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 2]
인연을 끊겠다는 사람일수록 마음 깊이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다.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을 찾는 것이 인간이 견뎌야 할 고독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은희경‘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중에서-
1년이 지난 지금에도 한 번씩 그 사람이 생각나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휘몰아친다는 표현이 옳을까 아니면 덮친다는 표현이 옳을까. 모른 채 외면하고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나에게 덤벼들면 그 감정을 어떻게 주체해야 좋을지 몰라서 꺽꺽 대며 울었다. 어쨌거나 내 일이었으니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었다. 그래서 한 번도 맘 편히 울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 속 시원히 이야기를 털어놓지도 못했다. 스릴러 영화를 보다가도 그 사람 생각에 울컥 했고 길을 가다가 닮은 사람을 만나면 다가가서 소리쳐야할지 아니면 그대로 도망가야할지 고민하다 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문제는 이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데 있었다.
“나야. 휴대폰으로 전화했었어.”
“그래?”
형석은 아무렇지 않게 심드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번호 바꾼거야?”
“그냥 없애버렸어. 귀찮기도 해서.”
“아…….”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들이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귀찮아서 없애버렸다는 말에 내가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밥 먹었어?”
“응?”
“밥 먹었냐고.”
“아니 아직.”
“나와, 밥 먹자.”
그를 알고 지내온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뎌질 법도 한데 이토록 무신경한 형석의 말과 행동은 매번 상처가 됐다. ‘그래서 뭐?’ ‘그게 왜?’ 라는 식의 무덤덤한 태도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3개월 만에 만난 그는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하긴, 3개월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이었다.
“뭐 먹을래?”
“별로 밥 생각 없어. 커피나 마실래?”
“그러던지.”
벌써 커피를 한사발이나 들이키고 나오는 참이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냥 순순히 하자는 대로 따르려는 생각이었다.
“근데 너……, 왜 지난 3년 동안 한 번도 지영이 얘기 안했어?”
“뭐?”
“왜 한 번도 나한테 지영이 얘기 안했냐고.”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던가. 이럴 때보면 세월이 참으로 무심하다. 그리고 한편으론 자기 멋대로 흘러가는 세월을 숫자 안에 가둬둘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형석의 질문에 이유를 대라면 댈 수는 있었다. 지영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꺼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는 게 더 맞다. 굳이 지난 일을 들춰서 형석을 자극시키고 싶지 않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되려 형석이 묻고 있었다.
“무관심과 배려는 정말 한 끗 차이 인 것 같아.”
“갑자기 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가끔은 니가 지영이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 게 고마웠어. 별 일 아니지 않느냐고, 사람이 살다보면 헤어지기도 하는 거 아니냐고 일반화시키지 않아줘서 고마웠어. 근데 한편으론 그게 무관심은 아닐까 의심스러웠어. 나는 그 사람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힘겨운데 한 번씩 떠오르면 괴로워서 모든 걸 다 내던지고 싶은데. 도대체 너는 이런 감정을 알기나 할까, 라는 그런 몹쓸 의심 같은 게 들었다는거야.”
나에게는 배려였다. 진심을 담은 위로라고 하여도 그 위로가 형석에게 다가가서 서툰 다독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조심스러웠고 무엇보다 안타까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 상처를, 응어리를, 독을 풀어내는 방식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형석도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나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모르는 척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 누군가는 빈 자리를 대체할만한 무엇을 찾았고 누군가는 짧고 강하게 울분을 토해냈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하염없이 입을 다문 채 괴로워했다. 나처럼.
형석이 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괜히 말 꺼내서 좋을 거 없잖아. 좋은 기억도 아닌데.”
말을 꺼내고 보니 어쩐지 구차한 변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정말 그 모든 것이 형석을 위한 배려였을까? 내가 받은 상처만을 치유하는데 몰두해서 정말 형석에게는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나 결혼할까봐.”
고개는 들지도 않고 후루룩 후루룩 감자탕쯤이나 마시는 것처럼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커피를 마시던 형석이 갑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동네 친구와 약속한 장소에 나가듯 혹은 퇴근길, 서점에서 평소에는 별로 관심 없었던 분야의 책 한권을 사듯 형석은 결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니가?’라고 되물을 수도 없었고 ‘누구랑?’이라며 그의 결혼결심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을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언젠가 형석과 함께 거나하게 술에 취해 농담 삼아 우리 이렇게 살아서 결혼은 할 수 있겠느냐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혹시 모르니 미리 청첩장이라도 만들어놓고 신랑과 신부의 이름 쓸 자리만 비워두자 한 적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그 농담이 이 순간에 왜 떠오르는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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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아무렇지 않게 써낼 수 있을 줄 알았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옮기듯.
1편을 쓰고도 한참을 고민하고 망설였다.
아직까지는 쉽지 않은 탓이다.
이렇게라도 풀어내고 싶다. 해결을 보고 싶다.
이 소설을 쓰는 내내 그 사람을 떠올려야한다는 한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마주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