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편지-
“만약에 그 사람이 혼자였다면, 내 마음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것 같아.”
“아니, 니 마음은 그대로였을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똑같을 거야.”
밤 10시 50분. 혜란은 맥주를 홀짝이며 수목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오해와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남녀가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혜란도 평소에 즐겨보던 드라마였는데, 그 장면을 보자마자 괜히 울컥했다. 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후드티셔츠를 입고 휴대폰과 이어폰을 챙겼다. 밖으로 나가 조금 걸을 셈이었다. 다 마신 맥주 캔은 발로 밟아 재활용 수거통에 소리나게 던져 넣었다.
늦은 시간이라 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퇴근하는 몇몇과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몇, 그리고 혜란처럼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몇.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자 때마침 하림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언젠가 마주칠 거란 생각은 했어 한눈에 그냥 알아보았어 변한 것 같아도 변한 게 없는 너 가끔 서운하니 예전 그 마음 사라졌단 게 예전 뜨겁던 약속 버린 게 무색해 진데도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만 미안해하자’
혜란에게도 행복한 때는 있었다. 정말. 몇 년 전,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해서 여기저기 모임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그리고 한 모임에서 남자를 만났다.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있기도 했고 무언가 자극적인 관계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덜컥 처음 만난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사귀자는 말에 그러겠노라 대답해버렸다. 사랑했을까, 아니 좋아하기는 했을까. 2년이 지난 지금에도 혜란은 몇 번이고 의문을 가졌다.
골목길을 돌아서며 다정하게 허리를 끌어안고 걷는 연인과 마주쳤다. 그래서 혜란은 며칠 전 웅현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남자친구에 대한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요?”
“글쎄요. 마지막으로 남자친구가 있었던 게 언제더라.”
“그런 걸 잊어요?”
“지금까지 그냥 나쁘지 않으니까 만났어요. 아, 헤어진 지 2년쯤 됐네요. 그때는 참...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만났어요. 이대로는 큰일나겠다 싶으면서도 손을 놓지 못했어요.”
“왜요?”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어쩌면 정말 좋아했던 거 아닐까요? 그런데 2년이나 지났다면서 아직 안 편해요? 말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 보여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3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던 남자. 한 통의 연락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처음엔 기다렸다. 언젠가는 연락이 올 거야, 언젠가는 찾아올 거야, 라는 헛된 기대로. 만나는 동안 내내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으면서도 혜란은 기다렸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고, 왜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도 몰랐고, 어디에 사는지, 왜 한번씩 연락이 닿질 않는지조차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혜란은 그 사람에게 대해 정확히 아는 게 없었다. 사랑이라기보다 그저 육체적인 관계라던지 혹은 파트너 정도로 생각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이따금씩 술에 취해 전화가 걸려오거나 무작정 혜란의 집으로 찾아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누군가의 체온이 내 체온과 뒤섞이는 느낌은 짜릿하다고. 함께 술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몸을 뒤섞으며 황홀경에 빠졌다가 아침햇살과 함께 그 사람이 떠나면, 그제야 혜란은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3개월을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놓지 못했던 건, 그 사람의 미소와 눈빛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혜란.
혜란의 지난 이야기를 들은 웅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땅히 해줄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혜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그 사람을 잃어버린 혜란에게 친구들 중 아무도 화를 내지 못했다. 차마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지도 못했다. 그 누구보다 혜란이 가장 가슴 아파하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미현과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집 문을 나서면서 봤던 그 사람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씨익 웃으면서 내 머리를 헝클어놓고 가던 그 사람. 그 눈빛만 보면 그렇게 사라져버릴 사람이 아니었는데.”
“니가 그 사람을 잘못 봤거나, 아니면 그때는 진심이었거나. 둘 중 하나일거야.”
웅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별다운 이별이란 게 있을까요? 그런 생각해봤어요?”
“글쎄요. 어떤 이별이든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건 알아요.”
“혜란씨 얘기를 듣고 지금까지 이별다운 이별을 해본 적 있는지 생각해봤어요. 상대방 마음이 변한 걸 내가 먼저 눈치 채서 결국엔 마지못해 이별을 선언하거나 아니면 지쳐버린 상대방이 나를 포기하거나, 그랬던 것 같아요.”
“이별의 방법이 꼭 싸우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싸울 수도 있지만 슬금슬금 한 발짝씩 물러나는 것도 있고, 결자해지도 있고, 이렇게 그 사람처럼 어디론가 증발해버리면서 의도치 않게 그 관계가 끝나는 것도 있고...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슬슬 멀어지는 게 제일 싫네요.”
“나중에 우리가 싸울 일이 있을까요?”
“글쎄요.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나중에 혹시나 서로 할 이야깃거리가 없어진다거나 단점이 더 크게 보이면, 그때 우리는 화끈하게 싸우고 돌아서요. 제가 시비 걸게요. 받아줘요.”
“그래요, 우리.”
웅현이 희미하게 웃으며 혜란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을 잡는다고 해서 새삼 수줍어하거나 놀라워할 나이도 아니었고, 그럴 혜란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묵직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둘은 길을 걸었다. 혜란은 손을 잡아준 웅현이 고맙고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불편했다. 웅현에게는 여자가 있지 않은가. 그녀에게도 이렇게 따뜻하게 손을 잡아줄 것이고 다정하게 굿나잇 인사를 하며 키스를 할 수도 있었다. 그보다 더한 스킨십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관계였다. 그렇다면 혜란은 뭔가.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 키스신을 보다가 갑자기 집밖으로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키스신을 보고 있자 혜란도 모르게 울컥했고, 화가 났고, 답답했고, 억울했다. 왜 화가 날까 생각해봤다. 상대방이 내 마음과 같지 않다고 해서 똑같기를 강요해서는 안되는 거다. 알고 있다.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관계에서 퍼져가는 익숙함이라니, 맙소사! 관심이 욕심이 되고, 욕심이 의심이 되는 순간. 이대로 가다간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서 그를 떼어내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질 것 같았다. 1시간쯤 걸었을까. 집으로 들어가는 길, 덜컥 웅현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해요?”
“이제 막 집에 들어왔어요.”
"영화 프랙티컬 매직 봤어요?"
“아뇨, 갑자기 그 영화는 왜요? 누가 나오는 거죠?”
“산드라 블록이랑 니콜 키드먼이 주연이에요.”
“아 그래요? 못 본 것 같아요. 나중에 볼게요.”
“한 손으로 팬케이크를 뒤집는 남자, 오른쪽 눈은 초록색, 왼쪽 눈은 파란색인 남자, 말을 거꾸로 탈 줄 아는 카우보이- 샐리가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해 거는 주문이에요. 마녀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일찍 죽는다는 속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겠다고 선언하는 거죠.”
“그래요? 그래서 샐리는 어떻게 되나요?”
“어느 날 샐리 앞에 그런 남자가 정말로 나타나요. 서로 사랑에 빠지지만… 샐리는 자신이 걸었던 주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남자를 밀어내요.”
“그래서요? 둘은 영영 만나지 못하는 새드 엔딩인가요?”
“아뇨. 결국엔 해피엔딩이에요.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라고나 할까.”
“그렇군요. 운명이라….”
“나는 샐리처럼 주문을 걸 수 있는 마녀는 아니지만 기도는 할 수 있었어요. 일 년에 책 몇 권쯤은 읽는 남자, 영화 보는 걸 좋아하고 함께 전시회를 다닐 수 있는 남자, 어느 날 갑자기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남자, 웃는 얼굴이 예뻐서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만드는 남자. 그런 남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그런데 이렇게 내 눈 앞에 그런 남자가 있어요.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당신이 내 남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편으론 겁이 나기도 해요. 내가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더 다가가서 당신 마음까지 확인하게 되면, 상처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미리 알지 않아도 되는 진실, 그런 걸 혼자 들춰보는 것 같달까. 그래서 확인하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전에 말했던 ‘안녕 추파춥스 키드’ 이야기 기억나요? 메일과 거리에 대한 이야기.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해요, 딱 이만큼.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 마주하기로 해요.”
이야기를 마친 혜란은 입을 다물었다. 수화기 너머로도 아무 말이 들리지 않았다. 확실하지 않은 마음은 풀어놔봐야 혜란과 웅현 모두에게 독이 되고야 말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혜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현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혜란의 욕심이었다. 지나간 아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길을 걸었던 그 밤, 손을 잡은 웅현 때문에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웠던 혜란이었다. 상상 속의 만남이 현실이 된다고 생각하자 덜컥 두려워진 것이었다. 마치 꿈꿔오던 결혼이 현실이 된다고 생각하자 두려워 도망가고 싶어진다던 미현처럼. 그래서 그저 이 정도의 설렘을 간직한 채 거리를 두는 게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했던 혜란이었다. 다분히, 그리고 지극히 이기적이었다. 혜란이 용기를 내 말을 이어갔다.
“4년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던 남자가 있었다고 했죠? 그 남자도 그랬어요. 상대방 마음도 내 마음과 똑같을 거라고 오해하게 만드는 말과 행동이 많았어요. 그런데 결국은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더 이상 오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또 흔들려요. 당신 눈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하고 똑같을 것 같다는 생각에 빠져요.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혜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전화를 끊었다. 웅현에게 더 이상 할 말도 없었고 들을 이야기도 없었다.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저 자신의 마음을 알리기만 하면 됐다.
그 이후로 웅현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어느 덧 세상은 붉은 가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웅현을 알고 지낸지 10개월이 되어가고 있었고, 연락이 끊긴지는 두 달쯤 되었다. 그 사이 혜란은 작은 디자인 회사에 다시 취직을 했다. 가끔 괜히 속마음을 털어놓았나 싶은 후회가 되기는 했지만, 미련은 없었다. 두 달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동안 몇 번의 소개팅을 했고, 몇 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 헤어졌다. 대부분 웅현과 닮은 구석이 있는 남자들이었다. 이름이 비슷하거나 생김새가 비슷하거나 말투가 비슷하거나. 그러나 마음은 주지 않는 우스운 관계. 또 다시 지리멸렬한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낯선 이메일주소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김웅현입니다.
안녕하세요. 늦게 씁니다.
계속 쓰려고 생각만 하다가 막상 시작하니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오전 7시 37분, 떠나기 23분 전입니다. 그리고 삼척입니다.
오늘 춘천의 기온이 영하 7도라네요. 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말이든 길게는 잘 안 쓰니까, 짧게 쓰고 갑니다.
그동안 멋진 인연을 만들어주고 아낌없이 사랑해준
형, 누나, 친구, 동생들에게 고맙단 말을 전합니다.
다들 건강히 계세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우연히 오래된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10년 전 일이네요. 군대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썼던 편지입니다. 다시 읽어보니까 유치하기도 하고, 무뚝뚝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22살의 김웅현을 되돌아보다가 문득, 22살의 혜란씨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혜란씨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당신에 대해 아는 것만이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안녕 추파춥스 키드’ 라는 책이었나요? 어느 날 문득 그 이야기를 떠올렸고 당신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신을 만나 차마 말로는 하지 표현하지 못한 제 마음을, 빈 화면에 쏟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요.
여자친구와는 헤어지게 됐습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헤어지는 데는 어떠한 이유든 붙을 수 있겠지요. 이별다운 이별을 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싸우지도 않았고 마음이 슬슬 멀어지지도 않았으니까요. 헤어지자는 말에 그러겠노라 대답했을 뿐입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건, 어떤 말부터 해야 좋을지 몰라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가 우연히 옛날 편지를 발견해서 덧붙였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할지, 고맙다고 말해야할지 사실 그것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두 마음을 다 전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흘러 조금 더 마음이 정리되면, 그래서 혜란씨에게 확실하게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을 때, 그때 또 편지하겠습니다.
웅현에게 처음 받은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