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공기가 차갑다. 새벽 1시. 밤 10시부터 두 시간을 연속으로 사회탐구 영역에 대한 보충 수업을 했다. 사회탐구 영역은 원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취업을 위해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복수 전공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주 관심사는 전공 과목에 집중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에 대해서 그는 단편적인 지식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랑, 이라는 말. 무미건조한 지식의 나열을 뱉어내던 두 시간동안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말이다. 왜 나는 그때 저 여자에게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 못한 것일까.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하기나 하는 걸까.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아니, 혹시 안다고 할 지라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그런 황당한 일따위,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해서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의 논리나 이성은, 얼핏 보면 꽤 완벽한 것 같지만 실은 결함 투성이었다. 어떤 면에서, 83은 가장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 감정이 심각할 정도로 오염되고 왜곡되어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
그렇다면 어쩌면 가슴 깊숙히 남아있는 상처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생채기가 다시 도져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왠지, 도려내지고 싶다. 가슴이 미치도록 아프고 싶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지금. 차라리 아팠다면, 아팠다면. 썩어가는 것 보다는 차라리 미치도록 아팠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장 쌤이 뒤뚱거리면서 계단을 내려온다. 밤 12시가 넘으면 항상 부장 쌤의 차를 얻어타고 돌아간다. 택시비를 감수할 만한 용기가, 그의 지갑에는 없었다. 이런 시험기간이라면, 아마 이번 주는 계속 신세를 지게 될 것 같다.
나머지 40대를 넘기신 쌤들은 다들 자기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고, 차가 없거나 83처럼 인턴들은 이 차를 타고 집이 있는 곳까지 간다. 저 멀리서 젊은 수학 쌤 한 사람이 내려온다.
"어~ 83쌤~ 쌤도 오늘 밤샘 뜄어여?"
"진쌤 아니가 ㅋ 내도 오늘 좀 달렸제 뭐, 우야겠노. 사탐을 할 사람이 없는데."
"이번에 새로 쌤 한분 오셨다면서여? 쌤도 이제 좀 편해지겠네여 ㅋㅋ"
"그랐으믄 조켔는데~. 그 쌤, 아직 어려가꼬 그라는진 모르것는데, 이 바닥에 적응을 몬하는 거 같드라."
"에이~ 제가 보니 귀엽게 생겨서 인기 좋을 거 같던데요~. 쌤이 도와주는거 맞죠?"
"우야겠노. 도와줘야제. 뭐..."
"이야~ 쌤 혹시 봉 하나 잡는거 아녜요?"
"에헤이~ 진 쌤 오늘 와이라카노? ㅋㅋ"
활달한 성격의 젊은 쌤이다. 지나치게 착하고 순진하다는 단점 때문에, 나쁘지 않은 대학을 나왔지만 결국 학원가로 흘러들어왔다. 이 세상에서 착하고 순진하다는 것은 분명히 크나큰 단점이다. 착하고 순진한...? 문득 여자가 걱정이 된다.
"근데 그 쌤, 언제 퇴근했노?"
"글쎄요, 한 열한시 쯤에 나가던거 같은데여. 아, 저기 부장쌤 차 끌고 오신다."
조그마한 경차 한대가 학원 정문 앞으로 오고 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하다. 뒷좌석에 한 사람이 더 타있다. 응? 어디서 사람을 태울 일이라도 있나?
차가 가까이 다가오고, 끽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춘다. 운전석 측 문이 열리면서, 동시의 그 바로 뒤의 문이 하나 더 열린다. 두 사람이 내린다. 83과 진 쌤은 거의 동시에 어, 하고 나즈막한 비명을 질렀다.
뒷좌석에는, 파랑이 타고 있다. 오늘 새로 왔던 여자, 그를 보며 수줍게 웃던 여자.
"어? 쌤, 아직 퇴근 안하신거예요?"
"아... 저... 그,그게... 그게 말이에요..."
어둠 속이라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얼굴이 새빨개졌을 거라고 추측한다. 앞에 내린 부장쌤이, 이를 눈치챈 듯 재빨리 말을 끊는다. 그리고 그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잇는다.
"워매, 오해하지 말랑게. 쌤이 여기 지리를 잘 몰라가꼬 지하철 역을 찾다 헤메다가 길을 잃었다라냐. 시방 그래서 지하철 막차를 놓쳐버렸다길래, 나한테 전화가 와부럿어. 그래서 데리고 온거여."
하아, 83은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한숨을 쉰다. 왠지 정말 어리버리한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든다. 입술을 삐죽인다. 그 모습을 진 쌤이 지켜본다. 피식, 하고 젊은 사람이 웃는다. 덩치 큰 남자가 흘낏, 노려본다. 젊은 사람이 약간 당황한듯, 하하 하고 웃으며 말한다.
"쌤, 혹시 뭐 걱정하신거 아녜요? 이거 진짜로... ㅋㅋㅋ"
"먼 소리를 해쌓노? 쓸데없는 말 하지 마라."
당황하면서 화를 내는 83을 보고, 진 쌤도 약간은 수그러든다. 그렇지만 왠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자신도 모른 걸 다른 사람이 깨닫는다? 83은 약간 기분이 나빠진다.
"자, 자 그라면은 다들 타랑게. 내도 언능 자부러야 하니께."
피식, 하고 웃으며 진 쌤은 잽싸게 조수석에 턱, 하니 앉아버린다. 그리고는 뒤뚱 거리며 부장쌤이 운전석에 탄다. 남은 두 사람은, 185cm와 155cm의 크기를 가진 당황하는 두 마리 짐승들은, 순간 어쩔 줄을 몰라한다. 서로를 흘낏, 바라본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황한 듯, 시선을 급히 돌려버린다. 83은 쩝, 쩝 하고 마른 침을 삼킨다. 파랑은 그저 발 끝만 보며 두 손을 불안한 듯 맞잡고 있다.
"어따, 거기 시방 안타고 머하는겨? 언능 타랑게."
부장 쌤이 소리를 지른다. 왠지 유쾌한 듯한 느낌이 든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거야, 저 사람들. 그렇지만 남들이 오해를 사도 충분하지 않을까. 83 정도의 나이를 먹은 남자가 그깟 여자 하나때문에, 사춘기의 녀석들처럼 쩔쩔맬 일은 없다. 저 여자는 원래 매사가 저런 식인 것 같지만.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렇지만 밤 늦게는 사람의 정신이 제대로 들지 못하는 모양이다. 경차의 문을, 덜컥 하고 연다.
"자, 자. 파랑쌤. 언능 들어가세요."
"예? 아, 예.... 고, 고마워요..."
그도 옆자리에 털썩, 하고 앉는다. 부르릉, 하고 차는 출발한다. 83은 왠지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자그마한 생명을 바라볼 수가 없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면 안 되나? 힐끔, 하고 쳐다본 그녀의 얼굴색은 상기되어 있다. 다시 흠칫, 하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린다. 차창 밖 흘러가는, 야경 위로, 비쳐진 그의 얼굴이 비춰진다. 왠지, 얼굴색이 상기되어 있는 것 같다. 순간, 깜짝, 하고 놀란다.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의 비춰진 모습의, 그의 눈동자는 꿋꿋함을 보이고 있었다. -夕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