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번째 편지-
‘모르겠다’는 말이 이렇게 무책임한 것인 줄 몰랐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창문이 보이는 방이 있었다. 한 가운데 둥그런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 위로 몇 개의 술잔과 물 잔이 뒤엉키듯 놓여있었다. 그리고 모든 잔에는 최신 트렌드 컬러인 코랄빛 립스틱이 군데군데 묻어있었고, 그 옆으로는 몇 개의 담배꽁초와 몇 개의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방, 건과 함께 몸을 섞던 방.
건을 잠들어있는 사이, 혜란은 웅현의 세 번째 편지에 답장을 하고는 다시 잠이 들었었다. 그리곤 가벼운 입맞춤이 무색하게 모텔 밖으로 나와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했다. 불같이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가던 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혜란은 ‘이제 어쩌지?’ 라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거리로 나온 혜란은 집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가야할지 고민했다. 사실은 건에게 거짓말을 했다. 지겨워지긴 했지만 별 뜻 없이 건의 부모님을 찾아뵌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 어떤 여자가 겁 없이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난단 말인가. 특히나 건의 부모님은 누구보다도 혜란을 예뻐하셨다. 사내녀석들만 있는 집에서 살가운 예비며느리란 참으로 달가운 것이었다. 건은 다소 욱하는 성격이 있기는 했지만 그런데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해놓고 그를 화나게 만들었을까.
어디로 갈까, 정처없이 걷던 혜란은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1년, 아니 2년? 혜란은 웅현과의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렇게 서로 얽매이지 않는 관계라면 10년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장담할 수 있는 관계란 어디에도 없었다.
몇 시간 만에 돌아온 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했다. 나가면서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반바지와 반팔이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고, 몇 개의 그릇과 수저가 설거지통에서 잠수를 하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혜란은 옷가지 옆에 나란히 누웠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오후였다. 방안 가득 들어오는 햇빛이 혜란의 눈 주위를 간질였다. 일어나서 커튼을 치면 될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귀찮았다. 웅현은 편지를 읽었을까. 어차피 오지 않을 것 같은 전화, 도대체 어쩌자고 집 전화번호를 적었을까. 혜란은 천장무늬를 바라보며 조금은 후회를 했다.
적막을 깨는 전화벨 소리. 당장이고 받을 것 같이 일어났던 혜란은 침대 맡에 걸터앉아 고민했다. 확인하기가 두려웠다. 웅현이면 어쩌지? 일부러 전화번호를 알려준 사람 치고는 소심한 모습이었다.
“여보세요.”
“..................김웅현입니다.”
“아, 네. 생각보다 일찍 전화하셨네요.”“그런가요?”
“네.”
“잘 지냈어요?”
“잘 지냈던 것 같아요.”
“저 다음 달이면 서울에 다시 올라갈 것 같아요.”
“아, 네.”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해야 할 지 아니면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대해도 좋을 지 알 수 없었다. 그 묘한 어색함과 침묵을 깨고 웅현이 말을 꺼냈다.
“만나요, 우리.”
한 달은 너무나도 길었다.
9개월 만에 만난 웅현은 조금은 핼쑥해진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괜찮았다. 다만 목소리에는 까끌거리는 모래알이 들어있는 듯, 거칠고 가라앉았다. 멀리서 혜란을 알아보고 웅현이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나머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오랜만이네요.”“네, 잘 지냈죠?”
“네.”
“밥 먹으러 가죠.”
“비도 오는데 얼큰한 짬뽕 먹으러 갈까요?”
“그래요.”
웅현과 혜란은 길을 걷다 보이는 중국집에 들어섰다. 주말 저녁이라 사람들이 붐볐다. 한쪽에 자리 잡고 앉은 둘은 각각 짬뽕 두 그릇과 탕수육을 시켰다.
“예전에 가족끼리 중국집에 간 적이 있어요. 사실 어머니는 짜장이건 짬뽕이건 별로 안 좋아하시는데, 아들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마지못해 가시는 편이었어요. 아무튼 가게 되면 아버지는 무조건 짜장, 저는 짬뽕, 동생도 짬뽕, 그리곤 탕수육을 시키고 군만두가 서비스로 나와요. 그러다가 아버지는 짜장면 드시면서 자꾸 제 걸 탐내시는 거예요. 야, 짬뽕 맛있냐? 라고 하시면서. 어머니도 탕수육만 몇 개 드시다가 저한테 맛있냐고 물어보셨어요. 왜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네요.”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네요. 눈 앞에 그 모습이 그려져요.”
“그래요?”
“저는 이렇게 비오는 날이면 엄마가 해주던 묵밥이 생각나요. 묵밥 뭔지 알죠?”
“그럼요. 저도 어렸을 때 많이 먹었어요.”
“어렸을 때는 이게 무슨 밥이냐고 괜히 투정도 부리고 그랬었어요. 가끔 아빠가 산에 가서 도토리를 가져오시면 두 분이서 같이 도토리묵을 직접 쒀서 만들어주시곤 했어요. 그때 기억이 나요. 지금은 귀찮다고 두 분 다 안하시지만요.”
"혜란씨 보면 좋은 가정에서 밝고 건강하게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요?”
“곱게 자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음, 그런가?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 참! 저 얼마 전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고등학생 때부터 기타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이제야 가지게 됐네요.”
“나중에 연주해줘요. 어떤 곡이든.”
“그래요. 나중에 기회되면 쉬운 곡 하나 정도는 연주해줄 날이 있을 거예요.”
“우리는 참 나중이 많네요. 언젠가, 나중에, 이런 말과 우리는 어울리나봐요.”
혜란은 말을 내뱉어놓고 괜스레 마음이 짠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혜란과 웅현 사이에는 정말 ‘당장, 지금, 바로’ 라는 단어는 없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을 했고, 내일에 대한 다짐을 했다. 혜란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짬뽕을 먹었다. 짬뽕 국물이 유난히 칼칼한 건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해서였는지 체한 것처럼 가슴이 턱턱 막혔다. 웅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다 먹었으면 나갈까요? 술 한잔, 할래요?”
“그럴까요?”
중국집 맞은 편에는 술집들이 즐비했다. 그 중에 하나 아무 곳이나 골라서 가면 될 일이었다. 비오는 주말 저녁이라 어느 곳이나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지만 적당히 조용한 곳을 골라 들어가기로 했다. 4층 건물에 3층에 있는 술집은, 다소 퀘퀘한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손님들이 많지도 않고 조용해서 좋았다. 창가 자리로 안내 받아 앉고는 소주 1병과 가벼운 안주를 시켰다.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럼요. 편지에 썼던 것처럼 삼척도 다녀오고 포항에도 잠깐 있었어요. 새해를 호미곶에서 맞았네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해돋이를 본 건 처음이었어요. 그리고 또 광양에도 잠깐 있다가 왔죠. 여행이 하고 싶었어요. 머릿속도 정리하고 마음도 정리할겸.”
“그래서 정리가 됐나요?”
“아뇨, 아직은 아닌 거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웅현이 편지를 처음 쓰면서 머뭇거렸던 감정과 혜란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답장하기를 망설였을 때와는 사뭇 다른 이유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할 말이 분명히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여자친구를 만났어요. 처음엔 저에게 너무 의존해서 그런지 힘들어하더군요. 그런 모습 보면서 저도 한편으론 마음이 아팠어요. 모든 게 제 잘못 같았죠. 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싸웠어요. 어쩌면 만나는 기간에 싸웠던 것보다 더 치열하게- 4년 동안 한 남자와 싸웠다던 혜란씨 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그때 제가 그만큼 특별하기 때문에 서로 할퀴면서 싸웠던 거 아니냐고 했었죠? 여자친구가 다시 잘해보자고 울면서 말하더군요. 원래 그런 얘기할 여자가 아니거든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여자친구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리고 당신한테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
마침내 입을 연 웅현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가 나왔다. ‘옛 여자친구’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또는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혜란은 먹먹했다. 6년이라는 시간이 한순간에 지워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 웅현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다. 모르겠다는 말은 또 얼마나 무책임한가. 모르겠다 싶으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게 아닌가.
혜란은 스무살 때 만났던 남자를 떠올렸다. 어느 날엔가 아주 사소한 일로 다툰 적이 있었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쏘아붙였던 혜란과는 달리 그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랬다. 그렇다 아니다 라고만이라도 대답해주기를 바랬다. 화를 이기지 못한 혜란이 결국 카페를 박차고 나왔을 때까지도 그 사람은 돌부처처럼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혜란은 뒤따라 오는 그의 그림자를 본 것 같기도 했고, 혜란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보다 못한 친구가 나서서 혜란과 그를 화해시키려고 했다. 신촌의 또 다른 카페였다. 열흘 정도가 지났을까. 몰라보게 수척해진 그의 모습을 보면서 화도 나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다 뭐라고, 스무살 풋내기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 난리법석을 떨었을까 싶다.
스무살의 사랑이 이토록 아팠는데, 웅현의 그 여자는 오죽할까. 쓸데없는 동정심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그녀는 이십대의 절반 이상을 통째로 드러내야만 하는, 또는 온전히 혼자서 기억하고 감당 해내야 하는 아픔을 견뎌내고 있는 것 아닌가. 무슨 말이든 해야할 것 같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또는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는 웅현의 말이 혜란에게 닿지 못하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리저리 입술을 움직이는 웅현의 모습만 보일 뿐, 혜란에게는 어떠한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다.
“내 얘기 듣고 있어요?”
“한때 정성껏 키우던 화분이 있었어요. 임파첸스라고 아마 어떤 소설에서도 등장했을 거예요. 그 책 제목은 기억이 안 나네요. 그 임파첸스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어요. 잎이 하나 돋아나면 환호했고 또 한 잎이 돋아나면 쓰다듬어줬어요. 그러다가 며칠 집을 비울 일이 있었어요. 잠깐 여행을 갔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저 없이도 임파첸스는 잘 자라고 있더군요. 생각해보면 그 임파첸스는 원래 잘 자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없는 사이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다른 이의 사랑 필요 없이 혼자 잘 자랄 수 있는 식물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래서 내버려두기로 결심했어요. 알아서 잘 크도록. 임파첸스는 1년초예요. 어차피 1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질 거예요.”
임파첸스의 꽃말은 ‘나의 사랑은 당신보다 깊다’ 였다. 웅현을 향한 혜란의 마음도 그러하리라.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 사실이 혜란을 더욱 아프게 했다. 웅현과 혜란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은 오직 하나, 웅현의 여자친구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마저도 착각이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따끔거렸다. 술 때문일까, 기분 탓일까. 혜란은 오늘이 지나고 나면 웅현을 만날 이유도, 만날 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 덧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