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그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앉아있다.
짐짓 괜찮은 척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또 다른 한 손으론 커피잔을 들고 있지만
바르르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속눈썹만큼은 감정을 숨길 수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오후다.
그녀가 앉아있는 카페 건너편에는 횡단보도가 있고 그 위에 촘촘히 몇몇 사람들이 서 있다.
그저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낯선 이들과는 아무런 이야기를 섞지 않겠다는 듯 보인다.
그들과 그녀를 양 옆으로 두고 색색의 자동차들과 버스들이 오고 간다.
멀리선 사고소식을 전하는 앰뷸런스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거리마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 속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녀로 돌아오자.
괜찮은 척 했지만, 그리고 괜찮은 척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식어버린 라떼를 한 모금 들이킬 때 마다
목은 타 들어 가고 심장은 벌렁거리다 못해 튀어나올 것만 같다.
3월 22일, 지극히 평범한 일상.
누군가의 생일, 누군가의 결혼기념일, 누군가의 100일, 누군가의 제사, 누군가의 장례식-
그녀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25살의 그녀가 감당해내기에 그 일은, 그 결정은 어려운 듯 하다.
6개월 전, 그녀는 변화를 원했고 그는 자극을 원했다.
그런 둘이 만나 사랑을 했고 그녀의 일상은 변했다.
아니, 변해버렸다. 그를 만나고 난 후.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성에 대해 늦게 눈을 떴던 그녀다.
스무살이 되기 까지 연애라고는 해본 적도 없고 그만큼 남자도 몰랐던,
그보다도 감정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어설픈 관계의 끝자락에서 맴돌았던 여자다.
그녀가 스무살 무렵, 한 남자가 물었다.
키스가 처음이냐고.
그녀가 스물네살 무렵, 한 남자가 물었다.
어떻게 아직까지 경험이 없을 수 있느냐고.
그런 그녀가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얼떨결에 연애를 시작했다.
사실 연애라고 이름 붙이기도 뭣한,
이제와 돌아보면 그저 파트너적인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은,
그 모든 관계가 끝나고 난 후 뒤돌아보니 결과론적으로 대단히도 모호하고 안쓰러워서
아무런 비난도 섞이지 않은 손길로 다독여줘야 할 것 같은 그런 연애였다.
다시 카페.
중년의 여자가 머그잔 가득 찰랑이는 커피를 들이키고 있다.
그리고 길게 한 모금.
어쩌면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제대로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맞은 편에는 20대 여자가 후드 티셔츠를 깊게 눌러쓰고 문제 풀기에 열중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담배 두 갑.
그녀는 자신을 비롯한 모두가 지독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녀 역시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가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는 이내 서글픈 표정으로 담배를 비벼 끈다.
“임신 5주차예요.”
“수술해주세요.”
“네?”
그녀는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입술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던 산부인과 여의사를 떠올린다.
진단이 끝나기 무섭게 떨어지는 그녀의 대답에 당황하던 모습도 함께.
그녀는 자리에서 바로 수술 날짜를 잡고 뒤돌아 서서 나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5일이 흘렀다.
이제, 내일이다.
병원을 나오면서 그녀는 곧장 빵집으로 향했다. 그리곤 크림이 잔뜩 묻은 롤케익을 골랐다.
평소에 즐겨먹지도 않았던 롤케익을 사 들고 집으로 향하면서 그녀 스스로도 의아해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롤케익을 먹어 치웠다.
그녀는 조금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그에게 연락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온전히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였다.
부정할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을.
하루를 앞두고 그녀는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그가 조금이라도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른 결심을 했을까?
이제라도 그에게 모두 털어놓는다면 어색하고 불편하겠지만 결혼을 하게 될까?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차라리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어쩌다 관계가 이 지경에 까지 이른 걸까?
왜 그를 만났을까?
오후 2시 반, 어느 카페에 그녀가 앉아있다.
따뜻한 햇살을 온 몸으로 내려 받을 수 있는 창가 자리에 그녀가 멍하니 앉아있다.
입술 가까이 가져갔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는 자신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3월 22일,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오후다.
-------------------------------------------------------------------------------
문사에 오면 언제나 '오랜만입니다' 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또 오랜만이네요!
언제나 경험과 감정을 풀어내는 일은 쉽지가 않아요.
직접적인 경험이든, 간접적인 경험이든-
혹은 가슴에 콕콕 박힌 감정이든 스쳐지나간 감정이든지요.
다시, 봄.
어쩐지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