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고시촌 입구에 차는 멈춰섰다. 83은 후, 하고 한숨을 쉰다. 덜컥, 하고 뒷문이 열린다. 자, 그라믄 가보겠십니다. 조심히 가세요. 공허한 말을 툭, 하니 뱉어낸 다음 육중한 몸을 차 밖으로 끄집어낸다. 겨울이 다가오려는 11월의 밤공기는 제법 싸늘한 맛이 있다. 그 탁한 어둠을, 크게 심호흡을 하며 들이킨다. 그를 깊숙히 침잠한 짙은 빛으로 자신을 물들여간다. 문을 닫아야지, 하고 그는 차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저, 저도 이만 가볼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녀, 원래 이 시간엔 항상 태워주는겨. 그나저나 파 쌤이 8 쌤이랑 같은 마을에서 사는 줄은 몰랐는디?"
"아, 그, 그게요... 며칠 전에 이 곳으로 이사를 와서요... 자, 그럼 진 선생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 그리고 8쌤!! 파 쌤좀 모셔주고 가시지 그래요? 저희는 그만 가볼게요~"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83의 앞에, 으쌰, 하고 여자가 차를 내린다. 탈칵, 하고 문이 닫힌다. 경차는 곧바로 어둠 속으로 떠나버렸다. 다시 이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83은 여전히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저... 선생님도 여기서 사세요?"
"예? 저, 저야 이기서 대학 댕길때부터 살았었지예. 한 5, 6년은 됐을깁니다."
"네... 저, 그런데 여기가 버스 정류장 입구 맞지요? 제가 여길 온지 얼마 안되서, 자,잘은 모르겠거든요.."
"그, 그라믄, 집이 어디쪽이신데예? 제가 모, 모셔다 드릴게예."
별 의미 없이 툭 하고 내뱉으려는 말인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는다. 이 어두운 밤길, 치안도 그렇게 좋지 않은 이 곳에서 여자 혼자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헤메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데려다주려는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이유 같은건 없다. 그러나 왠지 이 말을 마치 무슨 다짐하듯이, 스스로 되뇌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아니에요... 제, 제가 찾아 갈 수 있어요. 오늘 선생님한테 너, 너무 폐를 끼친 것 같아서..."
"아니오. 이왕 폐 끼치실 김에 한 번만 더 폐 끼치신다 치시고, 제가 바래다 드릴게예."
왠지 모를 단호함에, 그녀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를 보인다.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린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가만히 끄덕인다.
"저, 저... 그렇다면 조, 조금만 바래다 주실 수 있을까요?"
과도한 수줍음. 요즘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키가 더 크고 몸매가 좀 더 볼륨감이 있고 끼가 좀 더 많았다면 연예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성격을 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연예인은 못 될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마치 내가 이 여자를 좋아하는 듯이 생각하고 있잖아. 어, 언능 바래다 드리고 집에 가서 샤워라도 해야겠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어느 쪽이신데예? 집 있는 데가?"
"에... 그러니까~ 저기 L 합금 공장 건너편에서..."
자주 오지 않았던 골목을 걷는다. 이 쪽은, 그의 파란 방의 창문 맞은 편에서 바로 볼 수 있는 마을이다. 서쪽을 바라보는 창문 앞에는 L 합금 공장이 있다. 그 뒤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너머로, 늘 석양은 그 끝자락을 드리우며 저물곤 한다. 이 마을에 그녀는 살고 있는 건가.
새로 지은 듯한 오피스텔 앞에서, 그녀는 멈춰선다. 이 곳에서 그녀는 사는 건가. 베란다는 L 공장 쪽을 향해 나 있다. 그녀가 아침 햇살을 바라보면 내가 사는 곳이 보인다는 얘기가 되겠지.
"에... 제 집은 저 공장 건너편인데. 쌤은 바로 여기 사시는군요."
"헤에~ 저 건너편에 사세요? 그, 그럼 아침 햇살 아래 선생님이 사시는 곳이 드리워지겠네요."
어라. 말을 꽤 번지르르하게 한다. 역시 공상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빠삭한 면이 있는건가. 그렇다면 이러한 식의 대화를 전개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슬쩍, 딱딱한 그의 말에서 논리의 측면을 지워본다.
"그라믄, 저는 저녁 노을이 아스라이 저물어가는 걸 바라보면 쌤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게 되겠네요."
그녀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왠지 놀라는 듯한 표정, 그러나 부정적인 놀람은 아닌 듯 하다.
"와... 선생님, 말씀을 엄청 아름답게 하시네요. 마치 시인 같아요. 저, 정말 멋지세요."
순간 화끈, 하고 얼굴이 달아오른다. 흐, 흐흠. 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서 왠지 호감을 읽어낼 수가 있다. 그렇지만 사, 상당히 당황스러운 일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가 다시 새햐얘진다.
"아.. 예.. 고, 고맙십니다."
"저, 혹시 취미로라도 詩를 쓰시는 분인가요?"
"예? 뭐, 뭐... 그, 그렇기야 합니다마는..."
"헤에~ 정말이었구나. 왠지 선생님, 정말 멋지신 것 같아요."
"과찬이십니다."
"아니에요. 저, 정말이에요. 처, 처음에는 딱딱한 말만 하시는 분이신 줄 알았는데. 처, 처음이라 어리버리하기만 한 저한테도 이렇게까지 잘 해주시고... 저, 정말 고마워요."
가슴이 쿵쾅쿵쾅 뜀을 느낀다. 수줍어하는 여자가, 흠칫, 스스로에게 놀라는 것을 바라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불안하게 맞잡는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여자가, 더듬더듬 말을 한다.
"죄, 죄송해요. 제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이, 이상하게 해서 기분 안 좋으셨나요?"
83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라고 말을 하려다가, 문득 그만둔다. 기분이 안 좋은게 아니라 참을 수 없을만큼 이상하다. 무언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잠시 아무 말이 없자, 여자는 정말로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쌤, 괜찮으시다며는, 내일부터 같이 학원에 출근하시겠십니까?"
"예?"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 앉는 듯한 표정으로, 여자는 남자를 바라본다. 자연스러운 쌍꺼풀이 있는 눈두덩이를, 1초에 수십번은 넘게 깜빡거리고 있다.
"그냥, 이제부터 계속 신세지게 될기고, 가, 같은 마을에 살기도 하니까..."
"아...."
여자의 얼굴이 새빨개진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만큼, 두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울 것 까진 없는데. 남자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저, 정말 그래주신다면... 저로썬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릴 일이에요... 여, 여긴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학원 일도 뭐가뭔지 아무 것도 모르는데... 저... 정말 고마워요..."
"감사해하실 필요 없심다. 저도 많이 적적하기도 하고예. 자, 그라믄 내일 4시까지 버스정류장으로 나와주시면 됩니더."
"네, 꼭 시간 맞춰 나갈게요... 저, 그, 그리고... 이제 말씀... 나,낮춰주세요. 제가 쌤보다 훨씬 나이도 어린데..."
말씀을 낮추라는데 선생님이라고 안 부르고 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지만 왠지 귀여운 어조다. 쌤.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뭐, 그래도 좋다카면... 그럼 파쌤, 내일 봐."
"예~ 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남자는 휙, 하고 뒤돌아 선다음, 오른 손을 가볍게 어께 위로 올린다. 그리고는 터벅, 터벅,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여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 여자는 남자의 외모는 안 보는 걸까. 험악한 외모라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는 83은, 자신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는 귀여운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의 표정은 험악함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어른이 된 이후 처음으로, 그는 아무 가식적인 목적 없이 싱긋 하고 웃고있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