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쌤께선 먼저 가셔도 되는데..."
"뭐, 그래도 아무래도 혼자 가는 거 보다는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싶어서..."
"그래도..."
"어얘됬든 언능 정리나 마저 하세요. 그래 꾸물대가꼰 나중에 신학기라도 되믄 곤란할긴데."
"네, 네... 죄송해요..."
팔짱을 끼고 지켜본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83은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한 듯 하다. 그는 지금 약간 찡그린 얼굴과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인위적인 티가 나서 누구나 억지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한 것이다. 실제로는 흐뭇하게 웃고 싶었을려나. 그렇지만 가끔씩 불안한 듯 마른 침을 삼키는 모습을 보니 긴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20분 후, 두 사람은 밤길을 걷고 있다. 이 정도 시간이면 막차 하고도 두어번 정도는 여유가 있다. 그는 그의 조금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는 여자를, 문득 뒤돌아본다. 뭔지 모를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는 듯, 초롱초롱한 눈가에 웃음기가 머금어져있다. 피식, 하고 웃고,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앞으로 돌린다. 왠지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구나.
그 옛날에는 어떤 기분이었지? 15년도 더 지난 옛날 이야기가 기억이 날 리는 없다. 아주 단편적인 조각 몇 개만 남아있을 뿐이지. 그 것도 주인공의 이미지는 삭제되어진 채로 그 몇 가지의 상황만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때 그 여자랑 이렇게 함께 밤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나?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나마 명료한 기억은 그녀가 그를 떠나갈 때의 상황들 뿐이다. 떠올릴 때마다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이 슬프다가, 곧 이어 무덤덤해져버리는 그런 기억들.
아프지는 않았다. 詩나 다른 넋두리들에서 주절거렸던 것 처럼. 아팠을 때는 그녀가 내게서 조금씩 멀어지려고 했었을 때가 제일 아팠다. 완전히 소식이 끊겨버린 다음에는 전혀 아프지는 않았다. "사람" 이라는 관점에서의 존재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차지했던 "공간" 이 비어져버렸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씩 그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갉아먹히고 갉아먹혀서, 그 빈자리는 도저히 그 어떠한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듯이 깊은 공허로 남겨져버렸다.
아직까지 그 어떤 존재로도 이 비어버린 가슴 속을 채워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온갖 쓰잘데기 없는 것들로는 온갖 비참한 공허감만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럴 수록 그는 점점 더 그의 깊은 심연 속으로 침몰해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언제일까, 비어버린 가슴 속을 채우려는 시도를 그만둬버렸다. 더 이상 가라앉는다는 느낌 이상의 괴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조차 모르는 곳에서 그는 부서져가고 있었던 걸까. 아주 오랜만에 채워보려고 하는 그 공간이 너무 괴롭게 다가온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서져버린 가슴. 이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날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사람을 통해서 채울 수 있을까? 아니, 만약 이 시도마저도 실패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두렵다. 지금 내 뒤에 따라오고 있는 이 사람이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판명되어져버린다면 그는 이제 두번 다시는 그 어떠한 것에도 애정이란 것을 품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밤이면 늘 그렇지만, 이럴 때면 항상 울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저 여자가 나의 눈물이 되어 줄 수 있을까.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