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편지-
타클라마칸. 돌아나갈 수 없는-
2009년 6월, 거리가 초록을 머금었다. 사람들의 웃음 속에 싱그러움이 묻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계절이었다. 전 회사 대리의 소개로 진행되던 프로젝트도 4개월째 접어들면서 슬슬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고 그 와중에 혜란은 웅현과 사적으로 몇 번 만났다. 대개는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거나 새로운 연극을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했다. 알고 지낸 지 4개월이 흘렀고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아직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다만 더 알고 싶고, 그래서 더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없었다. 결국 심란해진 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감정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이 계절의 싱그러움에 이 기분을 떨쳐내야지. 며칠 전 집 근처 작은 미술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타이틀로 전시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혜란은 그곳에나 가볼 작정으로 편한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평일 오후답게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특별히 크게 홍보하는 일도 없었고,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작품이 아니라서 그런 듯했다. 오히려 한산한 미술관이 혜란은 마음에 들었다. 또각또각 몇 걸음의 구둣소리가 들리고 터벅터벅거리며 걷는 혜란의 발소리가 전부였다. 간단하게 작품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 팜플렛을 들고 조용히 화살표를 따라 걸으며 작품들을 감상하던 혜란은 한 작품 앞에 우뚝 멈춰섰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망망대해 한 가운데 덩그라니 놓인 배 한 척. 어디로 떠나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론가 돌아오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누가 그 곳에 있는지 아니면 아무도 그 곳에 남아있지 않은지도 알 수 없는 그런 그림. 가라앉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잠시 흔들리고 있는 걸까.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그런 그림이었다. 혜란은 그 앞에 한참 서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평화로운 한 때를 그렸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혜란이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슬프게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혜란씨!”
누군가 혜란의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웅현이었다.
“아, 네! 여기 어쩐 일로...”
“혜란씨랑 같은 이유죠.”
“네?”
“그냥 그림 보러 왔어요. 근데 언제쯤이면 내가 말할 때마다 안 놀랄 거예요?”
“아....... 뜻밖이라서요.”
“아 그런가? 근데 왜 이 그림 앞에서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아, 제가 그랬어요?”
“네. 완전 심각했어요. 가서 인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 저 배가 어디로 가는 걸까 누가 타고 있을까 뭐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요.”
“혼자 조용히 여행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여행 중일까요?”
“보는 사람 마음이잖아요. 하나의 그림에 하나의 이야기만 담기엔 부족하니까. 보는 사람에 따라 이런 이야기도 담았다가 저런 이야기도 담았다가 하는 거죠 뭐. 어쩌면 그게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구요.”
“음........그럴 수도 있겠네요.”
“혹시 점심 드셨어요? 밥 먹으러 갈래요?”
“지금 몇 시죠?”
“3시.”
“아, 그러고 보니까 아직 밥을 한 끼도 안 먹었어요.”
“밥 먹으러 가요.”
“네. 아! 근데 평일 이 시간에 왜 여기 계세요?”
“아, 말 안했나? 저 그때 그 프로젝트까지만 하고 그만두기로 했어요. 회사에서는 붙잡는 분위기인데, 머리 좀 식혀야겠어요. 너무 치열하게 살았더니 좀 쉴 필요가 있겠더라구요.”
“그럼 그만두신 거예요?”
“아직은 아니죠. 곧 그만둘 거예요. 오늘은 잠깐 나갔다 온다 그러고 왔어요.”
“아.....”
“혹시 카레 좋아해요? 카레나 먹으러 갈까?”
“네, 뭐.”
주변에 마땅한 카레집을 찾지 못한 혜란과 웅현은 근처 닭갈비 집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앉았다.
“혹시 술 한 잔 하실래요?”
“지금요? 3신데, 낮술 하자구요?”
“싫으면 저 혼자 마시구요.”
“뭐 가볍게 반주 정도는 괜찮겠죠. 저기요,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혜란은 관심없는 척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웅현의 모습을 훑었다. 확실히 웅현은 이전보다 표정이 훨씬 밝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4개월 만에 좋은 일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즐거워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마시자고 하는 혜란에게 웅현이 물었다. 글쎄, 무슨 일이 있다고 해야하는 걸까. 그게 좋은 일인걸까 나쁜 일인걸까. 굳이 웅현에게 말해 무엇 할까.
“웅현씨는 낮술 해본 적 없어요?”
“있기는 있죠. 근데 일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무래도 어려웠지 않겠어요?”
“아, 그렇겠네요. 그러고 보니 저도 한 4년 전에 마셔보고 못 마셨네요.”
“그때는 왜 마셨어요?”
“아, 아마 면접 보고 나오던 길이었을 거예요. 사실 술을 마시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친구 둘이랑 밥 먹고 차 마시려고 했던 거였는데. 친구 중 한 명은 남자에게 차였고, 저는 면접관에게 차였고….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이 된 거죠.”
“그래서 안 취했어요?”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아, 근데 전 그 날 면접이었으니까 복장이 좀... 남들이 보기엔 이상했겠죠?”
혜란은 그때를 떠올리며 조용히 웃었다. 그 날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결국 저녁까지 이어졌고, 남자에게 차였다던 그 친구는 결국 취해서 혜란이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나는 대학 졸업하고 한동안 백수였어요. 욕심이 많았을까, 이상이 높았을까. 내가 원하는 곳에선 날 원하지 않고, 날 원하는 곳은 내가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 1년쯤 놀았어요. 좋게 말하면 취직준비를 한 거지만. 그때는 참 낮술 많이 했어요. 그렇게 마시고 취해서 잠들고 일어나면 또 하루가 가 있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내 처지가 좀 달라질까 싶었던 거죠. 그렇게 허무하게 1년을 버렸어요. 그 시간이 참 아쉬워요.”
웅현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조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웅현을 바라보며 혜란은 하루를 술로 보내고 쓰린 속을 달래며 또 그 다음 하루를 보냈던, 그 시절의 웅현을 보고 싶어졌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혜란은 수능을 마치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보기 좋게 가나다군에 모두 떨어지고 추가합격 발표를 기다리는 1달 남짓의 시간동안 끊임없이 잠만 잤었다. 어떻게든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면서. 어쩌면 웅현도 그때의 혜란과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그때 참 여자친구랑 많이 싸웠어요. 여자친구 입장에선 제가 답답했겠죠. 무슨 일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안하고 그렇게 놀고만 있으니. 아,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요? 사실은 그 전 날에도 여자친구랑 다퉜어요. 이제는 다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끊임없이 다툴 거리가 생겨요. 그래서 그 날도 갑자기 혜란씨한테 술 마시자고 했어요. 뭔가 너무 답답해서.”
혜란은 웅현의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웅현이 여자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혜란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못한다는 게 더 맞겠다.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혜란이 넘어갈 수 없도록 그어진 금이기도 했고, 열어봐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이기도 했다.
“혜란씨는 왜 자기 이야기를 잘 안해요?”
“아, 제가 그랬어요?”
“주로 내가 이야기하고, 혜란씨는 듣는 것 같아요. 아, 아닌가? 아무튼 자기 이야기는 잘 안하는 편인 것 같아요.”
‘내가 그랬던가?’ 혜란은 다만 좋지 않게 기억된 과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풀어놓거나 털어놓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특히나 웅현에게는. 그저 밝고 즐거운 모습만 보여주고 훗날에도 그렇게 기억되기만을 바랬다.
“4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싸운 사람이 있어요.”
“4년 동안이요? 그렇게 싸울 힘이 있다니 서로에 대해 굉장히 열정적인가보네요.”
“그랬나? 우리는 한번도 단 둘이 만난 적이 없어요. 그냥 다 같이 만나서 놀고 이야기하고 술 마시고 그랬죠.”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싸울 수가 있어요?”
“제가 좋아했거든요 그 사람.”
“아...............”
“눈치가 없었어요 그 사람. 내가 좋아한다는 걸 한참 후에 알았대요. 그것도 같이 다니던 형이 말해줘서 알았다니 참. 그런데 자기는 아니래요. 그 말을 듣고서도 한참동안 감정이 정리가 안됐어요. 그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니까, 그때 같이 사진 수업을 듣고 있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일주일에 한 번은 봐야하니까 아마 더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자꾸 이 사람은 내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하고.”
“어떤 행동이요?”
“새벽에 술 마시고 전화가 와요. 그러면 전 잘 자고 있다가도 이제 막 자려고 했다거나 아직 안 잤다는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 그 전화를 받았어요. 분명히 자다가 일어난 목소리였는데도요.”
“아마 그 사람도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럴까요? 전화와서는 별 얘기 안해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간 끊죠. 그러고 나면 난 쉽게 잠들지 못했어요. 심란했거든요. 어느 날엔 또 술 한 잔 걸치지 않은 목소리로 악몽을 꿨다며 전화를 걸어왔어요. 평소 답지 않은 모습으로 칭얼거리는데, 또 마음이 흔들리는 거예요. 주변에 친구들이나, 언니들도 하나같이 그 사람도 나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고 했어요. 아마 주변 사람들 때문에 오해가 깊어진 것 같아요. 주변에선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는데 그 사람은 아니라 그러고. 뭔가 오해가 얽히고 설켜서 감정의 골까지 깊어진거죠. 서로를 너무 이해 못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다퉜다는 건 뭔가 서로에게 특별했다는 뜻일지도 몰라요. 사실 서로 무시했으면 그만인 거였잖아요."
혜란은 잔 가득 찰랑이는 소주를 한 입에 털어놓고는 그를 떠올렸다. 아마 다시는 남자와 그토록 치열하게 싸울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만큼 깊은 감정이 아니었을텐데 그렇게 피 흘리며 싸우는 동안 감정이 복잡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지극히 부족한, 그러나 연민이라고 하기엔 지극히 충분한.
“나도 그런 친구 하나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혜란씨랑 이름도 비슷하네요. 혜린이거든요. 비슷한 것 같으면서 참 다른 이름이네요.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어요. 결국엔 지금은 친구로 지내요. 그 친구는 얼마 전에 첫 아이도 낳았어요. 그 모습을 보고 나니까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줄 거예요. 설마 아직도 싸우는 건 아니죠?”
“며칠 전에 끝났어요. 어떤 얘기를 하다가 우연히 만나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4년 만에 처음으로 단 둘이 만났어요. 얼마나 어색하던지. 그런데 술을 몇 잔 마시다보니 어색함도 없어지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게 됐어요. 그리고 오해도 풀었죠. 사실 그 날 좀 많이 마셔서 기억은 잘 안 나요. 그런데............”
“그런데요?”
“제가 키스했어요.”
“아, 그 사람한테요?”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뭐 핑계를 대자면 뭐든 댈 수 있겠죠.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게 아마 가장 적절한 핑계일 것 같네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제야 깨달았어요. 우리는 키스를 해도 그 이상의 관계 로 발전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요. 허무했어요. 그리고 제 자신이 너무 처량했어요. 확실하게 모든 관계가 정리된 거죠. 우리는 그런 사이가 됐어요.”
웅현은 마땅히 해줄 말을 찾지 못해 고민하는 듯 보였다. 혜란이 웅현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했을 것이다. 어차피 제3자의 입장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이 관계에서 느낀 게 있어요. 섣불리 오해하지 말자. 그리고 상대방에게, 혹은 이 관계에 특별히 의미부여 하지 말자. 이젠 모든 게 조심스러워요. 덕분에.”
어쩌면 웅현에게는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다. 웅현에게 묘한 감정을 갖고 있는 혜란으로서는 더더욱. 술 때문일까. 분위기 때문일까. 혜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던 웅현의 말 한마디 때문일까. 혜란은 손가락 끝으로 소주 잔 위를 따라 한없이 원을 그렸다.
“누군가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무언가 하나쯤 털어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요? 그런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데.”
“부담감이라기보다 사실은 나도 이렇게 상처가 많은 사람이에요, 라는 걸 밝히고 서로를 다독이며 보다듬어주고 싶은 거겠죠.”
2달 전 버스에서 우연히 웅현을 만났을 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웅현의 뒷모습을 봤을 때 그 모습이 너무나도 쓸쓸하고 안쓰러워 혜란이 보다듬어 주고 싶었던 마음과 비슷한 걸까. 웅현도 소주 잔을 조용히 털어넣고는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상처가 많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조금 더 사랑하기 쉽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서로가 가진 아픔이 어떤지 아니까, 아니 안다기보다 그 아픔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 배려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아닌 것 같아요.”
“왜요?”
“지금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어딘지 모르게 묻어나는 그 우울함이 좋았거든요. 상처투성이 소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좋았어요.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전부였어요. 그 슬픔은 점점 더 바닥으로 내려가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죠. 지금도 그래요. 이제야 깨닫게 된 거죠, 우리는 너무 다르다는 걸.”
“다른 모습이 서로를 보완할 수 있잖아요.”
“그런가.”
혜란은 말을 내뱉어놓고도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가끔씩 웅현의 말 속에서 여자친구에 대한 불신이 묻어날 때마다 내심 기뻐하던 혜란이었다. 그리고 웅현과 대화할 때마다 주제가 딱딱 맞아 들어가고 공통관심사가 생길 때마다 그래, 이거야! 를 속으로 외치던 혜란이었다. 나에게 없는 상대방의 모습이 나에게 도움을 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하루종일 웅현을 생각하는 걸로는 모자라서 이제 그의 말이라면 모든 맞춰서 대답하고 있다니. 큰일이다. 혜란은 순간, 큰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속도와 방향에 상관없이 더 이상 혜란은 이 관계에서 발을 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서로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 돌아나갈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는 관계. 테이블 하나를 마주 하고 수많은 감정이 뒤섞이고 있었다. 2009년 6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