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건 그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는 어떠한 탈 것을 탈때면 항상 창문가를 골라서 자리를 잡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항상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어딘가를 향해 집중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은 그에게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렇지만, 살다보니 멍하니 있어야할 일이 그에게는 많이 생기긴했지. 그래도 버스를 탈 때면 그는 항상 익숙하지만 왠지 보고 싶어지는 바깥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주 잠시를 빼고는 늘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고 있다. 혼자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 것인지, 잠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가, 다시금 고개를 푹 숙인다.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모습. 그러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누가봐도 그녀가 지금 뭔가 생각을 하고 있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만한 제스쳐다. 조용한 성격이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왠지 칠칠맞지 못하다는, 실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것때문에 눈에 띄일 것 같다.
언제까지 그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생각만하고 있을거지. 뭔가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게 있어야 할 거 아냐. 용기를 내야지, 어떻게 되든 간에 이렇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는 그 전 처럼... 그 전 처럼... 그렇게 후회만 잔뜩하고 죽도록 괴로워만하다가 빈자리만 남겨놓고 다 지워져버릴거야.
정류장에서 두 사람은 내린다. 밤이 짙게 내리운 골목. 요즘은 왠지 같이 걸으면서도 처음의 몇 마디 외에는 나중에는 할 말이 끊겨져버리는 일이 잦았다. 그렇지만, 뭔가 할 말이 있지만 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라는 걸, 그는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요즘들어 그녀가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뭔가 자꾸 골똘히 생각하는 제스쳐를 자주 취하곤 했었다. 원래 그러는 걸까, 아니면...?
용기내서 말을 걸어보기로 한다. 그렇지만 조리있게 해야한다, 조리있게... 명확하게... 명확하게...
"저, 파랑 쌤. 음... 그 전부터 물어보고 싶든게 있는데 말이제..."
"...네?"
"그 전에 회식했을때 있다이가, 그, 그때 필름이 끊기가지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예... 그, 그런데요...?"
"흠... 그때 내랑 쌤이랑 같이 돌아갔다카는데, 호, 혹시 내가 머 쌤한테 실수한거라도 있나? 해, 해서..."
해서, 라는 말은 거의 기어들어가듯이 꼬리를 감춘다. 이런 이미지의 사람이 아닌데.
"시, 실수라뇨. 저, 전혀, 그런거 아니에요. 그때 저도 술이 많이 취해서...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질 않지만.."
"음, 그런가. 그란데 왠지 그날 이후로 계속 뭔가가 맘에 걸리가꼬... 쌤한테... 내가 괜한 말을 꺼낸긴가..."
파랑은 83의 얼굴을 바라본다. 왠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그리고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다. 쓸쓸한 표정. 고개를 숙인 채, 평소의 그 무뚝뚝하거나 말 많은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저... 83 쌤, 혹시 이 말, 기억하고 계세요?"
"...?"
"형체가 사라져버린, 가슴의 빈자리..."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또렷하게 들린다. 그리고 불현듯 잊어버렸던 그 날의 기억 한 조각이 어렴풋이 생각이 나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이었더라, 기억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런 젠장.
"형체가 사라져버린, 가슴의, 빈 자리..."
"그 때,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거 같아요... 그런데, 그 때, 저... 이,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
"너무, 너무 슬펐어요. 그래서, 우, 울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가 쌤한테 폐를 끼쳤었던 거 같네요. 그, 그런데 울었었는데, 그 다음의, 그 다음의 일이 잘 기억이... "
순간 머릿속에 벼락을 맞은 것 처럼 뭔가가 스쳐지나간다. 순간 83은 그 자리에 멈칫, 하고 선다. 파랑은 고개를 숙인채 걷고 있어서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래도 왠지, 그, 그말이 너무 슬퍼서... 너무 절 슬프게 해서... 왠지... 왠지..."
83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