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을 여인 끌어안듯 어지러이 안고 얼마나 잠에 빠져 있던 것일까. 아침햇살이 들어올리가 없는 방이라서 오전의 시간은 눈대중으로조차 확인할 수 없다. 그저 날이 밝았다라는 것뿐. 눈곱이 낀 눈두덩이를 비비며, 83은 잠에서 깨어났다. 니미럴, 대체 몇 시간이나 잔거야. 휴대폰의 버튼을 누른다. 오후 2시. 이런 염병할 일이 다 있나. 대체 어제 몇 시까지 술을 마셨으며, 그럼 몇 시간이나 잠이나 처 자고 있었던 거야. 지끈거리는 머리 속에는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창문을 바라본다. 공장 너머 언덕이 있는 마을이 보인다. 저 마을에는 파랑이 살고 있다고 했지. 어제 보니 술을 진짜 못 마시는 것 같던데. 마치 나처럼 말이야, 하며 그는 피식, 웃었다.
아... 참!
끊어져있던 필름이 몇 조각씩 이어진다. 그 이어진 부분에는 노이즈가 가득해서,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온다. 황급히 그 흐릿한 영사기를 되돌려본다.
파랑에게 술을 권하는 류 쌤.
얼굴이 새빨개져서 쓰러지는 파랑과, 83.
자기는 파랑에게 그런 감정 같은거 없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장면.
택시에 두 술 취한 짐승이 몸을 구겨넣는 모습.
파랑이 그의 어께에 기대 잠든, 그 슬프도록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눈물 한 방울.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지? 나랑 파랑 쌤, 어떻게 택시에서 내려서 집까지 온 거지?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이런 빌어먹을......
기억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이런 젠장. 혹시 내가 술김에 파랑쌤한테 안 좋은 짓이라도 한 거 아냐? 아니면 그 반대라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 일도 없었던 걸까?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잠은 이미 오래전에 확 깨 버렸다. 그렇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는 오히려 가면 갈수록 그 통증이 심해져만 간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기억을 한 번 되새겨보자. 그 택시 뒷좌석에서... 그녀는 내 어께에 기대 잠들어있었고... 난 그 걸 바라보고 있었고... 왠지 조금 울었던 것 같은데... 왜... 왜 울었지? 그 때?
순간의 감정이 기억이 날 정도면 필름이 끊겨서 걱정할 필요따윈 있을리가 없잖아, 이 병신아.
간만에 새로 끓인 엽차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왜...? 그의 초점없던 눈에는 불안이라는 초점이 아로새겨지기 시작했다.
간만에 푹 쉬려고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겠다. 이처럼 불안한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해서일까. 배가 아파온다. 또 습관성 소화장애인가보다. 서랍을 뒤진다. 니미. 없다. 남아있는, 약. 배가 조금 많이 아프다. 약이 필요한데. 약국까지 가야하는건가. 한 30분인가를 화장실을 들락거렸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다. 어쩔수 없이, 동네 백수의 표준 복장을 갖추고 황급히 집을 나선다.
약국에서 약을 사자마자 몇 알을 털어놓고 나니, 왠지 진정이 되는 것 같다. 플라시보 효과인가? 그러고보니 집에 먹을 것도 마땅찮다. 나온 김에 몇 가지 간단하게 장이나 보고 와야지. 그렇지만 돈은 아껴야한다. 그러면 또 저기 정류장 있는 곳에 있는 할인마트까지 가야한단 말이냐. 약을 먹고 속이 진정되니 배가 고파온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으니까. 왠지 맛있는 것이 먹고 싶다. 그러므로 맛있는 것을 사면서도 돈에 무리가 없으려면 마트까지 가야한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고, 그는 걷기 시작한다.
오후 네시 반 쯤이었을까. 그의 손에 쥐어진 하얀 비닐봉투에는 먹을 것들이 푸짐하게 담겨져 있다. 그의 고향에서는 비닐봉투를 봉다리라고 부른다. 봉다리. 비닐봉다리. 이 봉다리에 머글 거 한그 담아가꼬... 그는 피식, 하고 웃는다. 그리고는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고향이 그리워서일까.
그런데 버스 정류장 앞에, 왠지 낮익은 모습의 사람이 서 있다. 조그마한, 무릎까지 오는 검정 양말을 신고 있는, 단발머리의 여자. 그는 꿀꺽, 하고 침을 삼킨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첫사랑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첫사랑이었던 여자애도 저런 모습이었지. 교복을 입고... 그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낀다.
"어, 쌔..쌤, 오, 오늘 학원 아, 안가세요?"
정신을 차려보니 그 여자는 파랑이다. 짧은 머리을 하고 있었지만 왠지 그 전보다 더 짧게 머리를 다듬은 것 같았다. 마치 학생처럼 보인다. 귀엽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산발머리의, 표준 백수의 모습이다. 평소라면 전혀 신경쓰지 않을 일이건만, 신경이 쓰인다. 순간 모르는 척 지나가버릴까, 그런 생각에 바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제 일이 생각이나서,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향해 다가간다.
"어. 쌤, 그 전에 내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얘기했을긴데... "
"아, 아 맞다... 그, 그러셨죠..."
마치 어젯밤처럼 얼굴이 새빨개진다. 왠지 평소보다 훨씬 더 얼굴이 빨갛다. 그리고 말 그대로 어쩔바를 모르는 것 같은 모습. 그는 순간 가슴이 덜컥, 거린다. 이런 니미, 내가 어제 진짜 무슨 짓이라도 한거 아냐?
"그, 그, 근데... 쌤. 어제 자, 잘 들어갔어?"
"예... 예? 아, 그, 그야, 무, 물론... 쌔, 쌤이 절 바래다 주셔서... 자, 잘 들어갔었어요, 저, 정말로..."
무슨 병신도 아니고 둘 다 말을 장애우처럼 버벅거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당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여자의 당황스러움은 무언가를 숨기려하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라는 것을 남자는 알 수 있었다. 아마 그 것때문에 남자는 그토록 당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글나, 자, 잘 들어갔다믄 다행이네. 내는 어제 기억이 아, 안나가꼬..."
"에? 아, 아뇨. 저도 뭐.. 기, 기억이 거의 안 나는 걸요, 뭐. 헤헤헤..."
억지로 천진난만하게 웃는 것 같다. 그리고는 왠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린다.
"다만, 그 것 하나만큼은... 아니었길 바랬었는데..."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의 귀에는 그 모든 단어들이 아주 또렷하게 들어왔다.
"응? 그게 무슨 말이고? '그 거' 라니?"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 신경쓰지 마세요... 헤헤, 헤헤헤..."
웃는 모습이 정말 어린아이처럼 귀엽긴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것' 이 뭐지? 그리고 그 것만은 아니길 바랬는데라니? 그러면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는 건가? 그럼 '그 것' 이 뭐지? 내가 그녀를 실망시켰다는 건가? 머릿 속이 복잡해져오기 시작한다. 식은 땀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 흐른다. 온 몸이 벌벌 떨린다.
그녀의 시선이 느껴진다.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손을 모으고 있는 여자의 시선. 남자가 그 시선을 느꼈다는 걸 감지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린다. 안절부절하는 모습.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남자는 얼굴이 빨개지는 대신 창백해지기 시작한다.
버스가 도착했다. 여자가 황급히 입구를 향해 나선다. 그리고는 남자를 바라본다.
"저, 저... 그, 그러면 먼저 들어가세요. 다, 다녀올게... 요..."
"아..."
다녀올게요, 라니? 내가 무슨 가족이라도 되는건가. 남자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다. 꽈당. 파랑이 넘어진다. 자주 있는 일이라서 그닥 당황할 건 아니지만, 남자는 멈칫, 하고는 움직이질 못한다. 그녀가 일어나고 버스 계단을 오른다. 남자는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버스가 출발한다. 남자는 문득 버스 창문을 바라본다. 커다란 눈망울이 스치우는 것 같다. 파랑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걸까.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 왜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걸까. 그리고 나에게 뭘 기대했던 걸까. 그리고 나는 뭘 어떻게 했길래 그녀를 실망시켰는가.
하얀 봉다리에 담겨져 있던 먹을 것들은 이미 땅바닥에 널브러져있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