사에서 상류층 가정의 개인자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신조는 '작은 티끌에 두려워하지 말자'였고 그의 저돌적인 마인드는 꽤 많은 고객들에게 호응을 얻어, 지금은 잘나가는 개인자산관리사가 되었다. 가끔 프로축구선수들의 자산을 관리할 때 그는 선수들과 개인면담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면서 지금 한국프로축구 시장이 얼마나 불황인지를 확인하고 저녁에는 나를 불러내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반은 한국축구의 미래를 걱정하고 나머지 반은 그때 축구를 그만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열심히 설명한 후 몇 번이고 동의를 얻어냈다. A는 그렇게라도 벗어났다 믿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종지부를 찍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A도 그런 나를 알고 있다. 그런 날에 A는 더욱 집에 들어가기 싫어했기에 몇 번이나 A를 내 집에서 재우고 다음날 아침 제수씨가 집으로 찾아오게 만들었다.
B :"아.. 근데 제수씨 머 모으신다 캤더라? 들었는데 까묵었다."
A :"달 조각 있다 아이가. 우리 얼라때 박살나 뿐 달. 그거 아직도 천지 빼까리로 길에 뿌려져 있는데, 그거 주워온다 아이가..."
B :"맞다 맞다. 근데 제수씨는 그거 왜 모은 다고 그라데?"
생각해보니 나는 제수씨에게 왜 그렇게 달 조각을 모으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A :"몰라.. 지는 뭐.. 달 만들끼란다. 지랄.... 그리고 지가 달 만들었다카믄 또 우짤긴데. 달이 뭐 지 혼자 빛나드나. 태양도 옛적에 탈거 다 타서 인제 암 것도 없는데. 씨발.. 달도 태양이 비쳐줘야 빛나지..."
달 조각, 생각해보니 달이 하늘에 떠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지만 우리 또래는 분명 밤하늘에 떠있던 달을 보며 자랐다. 뜨거운 태양빛을 은은하게 녹여내던 달.
하지만 달은 어느 때부터인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태양빛으로 밤하늘을 채우던 달빛도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처음 사람들은 달이 부풀고 빛깔이 어둡게 변해가는 것이 태양 때문이라고 했지만,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은 여전히 숨 막히게 뜨거웠고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직사광선을 뿜어대었다.
과학자들이 수차례 달 표면으로 파견되어 그 속에 가득한 고름이며 태양빛을 뽑아냈지만, 달은 날이 갈수록 부풀어 오르고 더 이상 태양빛을 삼켜 은은한 달빛으로 뿜어내지는 못했다. 대신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쾌쾌해진 낯빛으로'끄윽-끄윽' 트림하듯 가스만을 뿜어대었다. 특수 기술팀이 달의 뱃속을 열어 이것저것 넣어보기도 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달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태양빛을 먹기만 했기 때문이리라. 그럴 수밖에, 사람들은 태초에 태양과 달이 내걸었던 계약을 잊어 버린지 오래다.
-일정한 주기마다 자신의 가슴 한켠에 있는 조각을 달 조각과 교환하기로 한 약속-
생각해보면 어릴 때 1년에 두 번씩 학교에서 가슴 조각을 수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는 일주일 정도 뒤에 가슴 조각대신 달에서 가져온 조각을 학생들에게 돌려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달 조각을 가슴에 끼우는 일은 매번 서늘했다. 어린나이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저렇게 환한 달의 조각이 이렇게도 시릴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정확한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가슴 조각과 달 조각을 일정한 주기마다 반드시 바꿔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상습적으로 자신의 논문주제로 달 조각을 선택했다. 하지만 사실 과학자들도 진짜 이유를 알지는 못했으리라. (그리고 논문 주제로 그것을 택하는데 진짜 이유 같은 것은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가 생긴 이래, 그러니까 벌써 5000년이나 전에 만들어진 헌법 제219조에 명시된 내용 이었을 뿐이니까.
'헌법 제219조. 대한민국의 국민은 태양과 달과 지구의 약속에 의해 짧게는 4개월 길게는 2년을 주기로 국민 개인의 가슴 조각을 달 조각과 주기적으로 교환한다. 단, 긴급 상황 시 대통령과 국회의 통과 하에서 재량의 선택은 가능하다. 이법에 위배된 단체, 개인의 행위는 그 정통성이 부정될 수 있다.'
130개 헌법 조항은 수시로 바뀌었지만, 최초의 계약자들이 헌법 제219조만은 개정 불가능한 특별법이라 명시 하였기에 5000년 동안 한번도 제219조는 개정되지 않았다.
헌법 제219조에 근거를 둔 행정법이 여러 개 존재했지만, 그 내용은 대게 극히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고 달 조각 교체에 동참을 거부하는 국민에 달 조각 교체를 강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5000년이나 전의 일이였으니 누구도 그 이유에 대해서 명쾌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심장에 달 조각을 끼우는 일이 참으로 서늘했지만 이일에 대해서만큼은 국민들 모두 군말 없이 따랐다.
가끔 뉴스에서 정치인들이 불법으로 달 조각을 심장에 끼우지 않다 발각되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그때마다 나는 '어른들도 달 조각 끼우는 것을 싫어하긴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한파가 몰아쳤다. 역시나 과학자들은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고 다만 이 한파가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라고만 했다. 그때 나는 겨우 국민 학교에 입학할 나이에 불과했기에 다른 것보다 이 추위에 얼어붙은 달 조각은 얼마나 차가울까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달 조각을 바꾸기로 계획되어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과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이런 한파에 꽁꽁 얼어붙은 달 조각을 사람 몸에 끼우는 것은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라 했으나 정부에서는 헌법에 따른 달 조각 교체행사는 불가피한 일이라 했다. 많은 언론에서도 달 조각 교체행사 일정변경을 주장했지만 역시 정부에서는 국가계획의 일관성을 주장하며 수용하지 않았다.
그런 도중에 사건이 발생했다. 한 정치인이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먼저 나서서 얼어붙은 달 조각을 자신의 심장 한가운데 조각과 바꿔 끼운 것이다. 여론에서는 일제히 그 장면을 생중계했는데, 그만 정치인이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평소에 지병이 있었다는 정부의 발표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 후로도 루머는 계속되었다. 정부에서 몰래 죄수들을 데려가 얼어붙은 달 조각을 죄수의 것과 바꾸어 본다고, 그러면 백이면 백 다 죽는다고 했다. 그런 소문과 함께 누군가는 드디어 심판의 날이 왔다고 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이고 착한일은 한사람만 살아남을 거라고 했다.
국민들은 극도로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국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에 힘입어 야당과 언론에서도 본격적으로 정부를 규탄하기 시작했고 헌법의 일관성을 이유로 등 돌리던 정부도 마침내 굴복하고 만다. 달의 온도가 상승할 때까지 달 조각 교체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한 것이다. 재밌는 것은, 과학자들이 달 조각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대한 여러 가설들을 내 놓았지만 그로부터 5년간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때마침 나라의 정권이 바뀌고, 대선 후보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허황된 신화를 비판하며 자신의 지지도를 높여갔다. 국민들도 그에 열렬한 환영의사를 밝히었고, 결국 새로 뽑힌 대통령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사상 초유의 특별법 개헌을 시도하여 제219조를 새롭게 바꾸어 내기에 이른다.
그 내용은 굉장히 장황했지만 결국은 매년 국민투표에 의해 달 조각 교체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개헌이 되던 날 아침 사람들은 자유를 외쳤다. 우리가 자유를 되찾았다고 모두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즐겼다. 그해 최고의 인기 불량품은 '프리덤'이라는 달 조각 모양초콜릿 이였는데, TV에 나온 덩치 큰 아저씨가 달 조각을 우악스럽게 씹어대는 모습을 보고 나는 한참이나 가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왠지 내 가슴에 있는 달 조각을 씹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달 조각 교체는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체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누구도 달 조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과학자가 자신이 관측한 결과를 신문을 통해 보도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의 달에는 조각이라는 것이 없고 달 전체가 한 덩어리로 붙어버려 조각으로 떼어내려 해도 떼어지지 않는다.'
그 뉴스는 과학 칼럼에 꽤 크게 실렸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달 조각이 하나로 붙어버린 것이 뭐가 대수냐 라는 반응뿐이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법의 현실적 실효성이 없어진 헌법 제219조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달에서 이상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고, 크게 부풀어 오르다 터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날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심부름을 가기위해 슈퍼로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당황한 나는 얼른 달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서 달은 울고 있었다. 더 이상 태양을 받아주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그러더니 기이한 소리를 내며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고 이내 거울 깨지는 소리와 함께 달 조각이 밤하늘로부터 비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잘게 부서진 달 조각들은 길 이곳저곳으로 흩뿌려 졌고, 나는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달 조각을 잡아보았다. 그것은 내 체온과 다르지 않았다. 더 이상 서늘하지도 않고, 빛을 뿜어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건 내 개인적 생각인데 달은 원래 우리의 체온과 같았을 것이다. 단지 하늘에 떠있기 때문에 그리도 서늘했을 뿐.)
과학자들은 여전히 말이 많았고,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안심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언론은 누구를 탓해야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태양이 다 타버렸다.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것에 오열하듯이 태양은 짧은 기간 격렬히 타오르다 까만 재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태양도 내 체온만큼 식어버렸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정부는 곧 원자력 발전소를 몇 개정도 더 세웠고, 지구가 격렬히 식지 않도록 지구 표면에 열선을 깔아대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밤에는 가로등이 빛을 내고, 낮에는 다 타버린 태양에 정부가 세운 환한 조명탑이 지구를 비춰주었다. 조명탑은 밝기는 했지만 우리가 쳐다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사람들은 가슴에서 체온 이외의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태양빛 앞에 숙여졌던 그들의 목이 빳빳해 졌다.
나는 태양이 다 타버린 날 A를 찾아갔다. 찾아간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론 필름이 끊겨 정확히 알 수가 없다. A에 따르면 만취된 채로 나는 몇 시간이나 마더테레사를 욕했다고 한다.
"작은 티끌이라고.. 티끌이라고.. A야 맞나? 니가 보기에도 티끌이가.. 그래 보이나.. 맞나? 그래 보이나?"
A는 영문도 모른체 힘내자고 하였다. 정부에서 알아서 잘 처리했으니 사는데 불편한 것도 없을 테고, 앞으로 더 잘살면 되는 것이니 지나간 일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도 서러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달과 태양이 사라졌다고 해서 지구가 바뀐 것은 아니란 걸 알지만.. 아니 솔직하게 내게서 바뀐 것은 거의 없다. 그러니 서운해 할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내가 언제 은은히 빛나던 달빛을 이 서러움만큼 사랑하적이 있었나. 달 조각 바꾸는 일이 귀찮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놓치는 것이 있는 것 같아 속상했다. 그때 나는 어렸기에 무엇이 속상한지 스스로 알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본능적 두려움이었다. 절대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을 잃어버렸다는 본능. 그러니 A에게 무엇인들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달라진 것은 없다. 그저, 서늘함과 고개 숙여야 했던 일에서 해방되었을 뿐이다.
누군가 이야기했다.
"다시, 다시 한 번 달이 떠야 한다. 이 시대는 누구도 서늘한 경고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신을 끌어내려 해체시켰다. 그를 의심하고 분해하여 스스로 그를 살해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이라도 길가에 버려진 달 조각을 모아 가슴조각과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체온으로 달 조각을 데워 다시 한 번 달이 뜨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한동안 그런 취지의 NGO단체들이 여럿 생겨났지만, 그리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는 달과 태양이 사라진 것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서였으리라. 더러워진 달 조각을 자신의 가슴에 끼우기 위해서 시대는 눈에 보이는 근거를 요구했고,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바야흐로 과학, 논리, 이성의 시대였다.
지금까지도 달과 태양 없이 지구는 살아가고 있고 눈에 띄는 문제는 없다. 이제 바닥에 떨어진 달 조각을 자신의 가슴으로 씻어내지 않는다 하여 누가 욕할 수 있겠는가. 시대에 그런 가슴이 필요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B :"야야.. 그래도 니도 제수씨도 다 달보고 자랐다 아이가. 너무 그라지 마라. 오늘은 니도 집에 가면서 한개 줏어가라."
A :“몰라. 씨.. 술이나 시키자.. 아. 근데 내 돈 안가지고 나왔데이”
조명이 어두워지며 두 남자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기어이 소리는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고 지구의 온도는 36.5도에서 머무른 체 고요하게 자전한다. 언제부턴가 공전이 멈춘 것을 지구인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지구에서 헌법 제219조는 영원히 폐지되었다.
태양의 빛을 서늘하게 가슴에 확인하는 일은 이제 아주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에 거울같은 조각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기 시작했다. 가끔 가슴 한켠이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누구도 가슴조각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거울처럼 환한 가슴조각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조차 쑥스러운 일이 되었고, 길가에 산재되어 있는 거울 같은 달 조각이 사실은 자신의 가슴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체 시간은 다시 한 번 흐르고 기어이 지구는 자전마저도 멈춰버렸다.
그리고도 셀 수없이 긴 시간이 지난 뒤, 지구는 몇 해에 걸쳐 폭발하기 시작한다. 수많은 지구인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무너져가는 지구 위 도망칠 곳은 없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체 그렇게 그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최초의 달과 태양과 지구의 계약자가 텅 빈 우주에서 흩어진 달 조각 하나를 손에 쥐고 마지막 날개 짓을 하기 전에 물었다.
"몇 번째 자식들이 가장 잘못하였느냐."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