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편지-
당신과 나 사이에 거리가 있어야 당신과 나 사이로 바람이 분다.
당신과 나 사이에 창이 있어야 당신과 내가 눈빛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
-황경신 ‘생각이 나서’ 중 043 거리-
“뭐해?”
미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혜란의 대학동기인 미현은 디자인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2년째였다. 이따금씩 미현은 혜란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공부를 위해 세상과 완벽하게 단절하고 사는 미현에게 혜란은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영화 보고 있어.”
“영화? 무슨 영화?”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이랑 비포 선라이즈랑 비포 선셋이랑..... 아이언 마스크랑..........또 뭐 봤지? 지금은 사랑의 블랙홀 보고 있어.”
“뭐? 계속 영화만 보냐?”
“그냥 보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이상한데?”
“뭐가? 나 원래 영화 보는 거 좋아하잖아.”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줄줄이 보는 이유가 뭐야?”
“이렇게 보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누구? 감독? 같은 감독 작품이야?”
“아니. 모르겠다, 나도. 왜 이러고 있는지”
모두 다 웅현이 이야기했던 영화였다. 시간 나면 영화 보는 게 취미라던 웅현은 만나는 자리마다 쉴 새 없이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혜란은 그 영화들을 하나 둘 기억해두었다가 하루 종일 집에서 그 영화들을 봤다. 이렇게 하면 그를 조금 더 알 수 있을까. 아니, 알고 싶다는 게 혜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만약에 말이야...”
“응.”
“나랑 정말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어. 뭔가 쿵짝쿵짝 박자가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런데 그 사람에게 애인이 있으면 난 바로 포기해야하는 걸까?”
“야, 착한 척 하지마. 니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상대방도 그렇게 느끼고 있을 거야. 다만 어느 정도냐가 문제인거지.”
“그런가?”
“그 사람 좋아해?”
“같이 있으면 좋아. 편하고 즐겁고. 내가 느끼기엔 그 사람, 적어도 나랑 있으면 즐거워하는 것 같아.”
“도대체 누군데?”
“아직 이렇다하게 말할 정도는 아니야. 나중에 말해줄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마음처럼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서로가 만나서 즐겁다는 건 언젠가는 발전할 감정이 있다는 얘기 아닌가?”
“그럴까?”
“만나면 뭐해?”
“뭐 그냥 다른 사람들 하는 것처럼, 영화보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술 마시고….”
“데이트 하냐?”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니 친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뭐 얼른 그 남자가 상대방 정리하고 너랑 잘 됐으면 좋겠다. 지금 니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가 심란해질 지경이야.”
“그 관계를 정리시킬 만큼인지는 모르겠어 내 마음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와. 만나자. 나도 계속 갇혀서 공부만 하니까 답답하다. 코에 바람 좀 넣어야지.”
“그래, 내가 그쪽으로 갈게.”
“응, 와서 연락해."
미현과의 통화를 끝내고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이 그대로 모니터 속에 갇혀있었다. 파란 옷을 입고 블루스크린 앞에서 이리저리 모션을 취하는 리타를 필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겠지.’ 혜란은 혼자 중얼 거렸다. 혜란은 웅현을 만나면서 그가 얼른 헤어지길 바란다던지 그래서 얼른 자신의 남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던지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정말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미현이 말했다. 착한 척 하지 말라고. 그렇다면 욕심을 내도 좋은 걸까. 이보다 더.
혜란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미현의 말에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오랜만에 만난 미현은 밝게 웃으며 들어왔지만 이전보다 핼쑥해져 있었다.
“뭐 읽어?”
“삼국지.”
“삼국지? 너 이런 책 안 보잖아.”
“그냥, 필독서 같은 거잖아.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어.”
“일단, 얘기는 이따가 하고. 커피 사서 올게.”
혜란은 한국소설 이외에 다른 소설들을 잘 읽지 않았다. 안 읽는다기보다 못 읽는다는 표현이 맞았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하나의 스토리를 전개해나갔는데, 혜란이 직접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서는 그저 상상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도 해서 이야기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런 혜란이 어느 날 갑자기 삼국지를 읽기 시작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읽어 왔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읽을 책이었지만 혜란과 삼국지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웅현 때문이다.
혜란은 우유거품이 잔뜩 올라가 있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일부러 시나몬 가루를 더 얹어서 마시는 모습을 보며 혜란은 또 다시 웅현을 떠올렸다.
“혹시 허드슨 호크라는 영화 봤어요?”
“아뇨, 누구 나오는 영화예요?”
“브루스 윌리스요. 오래된 영화예요. 91년작. 현대판 괴도 루팡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허드슨 호크가 주인공 이름인데, 마지막 장면에 남자 주인공이 에스프레소잔에 카푸치노를 마시는 게 나와요. 윗 입술에 우유거품이 묻은 채로 씨익 웃고 끝나죠. 그 뒤로 카푸치노가 꼭 마셔보고 싶었어요.”
그 이야기를 하는 웅현의 모습이 떠올라 혜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혼자 실실 웃긴! 무슨 일이야, 말 좀 해봐.”
“그럴 때 있어? 세상의 모든 노래가 내 이야기 같을 때. 유치하지? 심지어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도 다 내 이야기 같아. 하나같이 가슴을 찔러. 자꾸만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해.”
“어차피 그 노래도 우리 또래나 아니면 우리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들이 작사하고 작곡하잖아. 우리보다 경험이 많았으면 더 많았지 적지는 않을 걸? 다만 아이돌 입맛에 맞게, 10대의 취향에 맞게 바꿨을 뿐이야.”“그럴까?”
“어차피 사람의 마음은 비슷하잖아.”
“응.”
미현의 이야기를 듣고 혜란은 생각했다. 스무살 무렵 풋내기 사랑을 할 때만 해도 세상의 모든 노래가, 세상의 모든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정말 미현의 말처럼,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상대방이 나에게서 몇 번째인가와 같은 순서에 상관없이 사람의 마음은, 사랑의 감정은 비슷한 걸까.
“뭐하는 사람이야?”
“카피라이터.”
“그래? 근데?”
“전에 같이 일했던 대리님이 소개해줘서 잠깐 아르바이트했거든. 그때 만났어.”
“그게 다야?”
“그 사람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그냥 같이 있으면 좋아.”
어느 날엔가 웅현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날따라 술이 받지 않았던 혜란은 볼이 발그레해진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고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웅현은 ‘예쁜데요, 뭘.’ 이라고 무심히도 말을 던졌다. 또 어느 날엔가는 혜란이 시시콜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에 대해 자책하며 버릇처럼 주먹으로 이마를 때리자, 웅현은 혜란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며 말을 많이 하게 된다고 했다. 그러니 걱정말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혜란이 ‘제가 편한가보죠 뭐’ 라고 우스개소리를 하자, 웅현은 ‘혜란씨랑 있으면 시간이 참 빨리 가요.’ 라고 대답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혜란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렇게 오해해도 좋은 걸까 고민하다가 또 아니면 어떡하지,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닐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잠깐만, 그럼 서로의 마음은 확인한 거야?”
“확인이라니?”
“그렇게 둘이 자주 만날 때는 뭔가 이유가 있다거나, 아니면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거잖아.”
“글쎄, 확인이 가능할까?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기는 할까 지금?”
“키스는 했니?”
“아니.”
“그럼 손은?”
“아니.”
혜란이 웅현을 알고 지내는 4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스킨십도 없었다. 심지어 도로 위를 걷다가 뒤에서 자동차가 달려올 때도 손 내밀어 혜란을 당기지도 않던 웅현이었다. 조심스럽거나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혜란은 웅현에게 어떻게 확인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확인이라는 건 정확히 뭘 의미하는 걸까. 마치 유부남이 내연녀에게 곧 아내와 이혼할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하는 믿음의 언어일까, 아니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사이, 소울메이트와 동의어일까. 미현 말고 또 다른 친구도 혜란에게 물어왔다. 둘이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느냐고. 웅현과의 관계 진전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구체적이라거나 현실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미현마저 이렇게 물어오자 그제야 ‘아 그래야 하는 거였나?’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왜 웅현을 이토록 자주 만나고 있나?’ 라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창밖 너머로 시선을 던지고 한참 생각에 빠졌던 혜란은 고개를 돌려 미현을 다시 쳐다봤다. 미현은 이야기 내내 조그맣게 한숨을 내뱉거나 즐거운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너 근데 아까부터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 무슨 일 있어?”
“우리 나이가 28살인데, 지금 만나는 이 남자를 놓치면 그 뒤에 또 다른 남자가 있을까? 왠지 난 없을 것만 같아.”
“요즘 서른 넘어서 결혼하는 여자들도 얼마나 많은데, 28살이 뭐 어때서!”
“그냥, 이 남자를 놓치고 나면 그 뒤에 아무도 없을 것 같아.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져.”
“왜 마음이 조급한데?”
“오빠가 결혼하고 싶대. 나도 결혼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지금까지 누군가를 만나면 한번쯤은 ‘이 사람하고 결혼하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이젠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거야. 결혼이라는 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구. 오빠가 좋긴 한데 당장 결혼할 생각은 없어.”
“지금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굳이 할 필요는 없어.”
“그래, 1~2년 살다가 그만둘 것도 아닌데 신중해야겠지. 하지만 모든 건 타이밍이라는 게 있잖아. 아니다 싶어서 그만뒀는데 내 결혼 타이밍이 더 이상 없거나 너무 늦으면, 그땐 후회할 것 같아. 그런데 중요한 게 뭔 지 알아? 이 남자를 봐도 뜨겁지가 않아. 오래된 연인사이처럼 그냥 편하기만 해.”
“연애는 좋으려고 하는 거잖아. 그리고 결혼은 또 연애랑 다른 문제잖아. 그런 마음이라면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혜란은 입으로는 미현을 위로하면서 머리로는 웅현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언젠가 그 둘도 타이밍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웅현의 말에, 그런가요? 라고 반문했었다. 웅현은 자신이 늘 타이밍을 못 맞추는 것 같다고 했다. 생각보다 수능 점수가 낮았지만 재수할 타이밍도 못 맞췄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취업할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오랜 시간동안 놀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애마저도 타이밍을 놓쳤다고 했다.
“연애는 왜요?”
“헤어질 타이밍을 놓쳤어요.”
“아....”
“사귄지 2개월쯤인가, 3개월쯤 지났을 때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었어요. 차라리 그때 헤어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이제는 얽혀있는 문제들이 너무 많아서 선뜻 헤어지자고 할 수도 없어요.”
“아, 그렇구나. 타이밍이라는 게 어느 순간 번쩍 하고 올 수도 있지만 자기 의지로 만들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재수도, 취업도 결국엔 더 잘되려고 시간을 늦춘 거라고 생각하면 되죠.”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요.”
혜란은 연애의 타이밍에 관한 이야기는 쏙 빼고 적절한 말과 생각으로 웅현을 다독여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금도 그 타이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6년의 연애에 마침표를 찍을 타이밍. 그러면서 혜란은 아주 사소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감정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심이었다. 이제. 누군가 이쑤시개만 봐도 그 남자가 생각이 난다며 울음을 터트린 적이 있다. 혜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도, 책도, 카푸치노도, 타이밍이라는 단어도…. 세상 모든 것들이 웅현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혜란은 하루종일 웅현을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