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편지-
순수한 진심에 적당한 연민과 어설픈 욕심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감정.
언제나 선뜻 물러날 수 있지만 무거운 두 발이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
아마도 그 날은,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비가 한 움큼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고 기억한다.
“오늘 비 온다는 얘기 있었나요?”
“네, 아마.”
“그럼 파전에 막걸리 하실래요?”
“네?”“초면에 이러면 안되는 건데, 사실 술이 마시고 싶은데 딱히 불러낼 사람이 없어서요. 불편하시면 다음에…….”
“괜찮아요. 어디로 갈까요? 아는데 있으세요?”
혜란은 괜찮다고 대답을 해놓고도 스스로 놀랐다. 처음 본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잘하는 성격이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술을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세요. 팀장님한테 메모만 남겨놓고 나올게요.”
“아, 네.”
웅현이 자리를 뜨고 나자 혜란은 주먹을 쥔 손으로 이마를 몇 번이고 두드렸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는 생각으로부터 온 자책이었다. 그냥 다음에 마시자고 할 걸 그랬나, 너무 쉽게 대답한 건 아닐까, 낯가림이 없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처음 만났는데 바로 술부터 마시는 것도 이상하진 않을까……
도대체 뭐에 끌렸을까. 수만 가지 생각이 혜란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나가요, 우리.”
“네? 네.”
“원래 그렇게 잘 놀라요?”
“네?”
“제가 무슨 말만 하면 왜 이렇게 깜짝깜짝 놀라요. 네? 네? 하면서.”
웅현은 그런 혜란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제야 혜란은 웅현의 볼에 움푹 파인 보조개에 끌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혜란은 웃는 모습이 예쁜 남자에게 자주 반하곤 했다. 스무살 때 만났던 남자친구도 사실 그의 웃음에 반해서였다. ‘쿡쿡’ 거리며 웃는 그의 모습은 혜란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뒤로도 웃음이 예쁜 남자를 종종 만나곤 했다. 혹은 다른 이유로 만난 남자친구에게서도 시간이 흘러 예쁘게 웃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웅현과 혜란은 저녁 6시가 못된 이른 시간에 술집으로 들어갔다. 둥그런 양철 테이블이 대여섯 개쯤 놓여있고 천장에 달린 조명은 몇 개쯤 꺼져서 어둑어둑하고 허름한 술집이었다. 아르바이트이긴 했지만 처음 만나는 자리라 꽤나 신경 써서 입고 갔던 혜란에게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해물파전 하나랑 누룽지 막걸리 한 병 주세요.”
“일은 왜 그만뒀어요?”
“대학 졸업하고 바로 일 시작했더니 좀 쉬고 싶었어요.”
“지금 몇 년차에요 그럼?”
“지금도 일하고 있었다면 5년차요.”
“아 그렇구나. 갑자기 술 마시자고 해서 저 이상한 놈으로 보는 거 아니죠?”
“조금?”
“아.”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혜란은 ‘조금?’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웅현은 장난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혜란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주말엔 보통 뭐하세요?”
“아, 이거 소개팅 자리인가요?”
“하하, 뭔가 얘기는 해야 할 것 같고, 아직 서로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고….”
“영화 좋아하세요? 전 주말 내내 집에 처박혀서 영화를 본 적도 있어요.”
“밥도 안 먹구요?”
“밥이야 먹죠. 아무리 영화가 좋아도 배는 고프니까.”
“아. 어떤 영화 좋아하시는데요? 장르 구분 없이 좋아하시는 건가?”
“주로 옛날 영화를 좋아해요. 봤던 영화를 몇 번씩 보기도 하구요. 저번 주에는 청춘 스케치 봤네요. 벌써 5번째 보는 거예요. 혹시 봤어요?”
“아뇨. 그런데 거기 나오는 대사는 알고 있어요. This is all we need. A couple of smokes, a cup of coffee, and little bit conversation. You and me and five bucks.”
“아, 그 대사! 에단 호크의 개똥철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중에 하나죠.”
“개똥철학이요?”
“네. 보시면 알아요. 혹시 비포 선셋이나 비포 선라이즈 보셨어요?”
“아뇨. 그 영화도 못 봤네요. 전 주로 역사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아 그렇군요. 기회 되시면 꼭 보세요.”
혜란은 웅현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스무살 때 쿡쿡 거리며 웃던 남자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역사물을 좋아하던 혜란과 달리 그는 로맨틱 코메디물을 좋아했다. 사귄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던가, ‘킹덤 오브 헤븐’을 보고 싶어하던 그녀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로맨틱 코메디물을 보려고 했던 그가 맞붙었다. 사실 ‘킹덤 오브 헤븐’은 러닝타임이 장장 2시간 20분이나 되는 긴 영화여서 역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영화이기는 했다. 결국 그 날은 그가 원하는 대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킹덤 오브 헤븐’은 결국 다른 친구와 봤으니까. 역사물과 로코물 사이. 혜란과 그의 사이는 딱 그만큼 멀었다. 웅현이 주문한 파전과 막걸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노릇노릇하게 구어진 파전과 뽀얀 막걸리가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아, 역사물 좋아하시면 혹시 킹덤 오브 헤븐 보셨어요?”
“네.”
“감독판으로도 보세요. 한 3시간쯤 되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보셔야할 거예요.”
“괜찮아요. 그런 영화 좋아해요.”
“아이언 마스크도 보셨겠네요?”
“봤던가? 사실 한번 보고 나서도 잘 기억 못해요. 책도 그렇고, 심지어 사람 얼굴도 잘 기억 못하는 편이라…. 책도 영화도 다시 보면 아! 하게 되고 사람도 상대방이 뭔가 알만한 사건을 가지고 아는 척 해야 그제야 아! 하게 되는 거죠.”
“다음에 저도 초면인 것처럼 대하시는 거 아니예요?”
“아닐 거예요. 이렇게 같이 술도 마시는 데 기억 못하면 그건 정말 문제가 있죠.”
몇 시간쯤 흘렀을까. 파전 이외 몇 개의 안주가 더 테이블에 놓이고 몇 개의 막걸리 주전자가 갈아치워졌다. 웅현은 보기 좋게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혜란도 그의 얼굴만큼이나 붉은 빛을 띄었다. 그 사이 수많은 영화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고, 이따금씩 공감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이 뒤섞여 공기 중에 나돌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동안 혜란은 자신과 웅현이 참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웅현 역시 그렇게 여기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안녕 추파춥스 키드라는 책 봤어요?”
“아뇨.”
“희수라는 여자가 대희라는 남자에게 휴대폰 번호 대신 이메일 주소를 건네줘요. 읽는 동안에는 그게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거 알아요? 그렇게 느리게 가기 위해선 포기해야만 하는 것도 있어요. 하루에도 수없이 외로움과 그리움에 대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운명 같은 사랑이나 가슴 아픈 헤어짐에 대한 책들도 쏟아져 나와요. 우리를 재촉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한 수많은 자극을 견뎌내며 사랑을 이어나가기에 어쩌면 편지는 어리석은 짓인지도 몰라요. 그게 손편지가 아니라 이메일이라고 할지라도. 버튼만 누르면 상대방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간단하고 쉬운 일이 있는데, 눈앞에 뻔히 보이는 길 대신 한참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 같아요.”
“난 그래서 좋아요. 적당히 거리를 둘 수도 있고. 남녀관계에는 언제나 일정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동행과 동반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요? 동행은 나란히 평행선을 따라 걷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동반은 내 등에 상대방을 업고 그 길을 걷는 거죠. 저는 동반보다는 동행을 선택하는 편이에요. 지치지 않게 곁에서 바라봐주면서,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 같아요.”
혜란은 그때 눈치 챘어야 했다.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그 이야기를 끝으로 혜란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술자리는 언제나 쉽게 취하는 법이었다. 눈을 뜨니 집이었고 어떻게 되돌아왔는지 혼자서 왔는지 그가 데려다주었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혜란은 웅현과 몇 번의 술자리를 가졌다.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이야기의 주제는 늘 영화와 책이었다. 웅현은 다양한 시대와 장르에 걸쳐 많은 영화를 알고 있었고 혜란은 그 중 일부만 아는 정도였지만 둘의 이갸니는 끊길 줄 모르고 흘러갔다. 성인 남녀 둘이 만나 술을 거나하게 마시면서, 이따금씩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일 하나 없이 2개월 동안 관계를 지속시켜나간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껏 가벼운 만남을 유지해오던 혜란에게 어쩌면 그 관계는 신선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점점 그에게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알면서도 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으니까. 어떠한 문제점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방법까지 알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다시 현재로 돌아오자. 웅현을 만난지는 벌써 1년이 넘었고 그동안 혜란의 곁에는 수많은 남자가 스쳐지나갔다. 웅현은 어떤 식으로든 가질 수 없는, 아니, 곁에 둘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혜란은 웅현은 웅현대로, 다른 남자는 남자대로 구분지어 만나기 시작했다. 지금 혜란을 꼭 끌어안은 채 잠든 김건, 이라는 이름의 남자도 그 중에 하나였다. 웅현만큼이나 영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다는 점에 혜란은 끌렸다. 그러나 그 뿐, 더 이상 그에게서 웅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정말 헤어질 때가 된 것이었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나가자.”
화장실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온 건이 혜란에게 말했다. ‘그래요’라고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혜란에게 건은 살짝 입맞춤을 하고는 돌아서서 거울을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에도 혜란은 건에게 어떤 식으로 이별을 이야기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리 착하게 부드럽게 속삭이듯 말해도 이별은 늘 아프고 불편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상처를 주고 누군가는 상처를 받아야하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일. 모텔 밖으로 나온 혜란과 웅현은 근처 감자탕 집으로 향했다. 전혀 배고프지 않았지만, 게다가 감자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혜란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건을 따르기로 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건은 배가 꽤 고팠던지 허겁지겁 감자탕을 먹었고 그때 불쑥 혜란이 말을 꺼냈다.
“뭐? 왜?”
“그냥요.”
“다른 남자 생겼어?”
“아뇨.”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밥을 먹던 건이 혜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라니, 이별에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걸까. 이유가 필요하다면 몇 가지쯤 거짓으로 둘러댈 수도 있었다. 그 중에 웅현도 있을까.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밥 먹다 말고 해?”
“그럼 어디서 얘기해요.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였어요.”
“헛, 참.”
“지겨워요 이제.”
“너 지금 내가 얼마나 황당한지 모르지? 그럼 너 우리 부모님은 왜 만났어?”
“오빠가 인사드리러 가자고 하기도 했고, 크게 싫을 이유가 없었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 내가 너랑 결혼까지 생각하는 줄 몰랐냐고.”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를 묻는 거라면, 미안해요. 난 아니었어요.”
건은 손으로 들고 먹던 뼈다귀를 바닥에 내팽겨쳤다. 식당 안에 있던 몇몇이 놀라 숨을 죽이며 둘을 쳐다봤다. 보기 좋은 장면이 아님은 확실했다. 보는 입장에서도, 보여주는 입장에서도 썩 유쾌하지 않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
“싫어요. 우리 그만해요.”
분을 이기지 못한 건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어쩌면 건은 한동안 연락을 안 할 지도 모른다. 어느 날엔가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치솟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연락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곤 화를 내거나 설득하거나 이유를 분명하게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건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혜란은 메일 끝에 집 전화번호를 적었고, 이제 웅현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2010년 3월, 누군가와 헤어지고 또 누군가를 기다리기에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