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이름은 블루. 파아란 하늘처럼 드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 그 하늘 한 가운데 반짝이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나를 감싸주는 사람. 그 아래 거울처럼 고요한 바다처럼,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람.
83은 나즈막하게, 이전에 적었던 詩 구절을 읊어본다. 거리에는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아래 간간히 희미한 가로등만이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다. 터벅 터벅, 밤길을 걸어간다. 왠지, 들뜨고 설레이는 기분이 든다. 그 여자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어. 그리고는 수줍은 듯이, 귀엽게 웃어주었어. 그는 그 답지 않게,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 답지 않다. 적어도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는 "그" 라는 사람 답지는 않다. 어쩌면 오랫동안 그 자신도 그 답지 않은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왠지 설레이는 느낌을 숨길 수는 없다.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앞으로 함께 일하면서, 나를 좋아하게 할 수 있는 걸까. 흐뭇한 상상 속을 헤메이다 어둠이 내리운 길에서 비틀거린다. 순간 담장에 몸을 부딛힌다. 어께가 얼얼하다. 툭, 툭.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길을 나선다. 멋적은 듯, 머리를 긁는다.
그렇지만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건데. 설령 좋아해지게 된다 해도 날 떠나버린다면 어떻게 할건데. 또 예전처럼 미친듯이 아프고 싶은거야?
문득 스치우는 생각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가슴 한 켠에서 무언가 울컥, 하는 거부감이 든다. 스스로를 어둠속에 파묻히게 하였던 그 거부감. 이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슴 깊숙한 곳에서 존재하는 암 덩어리. 폐나 간에 암이 생긴다면 의학적인 방법으로 제거해버리면 되겠지만, 마음에 생긴 암은 아직 의학적인 방법으로 제거하였다는 사례가 보고된 바 없다. 하지만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몇 가지 보고에 의하면, 마음에 생긴 암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해 치료하는 방법이 가능하다고 한다.
저 여자를 좋아해도 되는건가. 또 혼자 설레발만 치다가 혼자 죽도록 아프고 끝나버리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저 여자를 대해야 하는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싶지만 왠지 보호해주고 싶다. 사무적으로는 영 서툴지만 공상의 세계에서 그녀는 아름다운 여자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거지.
덜컹, 하고 낡은 대문이 열린다. 어김없이, 파아란 방에 들어온다. 어제 이 방을 나갔을 때의 83과 지금의 83은 왠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나 방은 그대로다. 형광등을 켜자 펼쳐지는 우중충한 빛의 파아란 바다.
깊은 어둠을 배경으로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 낡은 창문. 저 창문 너머 그녀는 지금쯤 옷을 벗고 있을까. 이건 무슨 개소리야, 하면서 피식 하고 웃는다.
더할 나위 없이 적막하다. 이 방에는 83이라는 생명체를 빼고는 그 어떠한 온기도 없다. 전기장판의 뜨끈한 열기만 빼면. 따스한 햇살이 들어온 적이 없는 방, 오직 얼어붙을 듯한 차가움과, 쓸쓸한 노을 빛만이 지배하는 방.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혼자만의 세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탈출하고 싶다. 탈출하고 싶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
방바닥에 놓인 [광장] 을 집어든다. 이 책에서 이명준이가 왜 마지막에 바다로 뛰어들었더라. 펼쳐서 확인하려고 한다. 문득 머리가 띵 하다. 책을 덮는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버린다. 대충 옷을 벗어던진 다음 침대에 눕는다. 불을 끈다. 어둠이 내려앉는다.
나라는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깊은 어둠이 드리운 파아란 방에서, 그는 나즈막히 중얼거린다.
그대의 이름은 블루... 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 나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람...
왠지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