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번째 편지-
당신을 만나면, 내가 과연 행복해질까?
3개월 만에 혜란의 곁에서 그가 사라졌을 때, 어디론가 증발해버렸을 때, 혜란의 친구들은 위로를 하지 못한 것일까, 안한 것일까. 1년의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엔가 혜란은 다짜고짜 미현에게 전화를 걸어 왜 한번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는지 따졌다. 어쩜 그럴 수 있냐고, 그러고도 니가 내 친구냐며 펑펑 울다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화내기를 반복했다. 한참동안 혜란의 말을 듣던 미현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내가 그 사람에 관해 한마디라도 하면, 니가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 같아서.’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혜란은 입을 다물었다. 무관심과 배려는 한 끗 차이었다.
웅현의 편지를 받은 혜란은 흔들렸다. 방향을 잡지 못했다. 그를 내버려 두어야 할지 아니면 벗어나도록 도와줘야할지. 그마저도 아니라면 혜란은 제3자에 불과하니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지. 6년이라는 시간은 절대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시간이 아니었다. 혜란보다 한 살이 많다던 웅현의 옛 여자친구는, 그와 20대 절반 이상을 함께 한 것이었다. 감히 이해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세월. 웅현에게나, 그 여자에게나 정리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혜란을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우선 혜란에게 가장 큰 고민은 답장을 하느냐 마느냐의 것이었다. 무언가 마음이 정리가 되고 혜란에게 할 말이 있을 때 또 편지를 하겠노라 했던 웅현이었지만, 답장을 기다린다거나 하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혜란은 할 말도 없었다. 아니,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웅현만큼이나 몰랐다. 그래서 기다렸다. 다시 편지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하루를, 일주일을, 그리고 몇 달을 허공에 흘려보냈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났을 무렵, 첫 눈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상예보와 함께 또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웅현에게 받은 두 번째 편지였다.
김웅현입니다.
이별이라는 건 쉽지도, 단순하지도 않네요.
특히나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경우에는요. 더더욱-
남녀관계 뿐만 아니라 어떠한 관계든지요.
이별의 이유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궁금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알지만 그들이 야속합니다.
저를 탓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년이라는 시간이 결코 이렇게 끝나지만은 않을 거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생긴 건 아니냐고 추궁하기도 합니다.
귀찮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휴대폰 번호를 모두 지워버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 삭제 창을 보며 몇 분쯤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확인 버튼을 누르고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습니다.
혜란씨 메일주소는 다이어리 한 귀퉁이에서 찾았습니다.
함께 일할 때 혜란씨가 제 다이어리에 적어뒀던 거죠.
그래서 몇 달 전에도 당신에게 편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건 뭘까요.
사랑일까요, 아닐까요. 정일까요, 아닐까요.
당신과 함께 해서 서른둘의 봄, 그리고 여름이 행복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아무 것도 정해진 게 없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립습니다.
그때의 당신과 내가.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본 것처럼, 그리고 볼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시시콜콜한 농담에도 마주보며 웃었던 때,
혼자서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다가도
조잘거리듯 이야기하는 당신을 보며 흐뭇해하던 때.
그때.
저는 지금 포항에 있습니다.
새빨갛게 타오르던 마음들이 하나 둘 지고 있습니다.
태양에 녹아버리고,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그렇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당신만큼은 그대로였으면 좋겠습니다.
봄과 여름, 두 계절 동안의 행복이 그대로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기적이라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내가 돌아갔을 때 당신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편지하겠습니다.
서로 통한다는 이유만으로는 만날 수 없다. 서로 닮았다는 이유만으로는 사귈 수 없다. 서로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는 결혼할 수 없다.
새롭게 시작된 관계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때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이 필요했다. 혜란과 웅현은, 이미, 그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혜란은 어쩌면 10개월 남짓 되는 시간동안 의외로 많은 걸 놓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웅현을 좋아할 이유도, 웅현과 만날 타이밍도- 혜란과 웅현 사이에 그 여자가 있지 않았냐고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지 않을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였으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웅현과 그 여자에게, 또 혜란까지, 모두에게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웅현에게 여자가 있어서 그동안 더 애절했던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를 외롭게 하는 그녀가 미웠고, 혼자인 듯 아닌 듯 외로워 보이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런 마음을 안은 채 그저 몇 번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정이 들어버린 건 아니었을까. 연민과 욕심 그 정도.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100% 순수하게 사랑일 수는 없다고 하지만 웅현에 대한 마음은 특히나 사람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 정도가 아니었을까. 혜란은 쉽게 정이 드는 스타일이었다. 어쩌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어야 했나, 아니면 마지막까지 달려가서 끝을 보고 돌아왔어야했나. 혜란은 마음이 복잡했다.
혜란은 몸을 돌려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가져왔다. 시간은 새벽 3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몇 시간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너무 조용해서 잠이 안 오는 걸까 싶어서 TV를 켰다가 쉴 새 없이 번쩍이는 화면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TV를 끄고 라디오를 켰다. 새벽 시간대에 어울리게 나긋나긋하게 멘트를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가 노래가 나오면 또 다시 깨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불을 켜고 일어나 앉아서 책을 읽기도 했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언젠가는 잠이 들겠지 하는 마음으로 불을 끄고 누웠지만 조용한 방 안에서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혜란을 괴롭혔다. 웅현에게서 편지를 받은 이후로 이런 생활을 내내 반복하고 있었다.
“언젠가 예전 여자친구가 저한테 물었어요. 오빠 사랑은 밧데리냐고. 그 말에 웃었어요. 명색이 남자친구가 카피라이터인데 밧데리가 뭐냐고, 배터리라고 하라고.”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농담이 나와요?”
“몰랐던 거죠 뭐, 여자친구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아무튼 여자친구 말은 시간이 지나면 닳아서 없어져버리는 배터리냐고 하는 거였어요. 그 말을 듣는데 심장이 덜컹했어요.”
“왜요?”
“아 그랬던가? 싶었거든요. 그랬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왜요?”
“틀린 말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웅현이 이따금씩 꺼냈던 여자친구 이야기 중에 하나였다. 밧데리냐 배터리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닳아 없어져버리는 사랑. 어쩌면 혜란 자신도 그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현의 지난 사랑에 대해 곁에서 보고 들은 혜란으로서는, 언젠가 혜란을 향한 웅현의 마음도 그런 식으로 유통기한이 다 되어 사라져버린다거나 못 쓰게 되어버리는 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얼굴도 모르는 웅현의 예전 여자친구가 안쓰럽기도 했다. 같은 여자로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공감 같은 것이기도 했고, 비슷한 경험이 있는 혜란으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어차피 변하는 게 사람이라지만, 혜란에게는 특히나 변화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다. 처음엔 한결같이 잘해주다가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멀어지던 남자가 있었는가 하면, 웅현을 알기 이전에 만나던 남자는 3개월 만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지워지고 사라지고 희미해진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았다. 웅현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 셈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머릿속과 입 속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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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길에서 당신을 닮은 사람을 봤습니다.
처음엔 정말 당신인 줄 알고 놀랐어요.
흔한 얼굴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사실, 세상엔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답장하려고보니 할 수 있는 말이 생각보다 없네요.
저번 달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포항이라고 했나요?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잘 견디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보고 싶은 마음을 죽이고,
그리운 마음을 누르고-
나는 그렇게 잘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견뎌봐요, 우리.
혜란은 보내기 버튼을 눌러놓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어쩌면 이것만이 혜란이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몰랐다. 어두운 방 한 켠, 혜란은 언젠가 나란히 길을 걸으며 우리가 헤어지게 될 땐 화끈하게 싸우고 끝내자던 말에, ‘그래요 우리’ 라고 대답하고 손을 잡아주던 웅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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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카페에 혼자 앉아있다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쓰려면 이유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관계와 거리, 그리고 편지-
그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저는 두 겁쟁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두 겁쟁이가 결국엔 용기를 내게 될 지, 아닐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