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 3]
모든 것이 바닥난 뒤에도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의 취향만은 기억으로 남아 되새겨지리라는 것이 별로 산뜻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김민숙 ‘시간이 마술을 걸어온다면’ 중에서-
17살 혹은 18살 때쯤이었나. 씨앗이 되고 싶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라면 좀 더 작게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서 보잘 것 없는 씨앗이 되고자 했다. 그럴 수만 있으면 가벼워진 내 몸을 바람에 실어서 훨훨 어디로든 정처 없이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 바람이 끝나는 자리에, 그 바람이 머무는 자리에 나도 멈춰 서서 또 다시 새롭게 뿌리를 내리리라.
“언제 한번 보자.”
“뭘?”
“뭐긴 뭐야, 니 남자친구 말이지. 남자는 남자가 봐야 돼.”
“아…….”
“아?”
“물어볼게.”
종원을 만나기로 한 지 2개월쯤 지났을 때 형석에게 전화를 걸어 남자친구가 생긴 사실을 통보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형석은 다짜고짜 만나기를 원했다. 남자는 남자가 봐야 잘 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휴대폰 너머로 나의 근심어린 걱정과 한숨이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모든 연애에는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첫눈에 반했다거나 혹은 열렬한 구애 끝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이끌려 그를 만나기로 했다는 이야기. 또는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게 되어 오래도록 마음 고생했지만 결국 모진 비난을 이겨내고 둘만의 사랑을 키웠다는 러브스토리 같은 것 말이다.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반을 둔 픽션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에게 해줄만한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 다만 그가 나쁘지 않았고‘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만나게 됐노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형석에게 쉽게 그러겠노라 대답하지 못했던 더 큰 이유는 이따금씩 그에게 연락이 잘 닿지 않는데 있었다.
변하는 건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대로 계속 똑딱똑딱 시간만 흘러갈 뿐 그 어디에도 변화란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어떠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 혹은 반응하지 못한 채 무의미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별다른 재미를 찾을 수 없었고 특별한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종원을 만났다. 연애를 하고 싶었다기보다 또는 남자가 그리웠다기보다 그저 약간의 휴식과 재미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과 만나고 헤어진 뒤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의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쩌자고 그렇게 주저앉아 버렸을까. 주저앉아버렸다는 표현 이외에는 그때의 나를 더 설명할 수 없다. 왜 홀로 버틸 생각은 못하고 누군가를 찾아 그렇게 헤매야 했을까.
그를 처음 만난 날 5월 23일. 막 퇴근을 하고 온 참이었는지 정장 차림의 그는 꽤나 말쑥했다. 다소 지친 모습이 보이긴 했지만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맘 때쯤 뭔가 재밌는 일을 찾아 방황하던 중이었다. 익숙하게 만나오던 사람들이 아닌 낯선 사람들을 만나면, 뭔가 신선한 자극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이곳저곳 모임에 기웃거렸다. 동네 뒷산도 오르기 힘들어하면서 산악회에 가입하기도 했고 활동이 많은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에 가입하면 뭔가 에너지를 좀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가입하기도 했다. 또 직업적인 측면을 살려 번역 카페에 가입하기도 했고 조금씩 소설을 써서 웹사이트에 올리는 게 취미라는 이유로 창작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결국은 아무 곳에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가입만 된 채 잘 찾지도 않는 유령회원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찾은 2,30대 친목 모임에서 종원, 그를 만났다.
솔직히 말하면 다소 투박했던 손 이외에는 그의 첫인상이 남아있질 않다. 그가 오기 이전에 이미 나는 거나하게 취해 있기도 했지만 딱히 내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특별한 무언가가 더 이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론 웃으면서도 속으로는‘오죽하면 이런 모임에 나와 인맥을 쌓으려고 하냐’는 비아냥거림 속에 섞인 남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말이 좋아 친목도모지 그냥 술과 사람이 좋아 만나는 모임이었다. ‘몇 살이세요? 어디 사세요? 무슨 일 하세요?’와 같은 신상정보 조사가 끝나고 나면 공감대를 형성할만한 주제거리를 찾지 못해, ‘한 잔 할까요?’라는 말과 함께 어색하게 소주잔과 맥주잔을 부딪쳤다. 계속되는 불편함과 어색함에 누군가는 자리를 먼저 떴고 누군가는 하릴없이 그 자리에 남아 건배를 반복했다.
도대체 몇 잔쯤 마신 걸까. 시간은 또 얼마나 흐른 걸까. 눈을 떠 정신을 차렸을 때 묘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고개를 돌려 옆을 봤을 땐 종원이라며 자신을 소개하던 그 남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쌕쌕 숨소리까지 내며 잠들어있는 모습이라니. 어디서부터 기억을 해내야 좋을지 몰랐다. 그를 변태로 몰아세울 것인가? 혹시나 그럴 리 없겠지만 내가 먼저 그를 끌어들였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하는 걸까? 침대에 누운 채 꼼짝 않고 눈만 껌뻑거리며 천장을 바라봤다. 어디까지 기억을 할 수 있는 건지 또는 언제까지 내가 멀쩡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뒤통수에 대고 쿵쿵 쿵쿵 주먹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머리에서 심장이 뛰고 있었다. 결국 나는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일어났어?”
분명 조심히 일어난다고 일어난 것 같은데 그 남자가 잠에서 깨더니 물었다. 혹시 아까부터 일어나 있었을까?
“네? 아뇨 그게 아니라…….”
“지금 몇 시지? 아직 5시네. 더 자.”
그 남자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침대 맡에 놓아둔 손목시계를 들어보더니 말했다.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게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남자는 모두 다 기억하고 있는걸까. 맙소사, 나는 그제야 상황이 인지되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가 먼저였던지 혹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덤벼들었던지 간에 나는 낯선 남자와 한 방 한 침대에 누워있던 것이다.
“저기……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지금 아무 것도 생각 안 나거든요.”
“아무 것도?”
“네.”
“일단 좀 자자. 졸려.”
근데 우리는 언제부터 말을 놓은 걸까.
“저기요. 근데 아까부터 왜 반말하세요?”
“언제는 또 말 편하게 하라더니.”
“아…….”
아직 해도 뜨지 않아 희미한 방 가운데 거울 속에 속옷만 걸친 채 멍하니 앉아있는 여자가 있었다. 일단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 술이 덜 깬 상태에서도 한숨과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뭔가 떠올릴 수 있을만한 말이나 행동이라도 있었으면!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해도 시작을 알 수가 없으니 이야기가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벌써부터 친구들에게 들을 잔소리가 걱정됐다. 결국엔 내 편에 서서 나를 옹호해주겠지만, 나의 어리석은 행동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혼날 각오는 해야 했다.
“이리와. 그렇게 앉아 있는다고 사라진 기억이 돌아오진 않아.”
그 남자가 나를 끌어당겼다.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더니 눈도 뜨지 않은 채 내 팔을 잡아당기고 있는 그 남자가 보였다. 그래, 그 손이었다. 오래도록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었던 모습. 상처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던, 그래서 너무나도 투박스러웠던 그의 손. 그래서 더더욱 잊을 수 없었던 그의 손.
유일하게 기억이 아닌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의 손 말고는 사실 나는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좋을지 아직까지도 잘 모른다. 언젠가 이른 아침 장난을 치다 부딪친 얼굴에 입김을 불어주는 나를 보며 씨익 웃어주던 그 남자로 기억해야할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연락도 없이 사라져 버리며 미친놈 소리를 들어야했던 그 남자로 기억해야 좋을지. 나는 여전히 기억을 선택하지 못해 갈팡질팡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어디에나 남아있었고 그는 이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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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문득,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서
내가 그의 이름을 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었어, 라고 말해야할지.
아니면 내 연애사 중에 최악의 남자였어, 라고 말해야할지.
아직도 이렇게 확고하게 판단이 서지 않는 걸 보면,
이따금씩 그 사람이 그리운 걸 보면,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부디 그의 거짓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