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st
디지털시계는 AM 12:00 을 가르키고 있었다. 오늘만은 꼭 휴가를 잘 이용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일어난 교통사고로 환자가 밀물처럼 쳐들어오는 바람에 손꼽아 기다리던 휴가는 물커품이 되고말았다. 오늘만큼은 무슨일이 있더라도 놀기로 다짐했었는데. 설날 휴가 앞당겨서 쓴거였는데. 이번 설에 나갈 수는 있으려나 모르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내일 잡혀있는 수술에 대해 고민하며 숙소로 올라가던 차에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또 교통사고기만해봐, 다 때려부술꺼니까.
"김교수님!"
"어? 뭐야. 응급실은?"
헐레 벌떡 달려와 나를 애타게 불렀던 사람은 이번에 갓 들어온 신입 인턴이었다. 내가 필요할땐 레지던트나 chief*를 부르라고 했는데 또 나를 찾아온걸 보면 아직 정신을 못차렸구나.
*chief-과에서의 레지던트 중 우두머리.
"선생님 지금 빨리 응급실로 가셔야겠어요. 환자가 실려왔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뭐? 인턴이 그런것도 아직 못해? 어떤환잔데."
"실은 10분 정도 전에-. 그보다 어깨쪽에 칼을 맞았는지 Bleeding*이 심한데요. 어떻게 해요? dressing*부터 해야할지 잘모르겠어서…."
*Bleeding-출혈
*dressing-소독
"미쳤어? 네가 그러고도 인턴이야? 당장 dressing*부터하고 레지던트를 불러서 간단한 operation*을 하던가 suture*를 하던가! 그것도 못하겠으면 haemostasis*이라도 했어야 했을꺼 아니야! 그러다가 arteriaf*라도 잘렸으면 어떻게 수습할껀데! 그나저나 그 옆에 아무도 없는거야?"
*dressing-소독
*operation-수술
*suture-봉합
*haemostasis-지혈
*arteriaf-동맥
"예? 예…. 지금 다들 레지던트 선배나 교수님들 찾으러…."
"너네 진짜!! 환자 옆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자는거야! 누군가는 옆을 지켜서 상황을 지켜보고 primeros auxilios*라도 해야지!!"
*prineros auxilios-응급조치
"죄, 죄송합니다…."
"됐고 빨리 앞장이나 서."
"예?"
"가야될것아니야!!"
*
"맥박."
"72로 정상입니다."
"신기하네. 이정도 상천데도 맥박이 정상이고. 대단하다. 아무튼 내과로 consult*할 필요없어. 하려면 NS*로 하고. 혹시 신경다쳤을지 모르니까. 미루지말고 오늘 당장해. 아, 그리고 그냥 내과 인턴 잡아다가 간단한 진통제 놔달라고만하고. 얼른 haemostasis*안해?"
*consult-협의 진료. 요청하면 다른과에서 와서 봐주는것.
*NS-신경외과
*haemostasis-지혈
"네."
실려온 사람은 우락부락한 조직원같은 사람일꺼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실려온 사람은 168정도 되는 키에 우락부락하기보단 그냥 건강해보이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상처에서 부터 밀려오는 고통때문에 잔뜩 일그러져버린 얼굴만 빼고는. 상처는 상당히 컸다. 인턴들이 벌벌떨정도로 벌어진것이다. 수술까지는 필요 없어보였지만 저 정도면 정신을 부여잡고 있기에는 힘들정도로 아파보였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arteriaf은 피했기에 망정이지 않그랬다가는….
"신원확인은 됐어?"
평범한 여자와의 차이라면 그냥 입은 옷이 흔히들 우리가 보는
"본명은 최아라. 보호자 분께 물어보니 강력반 형사라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요 근처에 인질사건이 있었는데 범인한테 당했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리고 보호자분께서 지금 사건해결때문에 가봐야한다고 하셔서 지금은 안계셔요."
형사였다.
"하아-. 알겠어. 어깨 상처보니까 emergency OP*들어가야 겠다. 레지던트나 chief불러서 하도록해. 그건 너네들끼리도 충분하니까. 이 환자 입원시키도록하고."
*emergency OP-응급수술
"네, 들어가세요."
"어. 그리고 이런일 있으면 chief를 찾아. chief도 나름 능력있거든? 그러니까 바쁜 사람 붙잡지 말고."
"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다는듯 고개를 푹 수그려버리는 인턴을 보면서 나름 용서한다는 표시로 입꼬리를 살짝 올려주고 등을 돌렸다. 아씨, 괜히 흥분했어. 아까 인턴한테 소리도 좀 지르고 응급실로 뛰고, 특히 칼맞은 환자라고 하는 바람에 우락부락한 형님인줄 알고 괜히 쫄아가지곤 잠이 다 날아가 버렸다. 젠장. 이제 어떻게하지. 잠도 안오고. 응급실도 한산해 졌는데.
"아이구, 우리 김교수님!"
"아. 안녕하세요."
기분이 나빠져서 인상을 찡그리고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병원 청소부 아주머니가 인사를 건네왔다. 흔히 있는 일이라서 그냥 꾸벅 인사를 하며 지나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이러시면 안돼요! 가만히 계세요!"
"이거 놔!"
비명이 들리는 쪽에서는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별 다른점 없이 기절해 있던 그 형사 환자가 난동을 부리는 것이다. 뭐야, 이거. 인상을 찡그리고 앞에 서계시던 청소부 아주머니를 보니 뭔가 잔뜩 걱정된다는 눈빛이었다.
"아, 저기. 아주머니, 저쪽은 지금 들어가시면 안될꺼같은데요. 내일 오세요, 그냥."
"아, 아니. 그게아니라…"
"안녕히가세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하며 환자쪽으로 뛰어갔는데 이미 그 여자는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뭐야, 어디갔어?"
"그, 그게…. 잡으려고 했는데요, 갑자기 링거줄을 뽑고 달려나가시는 바람에-."
결국 환자를 놓쳤다는 얘기잖아.
"하아. 그냥 보호자분께 연락드려. 나 피곤해. 그냥 환자 도주했다고, 잡으려고 노.력. 했지만 놓치고 말았다고. 그렇게만 전해."
"예."
뭐 이런 환자가 다있나 생각하며 간호사가 건네주는 차트를 들고 숙소로 향했다. 젠장, 벌써 1시 반이라니. 숙소로 들어와 문을 꼭잠그고 잠도 깬겸 샤워를 하기위해 샤워실로 들어왔다. 한참을 씻고 나와서 침대쪽으로 가 누우니 온 몸이 노곤했다. 아침7시부터 12시까지 전쟁같이 하루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그 이상한 환자의 도주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 상처를 달고도 멀쩡… 할리가 없잖아! 노곤해졌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내가 미쳤지. 그정도 상처이면 출혈도 심할텐데! 그냥 보내고, 미쳤지, 김현우. 노곤했던 감이 확가셨다. 젠장, 오늘 잠 다잤네. 결국 잠은 포기하고 환자를 잡으러 가기위해 코트를 집었다. 바지가 볼품없기는한데…. 일단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까!
"어? 그 복장으로 어디가세요, 교수님!"
"그 도주한 환자 잡으러-."
"교수님!!"
코트를 입으면서 숙소에서 달려내려오자 당직이었던 인턴이 크게 소리를 질러왔다. 내가 병원에서 소리지르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쳤는데! 일단은 무엇보다 아까 그 환자가 급했기 때문에 keep해두기로 하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차를 타고 병원앞으로 나왔는데, 나오긴 나왔는데… 어디로 가지? 상가들도 다 문을 닫아서 갈곳도 없을테고 분명히 멀리 가지도 못했을 텐데. 시계를 보니 3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미쳤어. 이러다가 과다 출혈로 죽고싶은건가? 이 새벽에 출혈심한 환자를 찾겠다고 온 동네를 휘졌고다니는 나나, 그렇게 상처가 심하면서 무작정 달려나가 버린 그 여자나. 정말 왜이렇게 한심하지. 하아- 한숨을 푹 내쉬고 찬찬히 갈만한 곳을 뒤져보자는 생각으로 일단 가까운 공원부터 가보기로 했다.
"하아. 그래, 여기 있을리가 없지."
한적하다 못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공원을 보니 답답해 미칠것같았다. 아까 피를 줄줄흘리던데 지금까지 눈뜨고 서있기나 할까. 일단 나는 의사니까 어떤일이 있어도 환자를 살려야한다. 하, 내가 의사만 아니었으면 이 고생은 안하는 건데. 일단은 다시 차에 올랐다. 이 동네에 공원은 이 곳 밖에 없고, 상가는 연 곳도 없으면… 길가 혹은 편의점이란 말인데. 일단은 차를 몰고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 쪽으로 이동했다.
"어!"
막 편의점에서 나오는 여자가 보였다. 하얗던 와이셔츠는 보기흉하게 피에 흥건하게 졌어있었고 머리는 이미 땀에졌어서 얼굴에 찰지게도 붙어있었다. 걷는게 조금 힘겨워 보이기는 했으나 내가 걱정한 것 과는 다르게 두 눈도 뜨고 있었고 두 발로 서 있었다. 여자가 나오는게 걱정이 되는지 편의점 알바생이 조금씩 부축해주는게 눈에 보였다. 여자가 보이자마자 걱정했던게 내려가기도 하고 화가 조금씩 올라왔다. 내가 지금 누구때문에 이렇게 찾고있는데 저렇게 뻔뻔하게 편의점을 갔다올 수 있는거지. 그럴정신은 있는거냐고! 화가 조금 나기도 해서 바로 편의점 앞으로 차를 가져다 대고 차에서 내렸다. 씩씩거리며 차에서 내리자 여자가 뭐냐는 눈으로 나를 흝어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른곳으로 가려고 했다.
"이봐요."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한다고, 부모들은 그렇게 가르치는데 대체 왜 나를 무시하는지. 약간 오기가 생기기도 해서 다치지 않은 쪽 팔을 잡고 돌리자 여자가 힘겨워 보이는데도 두눈을 잔뜩 찡그리고 바라봤다. 고통으로 일그러진게아니라 성가시고 짜증나서 일그러지는 그런 얼굴로.
"이거 놓으시죠."
"병원으로 갑시다. 그렇게 하고 돌아다녔다간 과다출혈로 죽어요."
"어쩌라고요."
"가서 상처치료하고 그렇게 나오세요. 동맥은 멀쩡한데 신경이 다쳤을지도 몰라요."
싸가지 없이 툭툭내뱉는 여자의 말에 꾹 참고 이를 악물고서 대답하자 여자가 물끄러미 보다가 픽- 하고 웃는다. 웃겨? 이게 웃기냐고.
"그쪽이랑 상관없잖아."
"상관은 없는데 내가 의사라서 이런꼴은 못보겠는데요. 그러니까 같이 가죠, 병원."
"싫어요. 더더욱이 그쪽이 못볼꼴이라면 계속 이러고 싶은데요?"
뭐, 뭥메. 이 쌩또라이같은 여자는. 내가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바로 팔을 빼려는듯 힘을 주는데 이거 힘이 장난이 아니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힘이 쎈지.
"아, 진짜!"
짜증에 못이겨 소리를 지르자 여자를 올려다 보았다.
"가자고! 좀! 그 쪽 때문에 잘려다가 뛰쳐나온 이 의사 좀 생각해 달라고! 내일 수술도 잡혔는데 그쪽때문에 오늘 꼴딱 날밤 새게 생겼잖아!"
"그럼 두고가면 되잖아."
"하! 나 의사라고! 이 대한민국 어떤 의사가 환자를 그렇게 내버려두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여자가 말을 하려다 만다. 그래서 이제 가겠구나 싶어 잡아끄는데 또 버틴다. 와, 진짜 고집쎄네. 어디 해보자 이건가?
"가요, 가자고요, 좀!! 치료비 때문이면 안 받을께, 그럼 됐지? 갑시다, 가자고!!"
진짜 환자 병원 데려가려고 이런 짓 하는 의사가 또 있을까. 여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성가시거나 짜증이 난게 아니다. 화가 단단히 나서 눈물까지 북받쳐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당황해서 팔에 힘이 빠지자 바로 팔을 빼버렸다. 그래도 상처 때문에 힘이 빠져서 도망은 못가고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왜요?"
"저, 병원 안간다고요. 치료 안받겠다는데, 난 괜찮다는데 진짜 왜 이래, 나한테."
정말 적절하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말하는데, 어쩜그렇게 요점만 콕콕 찝으시는지. 아, 그러니까. 그러보니까 제가… 왜…. 딱히 대답할께 없어서 머뭇머뭇거리는데 여자가 그만 가보겠다며 등을 돌렸다. 이대로 보내면 안돼는데, 저렇게 보내면 정말 상처 크게 덧나는데. 걱정은 되고 딱히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는데 의사가 억지로 치료할 수 도 없는거고.
"저, 저기!"
뒤도 안돌아보네, 나쁜인간 같으니라고.
"그거 덧나면 팔 잘라야되요. 팔자르면 안되지 않아요, 형사인데? 그니까 팔 자르기 싫으면 따라오라고요! 팔장애된 형사는 싫잖아!!"
오케이, 걸려들었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달려가 여자를 붙잡았다. 아까 내가 했던말이 효과가 있던 건지 여자가 얌전히 따라왔다. 조수석에 여자를 태우고 운전석에 앉자 여자가 나를 흘끗 본다. 미안하기는 한가보지.
"후아-. 이렇게 따라오면 좋았잖아요! 이제 좀 맘이 편안하네, 갑시다."
다시 병원에 돌아와서 여자를 수술까지 하고 나니 이미 6시. 젠장, 수술있는데 날밤을 꼴딱 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