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사거리 술집에서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너무 오래동안 사회생활없이 혼자지내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게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싶다라는 생각에 기대되기도 한다. 약속시간은 10시 앞으로 20분정도 남았으니 슬슬 집에서 나설 준비를 해야지. 너무 빠르지도 않게 또 너무 느리지도 않게 도착할 생각이다.
이런걸 생각한다는 자체가 이미 대인관계에서 소심해 졌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신발을 신고 문밖을 나서면서 거울을 쳐다봤다. 그리곤 혼자 중얼거렸다.
"A. 너 지금 뭐하냐"
실상 오늘 술자리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의 백수는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겁다.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기다리면서 핸드폰 액정을 확인한다. 그리고는 인터넷으로 인기 뉴스들을 검색한다. 딱히 확인할건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모습이 견디기가 힘들어 그냥 그렇게 한다.
엘리베이터는 내려가고 대학 시절을 떠올려본다.
유난스러울것이 없는 대학 생활, 연애도 했고 공부도 안해봤다. 목표의식을 가지고 충실히 살던 20대 이전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에 시키는것을 하지않는것의 기쁨이 있었다. 단순한 반항심에 기초한, 하지않는다는 것의 새로움이 주는 자극이 사라진 후엔 허무가 다가왔다. 그렇게 찾아오는 허무감에 흠뻑빠져도 보고 무기력하게도 지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선노름.
하지만 신선노름한다고 신선이 되는것은 아니였으니..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열렸다. 현관을 나서니 바람이 선선하다.
이제 가을이 왔나보다. 가로등에 투명해진 가로수의 잎, 부드러운 바람.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노란 조명 부드러운 분위기. 계절이 가진 특징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다워 지는구나 하는 생각이드니 '아름답다. 행복하다' 라는것이 가깝게 느껴졌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싶었다.
허무하게 보냈던 시간속에서 나는 뭔가를 찾아낼것이라고 믿었기에, 사람들이 보기엔 폐인같은 시간이였겠지만 이건 아름다워지기 위해 보낸 일종의 대가라고 믿었다. 신선노름하며 보낼 시간이 이제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보이지않는 압박을 감지하고 나는 거대한 아름다움을 찾겠다고 선포했다. 나는 모험가가 될것이고 세상에 빛이 되리라. 대부분의 영웅적 일대기가 그렇듯 나도 혼자 속으로 깊어지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므로, 이제 나는 평범한 삶과는 달라져야 한다라는 자기암시. 각오.
가족들에게 고시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경제적 지원을 약속 받아내기 위해서 나는 거대한 아름다움을 열심히 팔아대기 시작했다. 약장수처럼 당신의 자식이 얼마나 거대한 아름다움을 가슴속에 품고있는지 보라. 당신은 역사에 남을 위대한 사람의 부모가 될것이다. 나를 도와라. 내게 돈을 쏟아라. 약장수들이 흔히 쓰는 수법대로 얼마나 희귀적인 아름다움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 설명했다. 스스로를 찬양했다. 거대한 아름다움이 나라 믿고..
위이잉..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자가 와있었다. 'pure호프 2층으로 오셈'
진실을 품지않은 사람에게 간절함은 허락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에서 오는 달콤함은 길지 않았으니, 결국 반년도 채 되지 않아서 사단이 나고 말았다. 친구들이 종종 안부를 물어올때마다 나는 거대한 아름다움, 시대의 아픔, 소외된 삶에대해 설명하기 바빴다.
지금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자기방어였을 뿐이다. 초라해지지 않기위한 발버둥.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모든 문제의 해결은 고시합격으로 수렴되었다. 부모님은 아직도 한방에 대입에 성공한 자신의 자식에겐의례 고시도 시간상의 문제일뿐 필시 성공하리라 믿고 계셨으니 경제적 지원은 문제가 없었다. 집도 그럭저럭 했으니 죄책감도 없었다.
누구나 인정할 아름다움에 사실 나는 매혹되지 않았는지 모른다.
누구나 인정할 아름다운 여인이 옆에 있으나 나는 사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누구나 매혹될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사실이 나를 매혹되게 할뿐, 내가 매혹될 여인이 누구나 매혹될 여인은 아닐지 모른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꿈에 사실 나는 매혹되지 않았다. "매혹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였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른다. 꽃잎은 썩으면 향수가 되기도 한다는데.
나는 얼마나 지독한 방부제 처리를 스스로 했기에 몇년이 지나도 이렇게 그대로인지.
아니다 아니다. 나는 좀 더 깊이있게 사는 사람일 뿐이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한낯 환상에 불과한게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진흙탕 같은 삶.
자본의 노예들. 누구도 부끄러움을 말하지 않는 시대.
나는 진정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싶다. 내 간절함이
그곳으로 향하길 바란다. 내가 그것에 매혹되길 바란다.
돈에 행복해하고 싶지 않고. 연봉같은걸 받으면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울 수 있는 삶. 이 거대한 자본구조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 구조적 모순을 알면서도 눈앞의 월급을 받고싶어 모른척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다. 부끄러운 삶이다. 돈에서 느끼는 기쁨은 눈속임이다. 인간보편의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삶이 무어 의미가 있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시대의 아픔을 가지자. 나는 그렇지 않겠다. 껍데기를 벗고 전인류 전시대를 관통하는 본질적 아름다움이 충만한 삶을 살....
딸랑.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친구들은 이미 모여있다. 왁자지껄. 왁자지껄.
술이 오르니 웃음이 낫다. 학창시절 보냈던 대학가에오니 친구들은 다시 학생이 되었다.
B는 결혼하기로 했단다. C는 이번에 차를 뽑는단다. D는 대출받아 집을 산단다.
즐겁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친구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거대하지 않아도 손에 닿는 아름다움이 충만했다.
아름답다.
계절은 아름답고 주말저녘 친구들의 시시한 자랑이 아름답고 취기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