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 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그는 패닉의 "달팽이"란 노래를 듣고 있다. 터벅터벅터벅터벅. 햐안 봉다리에 든 먹을 것들이 오른팔과 손가락에 통증을 준다. 노랫말처럼, 집까지 가는 길이 왠지 멀게만 느껴진다. 왠지 얼른 집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추스리고 싶다. 어디에선가 꿈틀거리는 불안함, 설레임, 이러한 감정들때문에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나는 바다로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가려고 시도라도 하고 있는 걸까? 인생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나는 달팽이보다도 느린 사람이다. 아니, 느리다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는 빙글빙글, 이 세상을 돌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 채로, 무엇을 위해 이렇게 빙글빙글 돌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로, 영원히 정체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것이 그의 지난 10년간의 인생이었다.
그런데, 10년만일까. 10년만에 이 세상 그 무엇에 대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누군가에 대해 설레이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니 이 마음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그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가슴 한켠이 울렁거린다, 어떻게든 추스리고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겠다, 논리에 침식되어 있는 그의 영혼에서는 적절한 대답을 해 주질 못한다.
"저 멀리 가까워오는 정류장 앞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알 수도 없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그댈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댈 안고서
그냥 눈물만 흘러 자꾸 눈물이 흘러
이대로 영원히 있을 수만 있다면...
오 그대여... 그대여서 고마워요..."
집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 무렵, 패닉의 "정류장" 이라는 노래가 흘러 나오기 시작한다. 버스 정류장앞에서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녀는 나를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녀는 내가 세상에 지쳤을 때 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일까? 아니, 그럴 마음이라도 있는 걸까? 해답을 원한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해답이 없다. 힌트조차 없다. 있는 것이라면 그녀의 한 마디 뿐....
"다만, 그 것 하나만큼은... 아니었길 바랬었는데..."
대체, 그 것이 무엇일까. 그 것이 무엇이길래... 그녀가 그렇게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던 것일까. 왜 슬퍼했던 것일까. 그녀는 지금쯤 학원에서 뭘 하고 있을까? 눈가에 아른거린다.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에 대해서.
파란 벽지가 도배되어있는 방으로 돌아온다. 아무렇게나 봉다리를 내팽개친다. 대충 옷을 벗은 다음 던져놓는다. 침대로 몸을 던진다. 덜컥, 또 스프링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신경쓰이지가 않는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을 잠식한 것은, 그녀, 파랑에 대한 생각뿐. 좋아해서 그러는 건가? 그런건 아닌 것 같지만. 아직은 첫사랑때의 그런 느낌은 없다. 그런데 왜...?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파아란 방속에서 침몰해가는 것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침몰한다. 침몰... 침몰... 혼자만의 고독한 절망 속으로... 여태껏 늘 그래왔으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이, 지금 이 순간 너무 생생하게 느껴진다.
숨이 막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익사하는 느낌. 왜 그런 것일까. 그대의 이름은 블루. 그대의 이름은... 브... 블...
"이런 씨팔."
그가 벌떡,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는 저녁 무렵이나 되었을까. 창문 너머로 부서져가는 노을빛이 아름답다. 그 검은 실루엣이 파아란 벽지마다 너울거린다. 가만히 일어나 창문 너머를 바라본다.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풍경을 바라본다. 왠지 한 곳으로 시선이 간다. 그녀의 집이 있다는 언덕. 지금 그녀는 학원에 있을려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오늘은 수업이 있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피식, 하고 웃는다.
왜 웃는 걸까. 왜 기분이 좋은 듯하면서도 갑자기 미칠 듯이 서러워져 오는 걸까.
여전히, 해답은 없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