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1]
나는 할말이 없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침묵한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달리질 게 없어서, 결국 아무 것도 아니어서 말할 수 없는, 말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
-박주영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중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삐뚤빼뚤 못난 글씨라도 손으로 직접 쓴 편지라던가 번호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가슴 떨리게 걸고 받는 집전화와 같은-. 둘 다 일단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게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십시오.”
너무 오랜만에 연락 했을까? 전혀 생각지 못한 응답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없는 번호라니- 책상 앞 벽면에 덕지덕지 혹은 알록달록하게 붙어있는 포스트잇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그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서울에 있기는 한 걸까. 어떠한 관계이건 적당한 거리 유지가 필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때문에 우리는 어쩌다 생각난 옛 일기장을 들춰보듯이 6개월에 한번, 혹은 1년에 한번쯤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누가 먼저 했느냐에 상관없이 우리는 스스럼없이 바로 어제 통화한 사람들처럼 편하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이번 경우는 달랐다. 말도 안 되는 양의 함박눈이 내린 게 1월이니까 마지막으로 그와 연락한지 이제 겨우 3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3개월 만에 걸었던 전화에서 왠 낯선 여자가 이 번호는 없는 번호라고 말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증발해버린 기분이었다. 번호를 바꿨다면 늦게라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 말해줄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번호라서 안 받았을까? 그 생각에 미치자 황급하게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열어 통화목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꽉 찬 통화목록을 지워버리는 탓에 어차피 전화가 왔었다 해도 최근 기록이 아니고서야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괜히 울컥했다.
형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월, 혜화에서였다. 먼저 도착한 나는 그를 기다리며 지하철 벽면에 가득하게 붙은 연극 포스터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포스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둘러보고 나서야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편한 복장으로 나온 그가 늘 그렇듯 환한 미소로 날 맞았다. 그 순간 나는 뭔가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아,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할 수밖에 없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난 10년간 그에게 외모라던가 환경의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기는 그의 모습을 보자 이래서 내가 널 좋아했구나, 좋아하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날 그에게 특별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진 탓이리라. 책상에 펼쳐진 몇 권의 책만 보아도, 벽면 가득 단어를 써붙여 놓은 포스트잇만 봐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모든 일이 귀찮아져서 다 내던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어쩌지 못해 더 괴로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망할!”
불과 1시간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번역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겠다며 보통 컵의 두 배나 되는 머그잔에 믹스커피를 가득 담아놓고 마음을 다잡아가며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을 꼼꼼히 번역하던 중이었다. 사실, 슬럼프라면 슬럼프인건지 도통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번역가라는 직업은 탁월한 외국어 능력도 필요하지만 한국어로 잘 표현해내는 능력도 중요해서 늘 국어공부를 하고 또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 영단어 하나를 번역하는데도 갑자기 턱 하니, 머릿속이 정지된 것처럼 도무지 표현 해낼만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적혀있는 영어 원문을 보면 당장이라도 쭉쭉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막상 노트북의 빈 화면을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몇 시간이고 자리에 앉아 골머리를 앓았다.
‘딩동-’
‘함덕명입니다. 미향이 소식 궁금해서입니다. 절대 헤코지 없으니 통화 한번 하시죠 부탁합니다.’
벌써 5번째였다. 지난 2월에 새로운 핸드폰을 구입하면서 신규가입을 한 터라 기존에 쓰던 번호를 버리고 새 번호를 받아 쓰던 참이었다. 새로운 번호라고 해봐야 나처럼 다른 사람이 쓰다가 버린 번호인 경우 일텐데 그래도 이런 일이 계속 있을 줄은 몰랐다.
‘2월에 이 번호로 바꾼 사람입니다. 이미향씨는 전에 이 번호 쓰시던 분 같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또 친절하게 답장을 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함덕명이라는 사람은 또 누구이길래 해코지 안할 테니 통화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가. ‘헤코지’라니, 맞춤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인가. 사실 이전에도 ‘이미향’이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왔었다. 저장되어 있는 번호가 아니면 받지 않는 편이라 화면에 이름이 아닌 10자리 숫자가 뜨면 무시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내 머릿속에서 한 순간에 지워져 버린 옛 사람, 종원일까 싶어 나도 모르게 전화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상대방은 이미향씨가 아니냐 묻고 아니라는 내 대답에 적잖이 당황하다가 알겠다며 전화를 끊곤 했었다. 아무래도 ‘이미향’이라는 여자는 대구에 사는 여자인 모양이었다. 번번히 051로 걸려오는 전화를 안 받았더니 동사무소라면서 뭔가를 확인 해야 하니 연락 좀 달라는 문자가 오기도 했다. 결국 또 다시 걸려온 전화에 ‘저는 이미향이 아닙니다.’ 라고 말해줘야 했다. 그럴 때 마다 그들은 의아해하며 그럼 ‘이미향’은 어디 있냐는 침묵의 질문을 나에게 던지곤 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알겠나.
‘딩동’
‘부탁 드립니다. 다신 만나지 않겠습니다. 정말 미향이 안부만 알고 싶습니다.’
미향이가 내 친구도 아니고 내 언니도 아닌데, 도대체 나는 이 사람에게 이미향이라는 여자의 안부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 인가. 한번 아니라고 했으면 그만둘 일이지, 아무래도 함덕명이라는 남자는 나를 못 믿고 있는 듯 했다.
“젠장.”
어쩌면 내가 괜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걱정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로 누군가를 찾는 남자라니, 어쩐지 나는 형석이 떠올라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거였다.
그런데, 없는 번호란다.
어쩌면 함덕명이라는 남자도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일까. 홀연히 흔적없이 사라진 여자를 찾지 못해 막막할까. 나는 형석의 집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보아도 좋았다. 하지만 어쩐지 겁이 났다. 그 곳에도 없을까봐, 정말이지 함덕명이라는 남자 옆에서 바람과 함께 떠나버린 이미향처럼, 그도 없어져버렸을까 덜컥 겁이 났다. 그러면서도 나는 꾹꾹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언젠가 집 전화번호 뒷자리가 비슷하다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났다.
“여보세요.”
형석이 전화를 받았다.
-----------------------------------------------------------------------------------------
뭔가 써야겠다고, 쓸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역시.
감정을 풀어내는 일은,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빨리 나이를 먹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한다.
많은 경험과 많은 시련과 많은 아픔을 겪은,
하지만 당당하게 이겨낸 마흔 한살쯤이면 좋겠다.
그때는 그만큼 쓸 이야기, 할 말이 많겠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