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번째 편지-
누군가의 체온이 내 체온과 뒤섞이는 느낌은 짜릿하다.
-봄로야 ‘선인장 크래커’ 중에서-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면 남자주인공인 준영이 이런 말을 한다.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하니 더욱 흥분되었다. 그녀의 머리칼, 눈동자의 움직임, 살결의 감촉과 체취,그리고 손가락의 느낌들, 더 이상은 내 것이 아닌 그녀의 모든 것들을 나는 남김없이 내 속에 영원히 붙잡아두고 싶었다.’
혜란도 그랬을까. 그런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어색함을 깨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술을 마신 때문이다. 어쩌면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빗줄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조금은 내려간 온도 때문에 적당히 편안함을 느낀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
아득했다. 힘이 꽉 들어간 웅현의 손을 잡고 모텔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문 앞에서 조금은 머뭇거리던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들어올 때 까지, 모든 게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이 새벽, 이 어둠, 이 감촉- 웅현의 손길과 입김이 온 몸 구석구석 닿았던 뜨거운 시간이 한낱 꿈처럼 느껴졌다. 당장이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흩어져버릴 것 같았다. 코끝에서 누구 것인지 모를 희미한 체취가 느껴졌다. 웅현은 혜란 곁에서 벌거벗은 채 얕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아기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가엾기도 했다. 어쩌면 웅현을 향한 첫 마음, 제일 순수했던 마음이 바로 이러한 마음이었으리라.
후회 같은 건 없었다. 정신을 놓을 정도로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마지못해 웅현에게 끌려오지도 않았다. ‘처음이자 마지막’ 이라는 생각에 온전히 사로 잡혀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이었다. 웅현은 어떨까. 후회할까. 아니, 후회하게 될까. 언젠가는.
살짝 한기를 느낀 혜란은 웅현이 돌돌 말아 덮고 있는 이불을 잡아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들을 챙겼다. 침대 주변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옷들이 지난 밤의 뜨거웠던 열정을 말해주는 듯 했다. 혜란은 바닥에 널브러져있는 속옷을 집어 들다 말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부끄럽기도 했다. 혜란은 빠르게 옷을 챙겨 입고 침대 맡에 걸터앉아 물을 마셨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갈증이었다. 혜란의 등 뒤에서 여전히 쌔근거리며 잘 자고 있던 웅현이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혜란은 긴장했다. 그 순간 혜란은, 먼저 나갈까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마주하는 건, 어쩐지 이상할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이글거리며 타오를 수 있는 사이도 아닌, 그렇다고 쿨하게 넘어갈 수 있는 원나잇도 아닌 애매한 사이. 어떠한 표정으로 어떠한 말을 건네야할지 고민해야하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편으론 혜란이 그렇게 떠나버리고 나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혼자 남겨져있을 웅현이 걱정되기도 했다. 허무하지 않을까 또는 괜한 배신감이 들지는 않을까. 그래, 언제나 혜란의 문제는 웅현을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이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이제 웅현과는 어떻게 되는 걸까. 1년에 한 번쯤, 비가 와서 생각이 났다거나 둘이 함께 갔던 장소를 지나왔다며 연락을 주고 받게 될까. 아니면 오랜 세월이 흘러 우연히 마주치고는 때 아닌 고백을 하게 될까. 그때는 분명 진심이었노라고 쓸데없는 용기를 내게 될까. 또 그 마저 아니라면 이대로 마음 속에만 담아두고 영영 끝나게 되는 걸까. 앞으로의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를 알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웅현은 6년 동안 함께 한 그녀의 곁으로, 나는 웅현을 알기 이전의 평범한 여자로. 그리고 어쩌면 건의 곁으로.
이제 혜란과 웅현은 특별하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는 사이였다. 적어도 혜란은 그렇게 믿었다. 돌이켜보면 웅현을 알게 된 후로 지난 1년은 늘 불안했다. 이리 휘청거리고 저리 휘청거리며 웅현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휘둘렸다. 그만큼 진심이었을까.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듯, 외롭고 슬픈 마음.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 영화 ‘프랙티컬 매직’을 핑계로 불쑥 웅현에게 마음을 고백했지만,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도, 달라질 것도 없다는 것쯤은 미리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답답해진 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몸을 기댔다. 술에 흠뻑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중년의 남자 몇몇과 깔깔거리며 웃는 20대 초반의 여자들 그리고 곁에 서 있는 남자들. 늦은 시간이었지만 여기저기 부여잡지 못할 숱한 감정들이 떠다녔다. 혜란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웅현과 자신이 이뤄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리스트라도 만들 수 있다면 만들 작정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마지막 밤이었다. 아무래도 제일 큰 이유는 웅현이 입버릇처럼 말했던 타이밍때문일까. 그래,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 자세로 오랫동안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혜란은 문쪽으로 걸어갔다. 행여나 웅현이 잠에서 깰세라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저기요. 죄송한데 종이랑 펜 좀 빌려주실 수 있나요?”
프론트에 앉아있던 남자는 TV 프로그램 재방송을 틀어놓은 채 들썩거리며 웃다 곁눈질로 혜란을 쳐다봤다. 이 새벽에, 그리고 모텔에서 왜 종이와 펜을 찾냐는 눈치였다.
“종이랑 펜이요?”
“네.”
“뭐, 설마 유서 이런 거 쓰는 건 아니죠?”
“아, 아뇨. 적어야하는 게 있는데 아무 것도 없어서요.”
“아무 종이나 상관없어요?”
“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모지 몇 장을 손에 집어 들고 그 위에 볼펜을 죽죽 그어 상태를 확인하더니 혜란에게 건네주었다.
“좋은 말만 쓰세요.”
계단을 올라가던 혜란의 등 뒤로 남자의 목소리가 꽂혔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혜란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 전화 2통이 화면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건이었다.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연락이 없던 건이었다. 언젠가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조금 놀라긴 했다. 어차피 이 시간이면 건도 잠이 들었을테니 연락은 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 혜란은 메모지에 끄적끄적 글을 적어나갔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마지막 행까지 적자 왠지 모를 허탈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이별을 고하는 거다. 메모지를 곱게 접어 휴대폰과 함께 가방에 넣고는 혜란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벽을 향해 돌아 누운 웅현의 뒷모습을 손 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안고만 싶어지는 등이었다. 몸을 조금 움직여 자고 있는 웅현을 안았다. 인기척을 느낀 웅현이 몸을 돌려 혜란을 두 팔로 안았다. 혜란인 줄 알긴 아는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이 품이, 이 손이, 이 숨결이 그리고 이 마음이.
어김없이 날은 밝아왔다. 몇 시간 안 되는 동안 혜란은 푹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옆에 누워있던 웅현은 없었다. 화장실에서 물줄기가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몇 분 뒤 화장실에서 깔끔한 모습으로 나온 웅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혜란도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었다.
“잘 잤어요?”
“네, 생각보다요.”
“나두요. 술도 마시고 해서 불편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푹 잘 잤어요. 개운할 정도예요.”
개운할 리가 있나. 이상하리만큼 과장되게 말하고 행동하는 웅현을 보니, 웅현도 꽤나 이 상황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혜란이 어색함을 깨기 위해 말을 꺼냈다.
“술 마시고 나면 그렇게 배고프더라, 배 안 고파요?”
“살짝 그래요. 밥 먹으러 갈까요?”
“그래요. 씻고 나올게요.”
웅현의 팔을 스치며 화장실로 들어간 혜란은,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는 한참동안 거울을 봤다. 거울을 봤다기보다 멍하니 서 있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생각들이 거울 가득 펼쳐졌다. 웅현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모양인지 화장실은 하얀 김으로 가득했다. 손바닥으로 뿌옇던 거울을 슥슥 비벼 닦아냈다. 마음도 이렇게 쉽게 닦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먼저 나가 있어요. 정리 좀 하고 나갈게요.”
“그래요.”
혜란은 웅현을 먼저 밖으로 보내놓고 빠진 귀걸이 한쪽과 시계를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머리카락을 툭툭 털어 말리고 샘플로 받았던 스킨, 로션, 비비크림을 바르고는 서둘러 문 밖으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자 새벽녘에 프론트에 앉아있던 남자가 그대로 있었다. 남자는 힐끗거리며 혜란을 쳐다봤다.
“펜 잘 썼어요.”
“네. 안녕히 가세요.”
일요일 오전의 거리는 한산했다. 성당이나 교회를 가는 듯한 사람들이 웅현과 혜란 앞을 지나갔다.
“뭐 먹을까요? 해장 해야죠?”
“설렁탕? 뼈다귀해장국?”
“설렁탕 먹을까요? 이 근처에 설렁탕 집이 있나?”
혜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웅현을 몰래 지켜봤다. 생각해보니 웅현의 옆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쩐지 마지막으로 기억해두고 싶은 모습이었다.
“저쪽으로 가봐요.”
“아, 그쪽으로 가면 뭐가 좀 있겠네요.”
설렁탕을 먹는 동안 혜란은 웅현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았지만 묘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괜히 옆 테이블에 앉아 밥 먹는 사람들을 쳐다보거나 웅현 머리 너머로 놓인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기도 했다. 웅현에게 집중을 못하고 있는 탓이었다.
“계산, 내가 할게요.”
“아니에요, 내가 해요.”
“모텔비, 웅현씨가 냈잖아요. 밥은 내가 사야죠.”
혜란의 말에 웅현이 다소 멋쩍은 듯 한 표정을 지었다. 혜란도 말을 내뱉어 놓고는 뭔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말 그대로 모텔비를 웅현이 계산했기 때문에 밥을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한 혜란이었지만 다른 이유가 있기도 했다. 혜란 스스로는 이 것이 마지막 만남이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에 어쩐지 웅현이 밥을 사면 빚지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혜란은 설렁탕집을 나오며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 웅현에게 건넸다.
“뭐예요 이건?”
“이번엔 내가 먼저 썼어요.”
“편지예요?”
“네, 집에 가서 봐요. 알았죠?”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적혀있을 것 같아요.”
“중요하다기보다 하고 싶은 말을 적었어요.”
“알겠어요. 이따가 볼게요.”
“그래요, 조심히 가요.”
“네, 들어가서 푹 쉬어요. 연락할게요.”
가벼운 굿바이 인사와 함께 돌아섰다. 그리곤 한참을 걸으며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지 말자, 라고 몇 번을 되뇌였다. 절대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는데, 혜란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웅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혜란이 건네준 편지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주먹을 쥔 채 이마를 콩콩 때리면서. 혜란이 평소 자책할 때 하던 버릇이었다. 그런 웅현의 모습을 보면서 혜란은 조용히 웃었다. 웅현과 혜란은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