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왜 이리 바본지... 어리... 석은지... ♬"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83이, 자뭇 기분 좋은 분위기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기분 좋은 듯한 기분으로. 기분이 좋은 듯한 기분이라고? 뭔가가 필사적으로 다른 뭔가를 뒤덮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그 기분조차도 뒤덮어버리는 게 편하지 않을까. 남아있는 반찬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채 볶아져있는 냄비를, 마치 개밥 먹는 개 처럼 허겁지겁 비우고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아주 일상적인 일들이 가득 차 있다. 아니, 어쩌면 억지로 일상적인 일들을 채워넣으려고 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어젯밤엔 세 번이나 악몽을 꾸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야만 했다. 그 꿈은 이상하게도 똑같은 내용이었다. 끊임없이, 헤아릴 길 없는 심해 속으로 추락하는 꿈, 온 몸으로 짙은 빛의 어둠이 밀려들어와, 숨을 쉴 수가 없는, 그런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아주 안 좋은 꿈이었다. 뭐 분명 다른 내용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오직 그 것만 기억이 날 뿐이다. 또한 그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잊어버릴 수가 없다. 무슨 놈의 꿈자리가 이렇게 사나워. "그 것" 때문인가? "그 것"...? 잊어버리자. 사소한 것 일거야. 이전처럼 아무 일도 없이 그녀랑 함께 일만 하면 되는거야. 그러면 되는 건데, 뭘, 뭘... 더...?
"앗 뜨거, 이 ㅅㅂ!"
무심결에 냄비에 맨살을 대고 있었다. 뭔 놈의 반사신경이 이렇게 없어. 무조건반사라고, 무조건반사. 뇌까지 오기 전에 척수에서 알아서 처리해버릴 수 있는, 그런 정보 말야.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느린거야. 팔 한 쪽이 빨갛게 부어오른다. 화상이라도 입은 걸까. 계속 욱씬욱씬거린다.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까지 되도록 몰랐던거지. 억지로라도 만들려고 했던 기분 좋은 듯한 기분이 싹 사라져버렸다. 긁적긁적, 헝클어진 머리를 긁는다. 사방을 둘러본다. 엽차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결국은 다시 컴퓨터다.
슬슬 일하러 가 볼 시간인가. 이젠 질렸다, 질렸다고 그토록 되뇌이곤 하는 컴퓨터지만 그래도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질려버렸지만 그만 둘 수는 없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걸까. 하지만 인간은 늘 그토록 간절히 원하지만 그만 둘 수 밖에 없는 일을 추구하며 살지. 그 역逆 이 바로 인생이라는 건데, 말야. 한숨을 쉰다. 내 인생은 그럼, 뭐지? 이미 답을 구하려는 짓은 그만두었다. 다만, 뭔가 계속 가라앉는다는 느낌밖엔, 그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한 줄기 빛이 보인다면?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헝클어진 채로의 머리, 구겨진 슈트를 걸치고 그는 현관을 나선다. 이 파랗기만 한, 점점 어두워지기만 하는 이 심해에 한 줄기의 빛이 펼쳐질 수 있다면...? 그러면 뭐가 달라져도 달라질까? 그럼 "그 것" 은 뭐지?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는 항상 예정된 시간보다 최소한 10분은 일찍 도착한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를 기다리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녀도 시간을 꽤 잘 지키는 편이지만, 여러 이상해보이는 면에 비해서 그런 점에서까지 이상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그녀가 그를 기다리는 일은 여태껏 단 한번도 없었다. 그래야 정상인데...
"어, 오늘은 와 이리 일찍 왔어?"
"어, 안녕하세요. 역시... 항상 이렇게 일찍 오시나 봐요...?"
약간 상기된 얼굴의, 따스한 눈을 가진 여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리고"라는 표현이 맞을까? 확인해보고 싶었다.
"음... 뭐, 항상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는게 습관이 되가꼬 그라긴 한데... 쌤은 와 이리 일찍 나왔는교?"
"아, 저, 저요? 저야 뭐... 그, 그냥 어쩌다보니 일찍 나오게 되었네요."
그냥 어쩌다보니라니. 여태 2,3 주동안 같이 만나서 학원을 갔는데 그런 적은 한번도 없다. 약속 시간을 늦는 일도 없이, 거의 제 시간에 도착하던 여자가 갑자기 10분도 더 일찍 약속장소에 나왔는데 그게 그냥 어쩌다보니라고? 이러한 논리적인 추리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지만, 왜 그녀가 이랬을까에 대한 감정적 추리에 대해선 완전히 무능하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으므로, 그냥 얼버무리기로 한다.
"저... 그런데 쌤, 손, 어디 다치셨어요?"
"응? 뭐가?"
"저기, 왼 손에 반창고 붙이셨잖아요."
"아, 요거? 뭐 별건 아니고, 좀 데여가꼬."
"예? 괘, 괜찮으신 거예요? 병원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괘않아, 괘않아.(괜찮아, 괜찮아) 내 피부는 고렇게 관리받을 만큼 자격이 없어. 고냥 약만 바르면 돼."
"저... 그, 그래도 병원에 가보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 호, 혹시 그러다 덧나기라도 하면..."
"괘않타니까. 정말로."
왠지 기분이 좋다.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 이 귀여운 사람이. 왠지 다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갔다가 혹시 이 시간에 도착이라도 몬했으며는, 쌤이 내 기다리게 하는 게 됐을라나?"
"예...?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기다리게 되는 거 같은게... 뭐, 뭐가 중요하다고..."
"아니, 내는 그래도 누군가가 내를 기다리게 하그나, 내 땜에 애타게 하는 거 억수로 싫어하거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자는 남자를 바라본다. 얼굴이 빨개진다. 왠지 그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가 젖어오는 것 같다. 어... 왜 이러는 거지? 뭐 이상하게 해석했나? 그는 당황한다. 참 사람을 당황하게 잘 하는 여자구만. 순간, 그의 마음 속으로 어디선가 자그마한 울림 같은 것이 들린다.
'그러신 분이, 그 땐 왜 그러셨어요...'
화들짝, 남자는 놀란다. 덩달아 여자도 화들짝 놀란다. 남자가 놀라서 여자가 놀란 것일까. 어쨋든 두 사람 모두 놀랐다.
"쌔, 쌤. 방금전 뭐라 내한테 말했어?"
"네? 아, 아니에요. 아무,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분명히 여자는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 것도 아니에요, 라고 대답을 한다. 그리고는 얼굴이 새빨개진다. 뭐지, 이건...? 방금 전, 그 목소리는 뭐지? 파랑의 목소리랑 거의 똑같은 목소리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 처럼 자그맣게 들려왔다. 대체 이건... 뭐지?
버스가 도착한다.
"자, 쌤. 이, 일단 갑시다."
"네..."
갑자기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얼굴이 새빨개지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이 갸날픈 것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거친 손은 알지를 못한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