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좌석이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 어쩌면 다행스러울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익숙해질만도 됐으리라만, 그녀는 앉으라는 말을 몇번이고 사양한다. 흔들거리는 버스에서 제대로 잡을 것이라도 없으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처럼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몇번이나 채근을 해야 어쩔수없이, 주저주저하면서 자리에 앉는다. 내숭이라면 차라리 이해라도 되겠지만, 그녀의 다른 행동들로 미루어봤을때 모든 일이 이렇듯 자신감이 극도로 부족해보이는 스타일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려고 하는 것이, 냉정하게 보아서 이 험한 세상에서 살기가 쉽지 않을 성격이다.
그렇지만 나의 이상형은 언제나 이런 사람이었다, 연약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부서져내려가는 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 83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아서 창문 밖을 바라보는 파랑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 여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걸까? 그렇게 해 줄 수 있을까? 나같은 놈을 위해서? 그의 가슴 속이 조금씩 더 부서져가는 듯 했다.
창문 밖으로는 숨막힐 정도로 새빨간 노을이 저물어가고 있다. 회색빛이 가득한 도시의 실루엣 사이로 번져오는 그 서글픈 것들을, 그녀는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는 그런 그녀의 실루엣이 더해진다. 그는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안타까운" 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글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가슴 한 구석이 계속해서 무너지는 것 같다.
파랑은 왠지 약간은 풀이 죽은 표정을 짓고 있다. 문득 차창에 희미하게 비친 남자를 바라본다.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그녀는 고개를 푹, 하고 숙인다.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부끄럼을 탄다. 두 손을 모아 만지작거린다. 고개를 가볍게 절레절레 흔든다.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다. 문득 시선을 돌린다. 안타까운 표정을 계속 짓고 있는,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커다란 눈망울과 찢어진 시선이 마주친다. 둘은 서로 고개를 돌린다. 어떻게 해야할까, 말을 하지 못한다.
'바보 같아, 정말...'
둘은 거의 동시에 화들짝, 놀란다. 남자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눈을 깜빡거린다. 뭐지? 아까 전 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데...? 여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방금 전, 그 목소리는 뭐지...?
학원 앞 까지 버스가 도착할려는데 아직 둘 다 벨을 누르지 않았다. 83이 문득 창 밖을 바라보다 깜짝, 하고 놀란다. 벨을 누르려고 하지만 이미 정류장을 버스는 지나가버렸다. 어쩔 수 없이 벨을 누른다. 여자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상황을 알아차린 듯 뒤늦게 깜짝, 하고 놀란다.
"아.. 정류장 지나가삣네..."
"어... 그렇네요. 지, 지나가버렸네요..."
"쌤, 모,모르고 있었나?"
"아, 아... 저요? 저, 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죄송해요..."
"아, 아니, 아니다. 내도 멍 때리다가 그만... 미안..."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도착한다. 남자는 괜히 서둘러서 버스에서 내린다. 여자도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린다. 남자는 후, 하고 한숨을 쉰다. 그런데 가만.
"쌤? 가방은 어쨌노?"
"예? 가방이요...? 어, 어라?"
"이런 젠장할."
남자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버스는 신호에 걸려 멈춰있다. 버스 문 앞에 도착했다. 남자가 다짜고짜 버스 문을 두드린다. 문 열어주세요! 쩌렁쩌렁한 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진다.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듯 쳐다본다. 버스 문이 열린다. 부리나케 남자는 가방을 들고 나온다. 거의 뛰어내리다시피해서 버스에서 내린 순간, 신호가 바뀌고 버스는 출발한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저...정말 고마워요..."
고개를 든다. 울먹거리는 눈망울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후, 하고 숨을 몰아쉰다. 가방을 건네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럴 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다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짐짓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지만, 가슴 한 켠이 부서져가는 느낌이 멎은 듯 하였다.
"자, 그라믄 갈까예."
"네에."
싱긋, 하고 남자는 미소를 지어보인다. 여자는 환하게 웃는다. 행복한 걸까.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이토록 가슴에 미어져오던 통증을 멎게 할 수 있다는 걸, 여태껏 몰랐던 걸까. 이 환한 미소가 진심으로 나를 향하게 할 수 있다면,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남자는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