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면 회
재수는 승훈과 이복동생인 소희하고 저녁을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방으로 들어가 쉬려고 했는데 전화가 울렸다. 재수는 전화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오빠, 나야.”
지은이였다.
“응.”
“오빠, 이번 주 토요일 날 바빠?”
“아니.”
“그럼 나랑 같이 우리 오빠한테 면회 가지 않을래?”
“그래. 토요일 날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재수도 언제 한 번 준석이한테 면회를 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은이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지은은 오빠의 애인인 마리 언니하고도 같이 면회를 가고 싶어 보육원으로 전화를 했다. 마리가 전화를 받았다.
“언니, 이번 주 토요일 날 우리 오빠한테 같이 면회 가자.”
지은이의 말에 마리는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은은 자신의 상황이 어떤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은 이제 준석과 헤어져야 했다.
“미안해. 갈 수 없을 거 같아. 다음에 같이 가자.”
마리는 지은이 실망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했다.
“그래. 그럼.”
지은은 아쉬워 하며 전화를 끊었다.
지은과의 통화를 마친 재수는 희연이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몸이 불편한 지은이를 위해 차를 좀 빌려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였다. 희연이 차를 빌려줄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래도 희연이처럼 착한 아이라면 자신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세요.”
희연이 전화를 받았다.
“나야, 재수.”
“니가 웬 일이야?”
“부탁이 좀 있어서.”
“부탁? 무슨?”
희연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재수가 자신한테 부탁할 일이 있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차 좀 빌려 줄 수 있니?”
“차? 무슨 일인데 그래?”
희연이의 의문은 더 깊어갔다.
“이번 주 토요일 날 준석이 동생이랑 준석이 면회 가기로 했거든.”
“그런 거라면 버스나 기...”
그 때 희연은 준석이 동생이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아이라는 게 생각났다. 재수가 왜 차를 빌리려고 하는 지 알 수가 있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이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은 희연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제 보니 준석이 동생 때문이었군. 하지만 내 차는 빌려 줄 수 없어. 내 차는 그랜저라고.”
재수는 역시 안 되는 구나 하고 생각하며 실망을 했다. 그 때 수화를 통해 희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운전은 해 줄 수 있어.”
“응?”
재수의 귀가 번쩍 뜨였다.
“준석인 너 보다 내가 오는 걸 더 좋아할 거라고. 걘 여자만 좋아하잖아? 설마 내가 같이 가는 게 싫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나야 그래주면 정말 고맙지.”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돼?”
“그럼 준석이네 집 앞에서 10시에 만나자.”
재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준석이의 집 위치를 희연이한테 가르쳐 주었다.
“알았어. 10시까지 그리로 갈게.”
토요일, 재수는 준석이의 집으로 왔다. 재수가 벨을 누르자 지은이 문을 열어 주었다.
“준비 다 됐니?”
재수가 물었다.
“응. 다 됐어. 조금만 기다려.”
지은은 곧 준비를 마치고 휠체어를 탄 몸으로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라 재수가 지은이를 안고 1층까지 내려와 계단에 앉힌 다음 다시 위로 올라가서는 휠체어를 가지고 내려 왔다. 그리고는 지은을 안아 휠체어에 앉히고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9시 50분이었다.
“여기서 좀 기다리자.”
“기다리다니? 누굴?”
지은이 의아해 하며 물었다.
“올 사람이 있어.”
10시가 되자 희연이가 탄 그랜저가 두 사람이 서 있는 동보주택 앞에 도착했다. 희연이 차에서 내렸다.
“니가 지은이구나.”
희연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지은이를 보며 말했다.
“누구야?”
지은은 처음 보는 언니여서 재수한테 물었다. 오빠의 애인인 마리처럼 뛰어난 미모의 언니는 아니었지만 그 언니한테서는 다른 여자한테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매력이 풍기고 있었다.
“난 재수가 고용한 일일 운전 기사야.”
희연이 재수 대신 대답했다.
“야,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너를 고용해?”
“오늘 점심은 니가 사는 거야. 준석이랑 준석이 동생 것도.”
“응?”
“설마 그 정도도 안 할 생각은 아니겠지? 나 같은 베스트 드라이버를 그 정도 값으로 고용하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고.”
“가끔은 말이야. 난 정말 널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쨌든 점심은 살 거지?”
“그래.”
“그럼 가자고.”
재수가 지은이를 들어 뒷좌석에 태웠고 희연은 휠체어를 트렁크에 실었다. 희연은 운전석에 재수는 조수석에 앉았다. 희연이 악셀레이터를 밟으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언니도 우리 오빠 잘 알아요?”
“응. 같은 풍물패 회원이니까.”
오후 1시가 지나 자유 시간이었지만 준석은 장교한테 테니스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사병 한 명이 오더니 준석이한테 친구와 동생이 면회를 왔다고 알려주었는데 그 중에는 미모의 여인도 있다고 했다.
“면회 왔다면 그만 가야지. 여기까지 하지.”
장교가 말했다.
준석은 장교한테 거수 경례를 하고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위병소로 뛰어 갔다. 사병이 말한 미모의 여인은 틀림없이 마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병소에 도착한 준석은 면회를 온 미모의 여인이 마리가 아니라 희연이인 것을 보고 무척 놀랐다.
“역시 마리가 아니라 실망인가 보군. 하지만 넌 여자는 다 좋아하지 않았냐?”
희연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니가 온 거야?”
“재수한테 일일 운전수로 고용됐어.”
“응?”
준석은 희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재수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재수의 설명을 들은 준석은 희연이한테 정말로 고마움을 느꼈다. 희연이처럼 착한 애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재수한테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하면 돼.”
“도대체가 이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여자들이 내 돈만 뜯으려 드냐고?”
재수가 한탄하듯 말했다.
“나를 민이랑 같이 취급하면 섭섭해. 걔는 순전히 주먹으로 뺐지만 난 엄연히 노동의 댓가라고.”
“암 노동의 댓가지.”
준석이 희연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시내로 나가자.”
희연이의 말에 모두들 희연이의 차에 올라탔다.
원주로 나온 희연은 마린랜드라는 해물 뷔페집이 보이자 그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 건물 밖에는 1인당 25,000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희연이, 너 설마 저기 가려는 거야?”
재수가 놀라서 물었다.
“응.”
“야, 저길 가면 어떡해?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1인당 25,000원이면 네 명이면 10만원이나 되잖아?”
“내가 살게.”
“응?”
“설마 내가 너한테 진짜 점심 사라고 할 줄 알았어?”
재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한 번 짓더니 말했다.
“넌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밌냐?”
“물론. 난 악녀라서.”
희연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준석이 말했다.
“미안해 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내 돈 쓰는 것도 아닌데. 뭐.”
“응?”
“저기 우리 어머니가 사장으로 있거든.”
“니 어머니는 대학 교수라고 하지 않았냐?”
재수가 물었다.
“겸업하는 거지. 실제 경영은 실장님한테 다 맡기고 있지만.”
마린랜드에 도착한 희연은 안으로 들어가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네 사람은 마린랜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준석이 동생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었다. 데스크에 있던 조 실장은 희연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희연이한테로 왔다.
“아가씨가 어쩐 일로?”
“친구가 이 근처 군에 입대해 있어서 면회 왔어요. 점심이나 좀 사 주려고요. 좋은 자리로 안내 좀 해 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조 실장은 그 곳에서 일하고 있는 웨이터를 불러 희연이 일행한테 VIP석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웨이터는 조 실장의 지시를 받은 대로 희연이의 일행을 VIP석으로 안내했다. VIP석에 자리를 하게 된 지은은 놀란 눈으로 희연이를 바라보았다. 화장도 거의 안한 얼굴에 입고 있는 옷은 수수하기 짝이 없었는데 몰고 다니는 차나 들르는 음식점은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하는 것들이었다. 게다가 이 곳의 실장이라는 사람은 희연이한테 깍듯이 예의를 다 하고 있었다.
“언니는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냐니?”
희연은 지은이의 질문 의도를 몰라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부모님들이 보통 사람 같지는 않아서요.”
“희연이 아버지는 건설부 장관이야. 어머니는 방금 전에 들어서 알겠지만 대학교수에다 여기 사장이고.”
준석이 대신 대답하며 동생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난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도대체 전생에 어떻게 살면 너처럼 복 받은 집에 태어 날 수 있는 거냐?”
재수가 물었다.
“미안하지만 난 천주교 신자라서 윤회는 믿지 않는데.”
희연이 목에 건 금십자를 손으로 쥐고 보여주면서 대답했다.
“언니, 우리 같이 음식 고르러 가요.”
“그래.”
희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연과 지은은 음식을 고르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니 동생이 희연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희연이 같은 애를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하긴... 우리도 음식 고르러 가자.”
준석과 재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린랜드에서 실컷 점심을 먹고 나온 그들은 원주 시내를 좀 돌아 다니다가 자동차 극장에 들러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준석이 부대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부대까지 태워다 줄까?”
희연이 물었다.
“아니야. 여기서 버스타고 가도 돼. 동생이나 집에다 데려다 줘.”
“그래. 그럼.”
“오늘 정말 고마웠어.”
“뭘 그런 걸 갖고. 그럼 갈게.”
희연, 재수, 지은은 차에 올라탔다. 지은이의 휠체어는 접어서 트렁크에 실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빨간 불이어서 잠시 정차하고 있었는데 희연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희연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나야, 도현이.”
“오빠가 웬 일이에요?”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지금 어디야?”
“전 지금 원주에 있는데요. 친구 면회 왔다가 지금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래, 그럼 내일 저녁에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싶은데 시간 돼?”
“아무래도 저한테 꼭 하고 싶은 애기가 있는 것 같은데 도착하면 바로 연락 드릴게요. 9시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에요.”
“그래도 돼? 피곤할 텐데.”
“궁금한 건 못 참는 성미라서요.”
파란 불이 켜졌다.
“그럼 끊을게요. 운전중이라서요.”
희연은 전화를 끊고 악셀레이터를 밟았다.
준석이의 집에 도착한 희연은 지은이를 차에서 내려 주었다. 재수도 차에서 내렸다.
“지은이 데려다 주고 내려와. 넌 집까지 태워다 줄게.”
희연이 재수한테 말했다.
“됐어. 여기서 버스나 지하철 타고 가면 돼.”
“왜 그렇게 사람들이 너희 집에 대해 아는 걸 싫어해?”
“희연아, 그런 거 너무 많이 알면 다친다니까.”
“뭐, 그렇게 싫으면 하는 수 없지. 난 그만 갈게.”
“그래, 오늘 정말 고마웠어.”
“언니,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에 또 봐요.”
“그래.”
희연은 다시 차를 몰고 자리를 떠났다. 준석이의 집에서 큰 도로로 나오기 위해 아스팔트 외길을 달리던 희연은 큰 도로로 접어들기 전 사촌 오빠인 도현한테 전화를 걸었다.
“저, 희연이에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검찰청 앞에 있는 커피숍 알지? 그리로 와.”
“알았어요. 지금 그리로 갈게요.”
희연은 전화를 끊고 도로로 진입했다.
희연은 도현과 약속한 커피숍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희연은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숍에는 도현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희연은 도현이 앉아있는 자리로 가서 마주보며 앉았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자 둘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조금 후 두 사람이 주문한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희연은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내려 놓았다.
“그래, 할 얘기가 뭐에요?”
“마리씨랑 결혼하기로 했어.”
도현의 말에 희연은 마리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박 회장한테 보육원 재정 지원을 도와 달라고 했다면 마리는 지금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희연은 그런 일로 박 회장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희연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로 박 회장한테 조금의 부담이라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결국 오빠가 이겼군요.”
“아직 그런 건 아니야. 마리씨의 마음을 얻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난 반드시 마리씨의 마음을 얻을 거야.”
“오빠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에요. 어쨌든 축하드려요. 결혼.”
“그래서 말인데 결혼식 날 피아노 연주 좀 해 줬으면 하는데...”
“얼마 줄 건데요?”
“응?”
“저 같은 유능한 피아니스트를 공짜로 부려 먹으려 하면 안 되죠? 안 그래요?”
“넌 사촌 오빠한테도 돈 뜯어 먹냐? 그리고 니가 무슨 피아니스트야? 실력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연주회 한 번 한 적 없는 그냥 경영학도 학생일 뿐이잖아?”
“오빤 농담 한 번 한 것 같고 너무 정색을 하네요. 아무리 오빠가 저를 미워한다고 해도 제가 그런 일로 오빠 돈이나 뜯어먹겠어요? 걱정 마세요. 연주는 무보수로 제대로 해 드릴테니까. 제 친구 결혼식이기도 한 걸요. 또 부탁하고 싶은 거 있나요?”
“아니.”
“그럼 전 그만 일어날게요. 횡성까지 갖다 와서 조금 피곤해서요.”
희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왔다. 주차장에 주차시킨 차에 올라타기 전 희연은 보육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원장실에서 일하고 있던 마리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희연이.”
“응.”
“우리 사촌 오빠랑 결혼 하기로 했다며?”
“응.”
“준석인 어떻게 할 거야?”
“헤어져야겠지. 다음 주에 면회 가서 준석이한테 말하려고.”
“준석이가 충격 많이 받을 텐데.”
“그래도 하는 수 없지. 여길 지킬 수 있는 길은 니 사촌 오빠하고 결혼하는 길 뿐이니까.”
“어쨌든 결혼 축하한다. 축하할 만한 결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마워. 그만 끊을게.”
마리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통화를 마친 희연은 그랜저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던 희연은 자애병원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자애병원에서 나오는 나연이가 보였다. 희연은 나연이의 앞으로 가서 차를 세웠다. 초저녁부터 병원 청소를 하느라 녹초가 된 나연은 언니를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연은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희연이 다시 악셀레이터를 밟으며 출발했다.
“언니, 역시 언니가 최고야. 언니가 마중 안 왔으면 난 정말 병원 앞에서 쓰러졌을 거라고.”
“난 너 마중 나온 거 아냐. 그냥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었을 뿐이라고. 그리고 너 너무 엄살이 심한 거 같지 않냐?”
“언니, 그건 언니가 몰라서 그래? 큰아버지가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내가 완전히 속은 거였다니까. 완전히 속이 시커먼 늙은 너구리라고. 나보고 화장실 청소 하라고 하는 거 있지? 내가 화장실 청소 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방금 전에 쓰러질 거 같다고 하다니 어째 입은 살은 것 같다.”
“언니, 언니는 지금 누구 편이야?”
“난 너처럼 편 가르는 거 안 좋아해.”
“어째서 세상엔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건지.”
“니 편은 한 명 있는 거 같은데.”
“누구?”
“수영이. 수영이가 너 좋아하는 것 같은 눈치던데.”
“언니, 걔 애기는 꺼내지도 마. 걔를 알고 나서부터 하나도 되는 일이 없다고. 신입생 환영회 같이 갔다가 걔가 술 한 잔 마시고 쓰러지는 바람에 2차도 못 가고 걔 업고 집에 갔지. 도현 오빠네 집에 들렀다가 도자기 깨는 바람에 그 늙은 너구리 영감탱이의 마수에 걸렸지...”
“니가 도자기 깬 건 수영이랑 아무 관계 없지 않냐?”
“어쨌든 걔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 하나도 되는 일이 없다고. 아마 내가 건설부 장관 딸이라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걸.”
“하긴 그 몰골이면 나도 안 믿을 거 같다. 좀 씻고라도 나오지 그랬냐?”
“난 지금 씻을 힘도 하나 없다고. 자고 싶을 뿐이야.”
나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희연은 나연이 잠이 들 수 있도록 더는 말을 붙이지 않고 집으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