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편지-
그래,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어.
그러니까 또 바람처럼 돌아올 거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창문이 보이는 방이 있다. 한 가운데 둥그런 테이블이 놓여있고 그 위로 몇 개의 술잔과 물 잔이 뒤엉키듯 놓여있다. 그리고 모든 잔에는 코랄빛 립스틱 자국이 묻어있다. 그 옆으로는 몇 개의 담배꽁초가 재떨이에 부서질 듯 처박혀있다. 밑으로는 또 몇 개의 술병이 나뒹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은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든 혜란은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는 속옷들 중에 자신의 팬티와 민소매 티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골라 입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거울을 미처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눈 화장이 보기 흉하게 반쯤은 번져 있을 것이고 머리는 제 멋대로 흐트러져 있을 것이다. 혜란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손목에 걸어두었던 끈으로 머리를 높이 올려 질끈 묶었다. 그녀가 컴퓨터 전원버튼을 누르자 모니터 불빛이 방 한쪽을 환하게 비췄다.
테이블 뒤편에 놓인 침대에는 전라의 낯선 남자가 얕은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자고 있다. 혜란은 그가 자는 모습을 돌아보며 잠들어 있는 남자의 모습은 언제 봐도 참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혜란은 다시 몸을 돌려 다리 한쪽을 의자에 올리고 무릎에 턱을 괸 채 컴퓨터 부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뭐라고 답장을 하면 좋을까. 혜란은 화면이 다 켜진 후에도 한참을 그 자세로 앉아 고민했다.
김웅현입니다
저는 지금 강원도 삼척입니다. 이곳에 와본 적 있나요? 너무나도 투명하고 맑은 봄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상쾌한 바람은 두 뺨을 스치고 있습니다. 코끝을 건드리는 시원한 바다 내음까지- 분명 고향을 다시 찾게끔 하는 아름다움입니다.
이곳은 삼거리 카페, 햇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당신에게 편지합니다. 3층짜리 이 건물은 이 동네에서 유일한 커피 전문점입니다. 한가롭게 책을 읽는 여자 몇 명과 달콤한 애정표현을 하는 몇몇의 커플이 보입니다. 언젠가 우리도 저들처럼 함께 일 수 있겠죠.
잘 지내셨나요? 이렇게 당신의 안부를 묻는 게 때로는 미안합니다. 길 건너편 오른쪽에는 테니스장이 보입니다. 반소매 차림의 아저씨들이 이리저리 활기차게 뛰고 있습니다. 좋은 봄입니다. 그리고 좋은 오후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어 슬픈 오후입니다.
지난 밤, 혜란은 여기까지 읽다 말고 멈칫했다. 그가 보내온 편지 속 단어들이, 문장들이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그의 편지를 따라 혜란의 눈동자가 함께 불안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혜란은 조용히 생각했다. 혜란은 언제나 그의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읽어 가슴 속 깊이 담아두고 싶기 때문이었다. 혜란은 눈가 가득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들을 참으려고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다시 편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내일은 전남 광양에 내려 가볼까 합니다. 아직은 이르지만 곧 만개한 매화꽃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는 동안에는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영화, 청춘스케치를 다시 볼까 합니다. 뒤늦게 에단 호크에 푹 빠져 환하게 미소 짓던 당신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신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언제나, 늘, 항상.
그리운 마음을 담아, 김웅현
“그리운 마음을 담아….”
혜란은 웅현이 단 한 번도 보고 싶다거나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굳이 달콤한 말이 없어도, 여느 여자들처럼 왜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느냐며 따지지 않아도, 그저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혜란은 침대에 누워 곤히 자는 남자가 깰까봐 다시 한 번 조용히 입을 오물거리며 편지를 따라 읽고는 답장을 어떻게 쓸지 고민했다. ‘나는 아주 잘 지내요.’ 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언제쯤 돌아와요?’ 라고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혜란은 그저 시 한 편으로 그 마음을 대신하기로 했다.
김윤진 - 기다려도 될까요
퍼주기만 하는 사랑 앞에
한없이 무력해지는 영혼
모든 감각을 무디게 하더니
세포 구석구석 파고드는 전율
나는 새벽별처럼 스러집니다
강렬한 한낮태양 같은 그대 앞에
한줌 이슬만도 못한 나약한 여인
입술조차 열지 못한 벙어리 냉가슴입니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사랑
내 몫이 아닐 것 같은 사람
아름드리나무 그늘아래
초망(草莽) 가까이 들리는 풀벌레 소리마저
그대 부르심인 듯 눈 돌리련만
오간데 없습니다
지난여름 세차게 퍼붓던 사랑은
하늘을 선회한 꿈결이었을까요
태풍몰이 지나간 황폐한 잔여처럼
허물어지는 긴 장마 끝 축대에 매달린
날개 젖은 여린 새처럼
파르르 불안으로 햇살지고도
화들짝 웃지 못한 채
처연한 미소 피식 짓고
그렁그렁 눈물이 고입니다
가을바람타고 떠난 구름 같은 그대
이 밤 지새고 나면 혹시 올 것 같음에
나, 기다려도 될까요
어디선가 보고 가슴이 저려 따로 적어두었던 시였다. 혜란은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며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했다. 행여나 자신의 마음이 묻어나지 않더라도 김윤진 시인이 이 시를 쓸 때의 마음만 전해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야, 나 물 좀.”
침대에서 여러 번 뒤척거리던 남자가 눈은 뜨지도 않은 채 혜란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지가 꺼내다 먹을 것이지.’
혜란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다 주었다.
“지금 몇 시야? 왜 벌써 일어났어?”
“아 그냥 잠이 안 와서요.”
“이리와, 다시 자자.”
혜란이 그 동안 만나왔던 남자 중에는 분명 웅현보다 나은 남자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혜란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이 남자도 분명 웅현보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확실히 나았다. 각각 다른 모습과 다른 조건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웅현과 닮았거나 웅현과 비슷하거나 웅현과 가깝거나. 모든 생각의 끝에 웅현이 있었다. 혜란이 그들을 만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실제로 웅현은 늘 곁에 머무는 듯 하면서도 손 닿으면 언제든 사라질 연기 같아서 혜란은 조금이라도 웅현과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그 안에서 웅현을 찾고 또 느끼곤 했다. 상대방이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로 좋은 시간을 갖다 헤어지면 괜찮았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고 지저분한 이별을 맞이한 경우도 있었다.
“아니에요. 먼저 자요. 난 그냥 컴퓨터 하면 돼요.”
“안 피곤해?”
“괜찮아요.”
“그래, 아흠.”
혜란을 자기라며 다정하게 부르던 남자는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동안 그 남자를 내려다보던 혜란은 이제 이 사람과도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그에게서 웅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쉽지만은 이별이 될지도 몰랐다.
이런 지리멸렬한 일상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었지만 그 끝에 웅현이 있을지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더 간절했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은 혜란은 메일의 마지막 부분에 7자리 숫자를 적어 넣었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혜란은 11자리 휴대폰 번호 대신 7자리의 집 전화번호를 적었다. 언제쯤 전화가 올까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되고 못 받아도 그만인 집 전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애절한-
메일 전송 버튼까지 누르고 난 혜란은 다시 침대로 가 남자의 곁에 누웠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품에 혜란을 끌어안았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남자에게 꼭 맞는 자세로 안긴 혜란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웃을 때 마다 움푹 들어가는 그의 오른쪽 보조개와 마르고 차가운 그의 손, 공기를 꾹꾹 누르는 듯 한 그의 낮은 목소리….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그를 그리워하기에 한없이 좋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