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재가 온 도시를 덮으면 그럴까.
그러면 세상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꼭 같을까.
태어날 때부터 그녀는 그랬다. 빛은 풍부하고 소리는 가득했지만 그녀 손에 닿는 것과 그녀 볼에 닿은
것들 사이에는 채워지지 않는 거리감이 있었다. 눈으로 보면 살아있는 듯 했으나, 손으로 쥐면 금세
나와 세상 사이는 거리가 있었다. 채워지지 않는 거리감이 그녀의 감정도 무감각하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느껴지지 않는 세상이 거짓말 같아 진심으로 무얼 대하기가 힘들어 졌을까?
감정은 정신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가 보다.
2011년 가을 대낮, 구리동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김형사는 어제 야근을 마치고 겨우 잠든 아침인데, 호출을 받고 억지로 불려나온 터라 털끝부터
오장육부 속까지 다 예민했다.
“뭐야. 뭔데 이렇게 소란스러워.”
“아, 김형사님. 살인사건인데 말입니다. 그게 현장에 용의자가 그대로 남아있는 사건입니다.”
“그럼 더 빨리 마무리해. 날 왜 불러!”
“그게.. 용의자가 혐의를 전면부인은 하는데.. 그게 좀..”
김형사는 그냥 모든 게 짜증이 났다.
“누군데!”
신참형사는 조용히 손가락을 뻗어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여성을 가리켰다.
날씨가 좋아 거리가득 넘실거리는 햇살 넘어 멍하게 앉아있는 여자 하나가 보였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 신발도 평범하고 얼굴도 평범하다. 비범한 것은 너무
평범한 그녀의 행동뿐이었다. 그제야 김형사는 눈을 찌푸리고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범인 여부를 떠나 살인사건 현장에 그녀는 관객 같았다. 분명 눈앞에 사람하나가 죽었는데 그녀는 연극
이나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처럼 앉았다. 심지어 그녀는 고민 중인 듯 보였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시발. 꼬이네.”
김형사는 저게 요즘 유행하는 싸이코패스인가 보다 했다.
시발! 시발! 말만 들었지 그딴 걸 진짜 만나다니 더럽게 재수없네 라고 그녀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아가씨, 일단 동행하시죠.”
“그런데.. 제가한 게 아닌데요. 그리고 전 지금 급하게 가야하는데..”
시발 뭐 이딴 년이 다 있나하고 김형사는 생각했다.
“수갑 채워서 가기 전에 곱게 갑시다.”
그제야 그녀는 순순히 일어나서, 김형사를 따라 나섰다. 그녀는 김형사를 따라가면서 공원 한가운데
쓰러진 중년 남성을 몇 번이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흰 원피스에 묻은 그 중년남성의 처절한
핏자국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경찰서 안은 시끌벅적 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데리고 온 여성을 제외하고도 살해당한 중년 남성의 아내와 아들이 있었고,
심지어 부르지도 않았는데 따라온 동네주민들 까지 합세해 경찰서 안은 시골바닥 같았다.
“아.. 저.. 사건 관계자들 제외하시고는 다들 나가셔야 합니다.”
그러나 다들 자신을 사건관계자라고 생각하는지 저마다 한마디씩 쏟아냈다. 김형사는 신참형사들 몇 명
을 불러 얼른 저 사람들 진술 받아내고 다들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김형사는 유력한 용의자와 마주 앉았다.
“아가씨, 길게 하지 맙시다. 죽였어요 안 죽였어요?”
“제가 그런게 아닌데요.”
“그러면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까. 들어보니까 피해자 근처에 서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 아저씨 표정이 너무 일그러지면서, 도와 달라고 하셨어요. 배가 뭔가에 찔려서 피가 나고 있었고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하니까. 그 아저씨는 계속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만 해서 전
그 자리에서 좀..”
그녀가 잠시 입을 닫았다.
“좀 뭐요?”
“좀 당황했어요.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아프면 당연히 도와야 하는데 방법이 없으니까요.”
김형사는 치고 있던 타자를 잠시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시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고? 보자마자 얼어붙어야 정상 아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때 신참 형사가 진술서를 받아 적던 동네 할머니 한명이 냉큼 뛰어오더니 김형사에게 소리쳤다.
“이년! 이년! 귀신들린 년이오. 내가 접때 봤는데 술 취한 이씨가 대낮에 이년이랑 싸움이 붙었는데 이씨
가 뺨을 후려쳐도 대꾸도 없이 이씨를 쏘아보더라니까. 악 소리 한마디를 뱉지 않고 수십대를 후려 맞는
데 나중에는 이씨가 벌벌 떨면서 도망갖제.”
물꼬라도 트였다 싶었는지 동네주민들이 달려들어서 그녀와 김형사를 둘러싸고 한마디씩 했다.
“전에 내가 시장가다가 봤는데, 그 쌀집 개새끼가 발모가지를 콱 물었는데도 그냥 가더라니까?
그러다가 쌀집 아줌마가 놀라가지고 불러 세워 어쩌노 어쩌노 하면서 피를 닦아주는데.
글쎄 웃더라니까? 귀신이 들렸지 귀신이 들리지 않으면 못 그러지!”
이리저리 말들은 많았지만 결국에는 이 아가씨가 귀신들린 년이고 이번에 죽은 장씨도 귀신이 들려서
죽인 것이라는 얘기였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쏟아지는 증언들 때문에 김형사는 짜증이 났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하시고 일단 나가시라 말할 참이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그녀가 와앙!하고 울었다.
높은 탑처럼, 몇 십층 짜리 고공빌딩의 매끈한 벽면 같던 그녀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함치며 울기 시작한 그녀의 울음은 이내 끄윽끄윽 하는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건드려도 멀쩡하던
그녀가 와르르 무너지자 사람들은 순간 멍했다. 딱딱히 굳어있던 피딱지를 건드리다 실수로 딱지 아래
있는 시뻘건 생채기를 건들인 듯. 그녀는 끄윽끄윽 하면서 말했다.
“아파요. 아파요. 너무 아파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들이 경찰서 안에서 관객을 찾지 못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