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편지-
‘.......사랑이에요?’
‘아니요. 단 한 번도 사랑인 적 없었어요. 그때도 지금도.’
‘그럼요?’
‘단지 곁에 있고 싶을 뿐이에요.’
‘그럼 나는요?’
“맑고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공기가 다시 건조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영동 지방은 건조 주의보가 경보로 강화됐고, 전국 곳곳에 건조 주의보가 새롭게 내려졌습니다. 특히 영동 지방에는 강풍 예비 특보까지 내려져 있어 산불 등 화재 예방에 각별히 유의하셔야겠습니다. 내일은 전국이 맑겠지만, 아침에 서해안과 내륙에는 안개가 끼는 곳이 있겠습니다. 내일 서울의 낮 기온 18도를 비롯해 중부지방 오늘보다 2~3도 정도 기온 오르겠습니다. 물결은 동해 먼 바다에서 3미터로 높게 일겠고, 서해와 남해상엔 안개 끼는 곳이 있겠습니다. 금요일엔 전국에 비가 내리겠고, 중부지방은 일요일에도 비가 올 것으로 보입니다. 기상정보였습니다.”
사랑을 하기에 좋은 날씨, 나들이 가기에 좋은 날씨, 나들이 가서 사랑을 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가 다가오고 있었다. 2009년 4월이었다. 본격적인 봄의 시작.
혜란은 며칠 동안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일을 그만둔 지 세 달쯤 지나자 집에 있는 게 답답했다. 그래서 눈을 뜨면 밖으로 나와 하루 종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주로 바쁜 일에 치여 하지 못했던 일을 했다.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는 전시회를 찾아 예술의 전당을 가기도 했고 시립미술관의 상설전시를 보러 가기도 했으며, 집 근처 소마미술관에 전시된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또 가끔은 영화관을 찾아가 제일 먼저 시작하는 영화들 중 아무거나 하나를 골라서 커피를 사들고 앉아 보다가 나오기도 했다. 지난 4년 동안 편집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누리지 못한 여유로움이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보다 늦게 잠들었던 탓에 10시쯤 눈을 떠서 씻고 11시쯤 집을 나왔다. 딱히 정해놓은 행선지는 없었으나 일단 지하철역에 도착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다 싶은 곳이 없으면 2호선을 타고 멍하니 돌아다녀도 좋을 일이었고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달려도 좋을 일이었다.
결국 혜란을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차창 밖으로 하나 둘 넘어가는 봄을 만끽하기에 좋은 날씨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1시는 버스를 타기 좋은 시간이었다. 출근시간도 아니었고 점심 즈음이라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하지 않았다. 혜란은 버스 정류장에 눈을 감고 멍하니 앉아 봄의 햇살을 내려 받으며 앉아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누려보는 한가로운 일상이었다. 하루 종일 뚫어지게 쳐다보던 모니터 속 색감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지난 4년은 늘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고민하고 레이아웃에 대해 갈등하며 표현방법에 대해 괴로워했던 나날들이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다가는 20대 청춘이 증발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모두 다 집어던져버리고 나온 혜란이었다.
생각보다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혜란의 또래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50대 중년의 아주머니들과 외근을 나가는 듯한 3,40대 남자들이 전부였다. 앉을 자리가 없어 혜란은 버스 기둥과 손잡이를 하나씩 잡고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음악이라도 들을 셈으로 가방을 뒤적이다가 이어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걸 알고 혜란은 두리번거리며 버스 안팎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운전석 뒤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시선이 꽂혔다. 웅현이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타이어 때문에 불룩 솟은 곳에 두 다리를 걸쳐놓고 두 손은 깍지를 낀 채 가지런히 모아 무릎에 두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혜란은 어쩐지 그의 뒷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한없이 보다듬어주고 싶었다.
당연히 그가 혼자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주말이면 늘 혼자 조조로 영화를 보고 평일에도 퇴근해서 혼자 밥을 먹는다고 해서 당연히 싱글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사실 주말이라고 해서 굳이 여자친구를 만나야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통상적인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이렇게 외롭게 하는 여자라면, 그를 이렇게 혼자 내버려두는 여자라면, 헤어지도록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눈치가 없는 혜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엔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혜란은 웅현이의 휴대폰 속 메인화면이 고양이인 걸 발견했다.
“어머, 고양이 키우는 거예요?”
“귀엽죠?”
“네. 이름이 뭐예요?”
“루피요.”
“근데 혼자 사는데 고양이 키워요?”
“아, 여자친구가 봐줘요. 집 근처에 살거든요.”
혜란은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지금은 표정을 숨기는 게 우선이었다. 입을 손가락 한 마디 만큼이라도 열었다가는 얼굴 표정이 그대로 굳으며 그를 탓할 것 같았다. 만나자마자 통성명 하듯이 애인이 있노라 밝힐 필요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눈치를 챌 수 있는 무언가는 필요했다. 그래야 이런 오해에서 비롯될 상처 혹은 불상사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웅현은 혜란의 표정 변화를 읽었을까. 만약 읽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혜란은 감정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는 여자였다.
혜란은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고양이 같은 여자일 것 같다. 많이 들뜨지 않고 누나 같은 모습으로 늘 웅현 곁에서 조용하게 머무르는 여자일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한 번씩 발톱을 세우고 잔소리를 해대는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내심 그런 못된 여자이기를 바라는 걸까?
“6년째예요. 올해.”
“아, 6살이에요?”
혜란은 웅현의 얼굴은 바라보지도 않고 시선은 계속 휴대폰 화면에 고정시킨 채 물었다.
“아뇨. 여자친구요. 6년째예요.”
혜란이 지금까지 정식으로 사귄 남자는 셋이었다. 그리고 각각 1년, 8개월, 3개월 정도를 만났을 뿐 오랫동안 만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웅현은 6년이라고 했다. 6년이라는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함께 보낼 수 있는 걸까. 아니, 왜 6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하는 걸까. 적지 않은 시간동안 수많은 유혹도 있었을텐데 무엇이 그들은 헤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붙어있게 만든 것일까. 혜란은 궁금했다. 그리고 알고 싶었다.
“이번 정류장은 차병원 사거리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소이비인후과입니다.”
웅현이 안내방송을 듣고 고개를 들더니 두리번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혜란은 웅현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고개를 푹 숙였다. 혜란이 먼저 웅현을 아는 척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혜란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숨어들었다. 웅현이 서둘러 버스에서 내리자 혜란도 그를 따라 내렸다. 어차피 목적지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조금 더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혜란은 그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그의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마냥 그의 뒤를 밟기로 결정했다. 그를 알고 싶었다.
여전히 그의 뒷모습은 쓸쓸했다. 어떤 여자가 이 남자를 외롭게 하는가. 웅현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조용한 남자였다. 내성적이진 않았지만 약간의 낯가림이 있어서 처음부터 나서서 말을 꺼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니 친해지면 꽤나 쾌활해지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신혜란이라고 합니다.”
“아…….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시겠어요?”
혜란과 함께 첫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대리가 소개한 자리였다. 무작정 쉬는 것보다 감 잃지 않도록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다.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웅현을 만났다. 짙은 색 청바지에 검은색 패딩 점퍼를 입은 웅현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입 주변으로 거뭇거뭇하게 자라난 수염과 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며 혜란은 어쩌면 철야를 했거나 밤새도록 술을 마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웅현은 한참동안이나 혜란을 그 자리에 세워두고는 누군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마침내 찾았는지 회의실로 보이는 룸 앞에서 몇 분간 실갱이 한 끝에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오는 폼이며 적당히 나이든 모습이 대리가 말한 팀장인 듯 했다.
“김주영씨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팀장이라는 사람은 지갑에서 주섬주섬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 혜란에게 건내주고는 두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비비며 물었다.
“아, 전에 같이 일했던 대리님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술이 덜 깬 건지 잠이 덜 깬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옆에 나란히 앉은 웅현 역시 혜란에게 명함을 건냈다. 김웅현, 제작 1팀 카피라이터.
“일단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내용은 여기 있는 김웅현대리한테 들으면 되구요. 일정은 아마 다음 주 정도가 될 것 같아요. 일정에 맞춰서 준비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네.”
“제가 사실 3일 동안 잠을 몇 시간 못 자서요.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팀장은 몇 마디 하지 않고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갔다.
“죄송해요. 어색하시죠?”
“아니예요. 괜찮아요.”
“저희가 요즘 일이 좀 바빴어요. 그러고보니 차도 한 잔 안 드렸네요. 녹차? 커피? 어떤 거 드릴까요.”
“아니예요. 괜찮아요.”
“혹시 술 잘 드세요?”
“아 뭐 그냥, 좋아하는 편이에요.”
“앞으로 꽤 오래 같이 일하게 될텐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오늘 술 한 잔 하실래요?”
2월,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설렘처럼 낯선 사람과 새로운 만남을 갖기에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