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2주일이 지났다.
일은 생각처럼 쉽게 풀리진 않는다. 그녀와는 매일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다. 만나면 여자는 수줍은 듯이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쌤. 아무래도 천성이 원래 그런 듯, 다정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다. 멋쩍은 듯이 답을 한다. 어, 안녕. 파랑 쌤. 아무래도 천성이 원래 그런 듯,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녀가 그를 보며 피식, 하고 웃는다. 귀엽다. 언제 봐도 다시 보고 싶은 미소. 그렇지만 이를 표현할 수가 없다. 버스가 온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버스 계단에서 뒤뚱거리며 넘어지려고 하는 그녀를, 그는 재빨리 붙잡는다. 고마워요, 이렇게 칠칠맞아서야 어떻게 하겠나. 차마 이 말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이 사랑스러워.
버스를 타고 학원을 향해 달린다. 무슨 얘기를 재미있게 할 만한 말주변이 없다. 가끔씩, 詩에 대한 얘기를 할때면, 여자의 눈이 반짝인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쳐줄 뿐,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가끔 나오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상상 속 세계에 대한 아주 개략적인 이야기들 뿐이다. 그마저도 너무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이야기를 진행시키기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항상 그녀의 곁을 겉도는 듯한 느낌만을 가져야 한다. 상냥한 미소, 그 넘어로 그는 다가갈 수가 없다.
수업이 시작된다. 그녀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상당히 좋았다. 물론 수업 성취도의 측면에서는, 냉정한 그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바람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대체로 그녀의 수업을 좋아했다. 남자애들은 예쁘고 귀여운 여자 쌤이라서, 여자애들은 다정하고 상냥한 쌤이라서 그렇다고들 한다. 그렇게 말주변이 없는 여자라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는 못하지만, 이해할 수 있게 차근차근 설명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전개한다. 83의 수업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어쨌든 지금은 중간고사 시험 기간이니 어떻게든 지식을 부어넣어야 한다.
중간고사 시즌이다. 항상 숨 죽여 기다리는 가채점 결과. 결과는 다행히도 저번과 비슷비슷하다. 저번보다 좋아졌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말은 하지만 저번보다 떨어졌으면 당장의 밥줄이 위험해지는 상황이니, 그냥 그렇게 넘어갈 만한 상황을 그는 바라고 있다. 그녀로써는 당장의 상황에 적응하는 것도 바빠서 이 모든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그렇지만 항상 먼저 학생들을 챙겨주는 모습을,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물론 뒤에서.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내일은 오랜만에 쉬는 날이다. 오늘 밤은 회식이 있다. 술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83과, 그 누가 봐도 술을 잘하지 못하는 걸로 보이는 파랑은, 회식자리를 그닥 반기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부장 쌤이나 진 쌤 같은 경우는 술을 물처럼 마시는 사람들이니, 이런 오랜만의 기분 좋은 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학원 뒷골목의 고깃집에서 한바탕 신나는 소리가 벌어진다.
"자, 자, 오늘은 다들 마셔보장게. 그동안 다들 수고하셨어."
"쌤, 자 자 자... 여기 한 잔 받으세요."
"내는 술 몬하는 거 알면서 그라기가 ㅋㅋ 그래도 머, 오늘은 쪼까 마셔볼까."
파랑은 이 학원의 여자 쌤, 최 쌤과 류 쌤 사이에 앉아있다. 83의 자리에서 가깝다. 83은 자기도 모르게 흘끔흘끔 그녀를 바라본다. 딱 한잔의 술을 마신 것 가지고 얼굴이 새빨개져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미소를 짓고 있다. 역시. 83은 마찬가지로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소줏잔을 홀짝거린다. 최 쌤과 류 쌤은 쉴 새 없이 파랑에게 말을 걸고 있다. 둘 다 말 많고 기가 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근본은 다들 착한 사람이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파랑과 같은 겸손이나 부끄러움은 이미 없는 사람들이다.
"자, 자, 파랑 쌤, 여기 조금만 더 마셔봐. 응?"
"에... 저, 저는... 괘... 괜찮아요... "
"어라~ 취한 거 같네. 그래도 조금만 더, 마셔봐~"
억지로 한 잔을 들이킨다. 눈이 풀리우며 고개를 까딱까딱거린다. 여전히 말은 없지만, 이미 골로 갔다는 것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최 쌤과 류 쌤이 깔깔대며 웃는다. 그리고 파랑의 등을 토닥이며, 물을 건넨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왁자지껄한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진 않는다. 83은 왠지 오늘 따라 술을 많이 마시는 듯하단 느낌을 받는다.
순간, 눈이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에효, 이 사람은 생긴 거는 고량주를 나발 불 거 같은 사람이 왜 이렇게 술을 못 마시나 몰라요."
"워쩌것어, 이 나이 먹고 요로코롬 술 몬마시는 건 지 체질 문제지. 택시 태워서 보내야 것어."
"부장 쌤. 여기 파랑 쌤도 완전히 가버렸는데요 ㅋ 처음인데 너무 무리하게 마시게 한거 같아ㅋㅋ"
"워쩔 수 없구만. 같이 태워서 같이 보내부러."
"어머, 그래도 정말 되겠어요?"
"어차피 같은 마을이여 ㅋ 그리고 이건 여담인디, 이 둘이 왠지 사이가 좋은 거 같어 ㅋ"
"정말요? ㅋㅋ 와, 대박이다. 진짜 ㅋ 83쌤이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다니 ㅋㅋ"
"글쎄, 이라면서 다 듣고 있는거 아닌가 몰라. ㅋㅋ 어쨌든 태워 보내고, 우리는 2차로 가자고."
이런 니미. 미안하지만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렇지 귀는 제대로 뚫려있다.
"다들 뭔 소리를 하는 건교? 제가 저 쌤에게 머 어쨌다는 긴교?"
무심결에 고함을 치듯 뱉어내버렸다. 다들 놀란 듯이 쳐다본다. 상황이 안 좋다. 이럴 땐 취한 척이 필요하다. 원래 취했었지만. 그는 재빨리 완전히 취한 듯 의미 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한다.
"어따, 이 인간. 술 버릇이 안 좋구마잉."
"쯧쯧. 젊은 사람이 이러면 안 되는데."
영어 쌤의 말이 가슴에 꽂힌다. 하지만 주정뱅이로 찍히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들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게 낫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어쨌든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비틀거리며 그는 택시에 몸을 던진다.
"노량진, 노량진 고시촌... 입구 가입시다."
말을 마치려는 순간, 조그마한 짐승 한 마리가 그의 옆에 떡 하니 던져진다.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진채, 조곤조곤 졸고 있는 듯한 여자. 파랑이다. 귀엽다. 사랑스럽게 생겼다. 술김에 그러한 부끄러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빙빙 돌며 지나간다. 택시는 아무 말 없이 앞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으...응..."
여자가 정신이 드는 듯, 고개를 움직인다. 그러다가 문득, 왼쪽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머리를 기댄다. 몸을 숙인다. 마치 안기는 듯이. 그 모습이 아기같다. 술에 찌든 아기. 그래도 그 고요한 미소는 아기의 것처럼 포근하다. 남자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를 떼어놓으려고 하진 않는다. 그저, 여자가 남자를 향해 기댄 몸을 가만히 보듬어준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의 입가에는 쓸쓸한 미소가 피어난다. 이토록 따스한 가슴을 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 때문에, 그녀의 내면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왠지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