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발려진 물고기가 머리와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힘겹게 헤엄쳐 물속으로 사라졌다. 차려진 술상위에 제 살점을 놓아두고 혼탁한 깊은 물속으로 부끄러운 제 몸을 감추어 버린 것이었다. 서릿발처럼 웃음이 흩날리는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놀란 눈, 유년의 내 여름은 비명 속으로 곤두박질 쳐졌다.---------------------------------
강철이 유럽 여행권을 획득한건 정말이지 기적같은 일 이었다. 그는 생전 이런 행운을 얻으리라는 것을 단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복권당첨 같은건 고사하고, 그 쉬운 가위,바위,보 한번 제대로 이겨보지 못해 늘 허드래 일을 도맡아 하거나 하고싶은 일이나 음식등에서 제외되는 불이익을 경험한 것은 다반사의 일상이었다. 어쩌다 미팅이라도 나가면 운명은 늘 된장녀와 짝이되게 하였고, 친구들이 어깨에 힘주고 으시대며 연애질에 열을 올릴적에도 그의 주변엔 변변한 여자친구 하나 생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기대했던 일들은 번번히 실망으로 되돌아 오기 일쑤여서 자주 마음에 상처를 받곤 했는데, 특히 제법 잘 하던 공부도 수능시험 전날 배앓이로 밤새 한 숨 제대로 못자고, 쾡한 눈으로 시험장으로 갔고, 결국 시험을 제대로 망쳐버린 일은 두고두고 그의 가슴에 깊은 패배의식으로 남아있었다. 재수는 없다는 어머니의 강력한 주장에 눈물을 머금고 변변찮은 대학에 원서를 넣어 그나마 입학하게 되었고, 집안 살림살이에 버거운 목돈을 등록금으로 납부하였다. 그런 강철에게 대학 생활은 이렇다 할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근 일년을 시계불알처럼 왔다갔다 무의미하게 보내다 군 소집 영장이 나오자 미련없이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언제나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듯이, 역시나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배치받은 자대는 힘들기로 전군에 명성이 자자한 발바닥 사단이었고, 그것도 최말단 소총수로 배정받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군영 생활의 대부분을 강원도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저질체력으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힘겹게 누비고 다녀야만했다. 비록 그의 이름은 강철로 불리웠지만, 실상은 태어나 병치례가 많고 체질이 약해 보이던 탓에 아버지가 강철처럼 튼튼하고 굳건히 살라고 지워주신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 어디를 봐도 좀처럼 강철같은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고, 실제와 매치가 되지않는 언밸런스함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종조 우스개거리가 되는것이 죽기보다 싫었기에 언젠가 반듯이 남들처럼 평범한 이름으로 개명하고 말겠다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고 있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달아놔도 시간은 간다는 금과옥조 같은 명언이 있듯이, 이런저런 우여곡절의 고생들을 눈물로 격다가 천신만고 끝에 군을 제대했다.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고자 동기들과 밤새 술을 먹고 만취가 되어 집에 들어와서는 이틀 연속으로 생리현상을 제외하고 죽음같이 깊은 잠 속에서 빠져있었다. 다시 군대에 징집되어 가는 꿈을 연거푸 꾸다가 찜찜하게 겨우 잠을 떨쳐냈다. 깨어나선 이리저리 좁은 방구석을 딩굴거리거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점오도 훈련도 교육도 게다가 선임도 없는 자유, 그 자체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측은함으로 두고보던 어머니의 눈에 거슬르기 시작하면서 불호령이 떨어졌고, 내 쫒기듯 이곳저곳 알바 자리라도 얻으려고 수소문하여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사회 나가면 동냥질을 해먹고 살아도 감사하겠다던 애초의 생각은 용돈벌이를 위해 이런저런 알바를 하며 몇 개월이 훌쩍 지나가 버린 후 부터는 나태한 타성이 군기가 빠진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고, 아무리 둘러봐도 희망이 보이이지 않는 일상이 지루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강철이 중학교 다닐 무렵 페암으로 일찌감치 돌아가셨고, 남겨진 유산도, 형제도 없이 어머니와 단 둘이 살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갈수록 경기가 어려워지고 힘에 부쳐서 장사는 그냥저냥 밥이나 먹고 살 정도로 시원찮은 모양 이었다. 다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대학에 보란듯 입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 지쳐보이는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기에는 어느덧 철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불투명한 장래를 생각하면 심기가 불편하여 무의식 적인 막막함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얼버무리며,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고있었다. 적어도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사건의 발단은 강철이 그동안 귀찮아 미루고 미뤄두었던 현대 사회생활에 필수품이 되어버린 신용카드 하나를 만들기 위해 그에게는 낮설기만한 은행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혹시나 결격 사유가 있는건 아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신청서를 작성하여 건냈고, 친절한듯 하면서도 사무적인 말투의 창구 여직원의 능숙한 손놀림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 대한 자괴감이 늘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사소해보이는 이런 일들에 조차 그를 의기소침해지게 만들어 놓았다. 다행히 별다른 거부반응 없이 서류가 통과되었고, 여직원은 집에서 등기로 카드를 받아볼수 있을 것 이라고 말을 끝내고 까딱 고개를 숙이고는 다음 대기자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업무에 여염없는 은행의 문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강철도 그들처럼 안정된 일자리를 찾고 싶었다.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하는 일들이 그에겐 왠지 무척이나 낮설어만 느껴졌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일상이 며칠 지나고 등기가 도착했다. 거두절미하고 뜯어 보니 새 카드가 가지런히 종이에 붙어 있었고, 자세히 보니 더불어 금색으로 디자인된 고급스러워 보이는 안내장이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은행에서 실시하는 이벤트 행사인 백만번째 가입 고객으로 내가 등록되어 행운의 주인공에게 일주일간의 유럽 여행권을 증정한다는 내용 이었다. 종이를 들고있던 손가락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상세정보에는 왕복 항공료와 더불어 고급호텔 숙박 이용권 그리고, 식사권등의 일체 경비와 세금 일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의 이인 한정이었다. 신이난 그가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고, 부러운 놈들은 다른 사람에게 팔면 제법 가격을 쳐 받을 거라며 꼬득였다. 하지만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녀석들의 목구멍으로 다 쏫아 부을게 뻔 한 술책이란걸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이 그간 격었던 불행을 마감하고 새 출발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마련된 신의 배려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아침에 인생이 장미빛으로 바뀌어 보일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지난날 모든 불운의 운명과 친구들 사이에서 '재수탱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악몽들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는 꿈같은 꿈을 그는 꾸고있었다.
인천공항 출국장에 여행을 가방을 매고 홀로 초라하게 서 있던 강철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아쉬운 듯 뒤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바삐 오가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반갑게 그와 눈을 마추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구놈들은 의리를 끊자는 둥 잘먹고 잘살아라는 둥 저주를 퍼 부으며 야속해 했고, 같이 가기를 희망했던 맘에 두었던 주변 여자들에게 여행권을 미끼로 하던 낚시질에 번번히 실패 하면서 오기가 발동한 그가 혼자 가기로 결심 한 것이 며칠전 일 이었다. 그동안 모은 알바비를 모두 투자하기로 하고, 각가지 여행 물품을 구입하며 두배로 즐거운 여행을 만끽 하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그의 머리속엔 이미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국의 풍경과 금발의 늘씬한 비키니 여인들이 펼쳐져 있었고, 운명 앞에 놓여진 길은 탄탄대로의 신작로 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드디어, 괭음을 내며 비행기가 이륙하였다. 안정이 되니 잔득 긴장됐던 마음이 이내 풀어졌다. 강철은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낮설은 현실에 실감을 느끼지 못한 채 묵게될 호텔들과 주변 관광지의 경관을 수차례 보아서 이젠 새로울 것이 없는 여행 안내문구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지금도 써빙 아주머니와 손바닥 만한 식당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고생하시고 계실 어머니가 문득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어 떨쳐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는 나중에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지금 구름위를 날고 있었고, 저 아 래 사바세계의 일 따위야 어찌됐든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난 연후에 그의 인생이 어떤 모습일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같지는 않으리라고 구체적 근거없는 막연한 생각만이 온통 들뜬 마음속에 가득차 있었다. 비행기가 중국 내륙으로 진입했다. 무심코 창밖을 보니, 어느새 화창하던 날씨가 어두워졌고 빗방울이 날리고 있었다. 둘러보니 몇 몇 승객들이 담요을 덮은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다. 장시간 좁은 비행기 안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을 까닭에 그간 마음이 들떠 이루지 못했던 부족한 잠을 잠을 보충 하려고 피아노 연주의 잔잔한 음율에 맞춰진 헤드셋을 쓰고 잠을 청했다. 앞으로 그의 앞에 숙명처럼 펼쳐질 천지개벽할 인생을 짐작조차 못하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강철은 악몽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푸른색의 기운이 감도는 괴물이 그를 집어 삼키는 꿈 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생생해서 꿈인지 생시인지 긴기민가 할 새도 없이 그의 눈에 들어온 비행기 안 풍경은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변해 있었다. 심한 진동과 소음에 섞여 다급한 목소리로 불시착을 시도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승객들은 패닉 상태로 빠져들었다.
불시착 이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도 모른채 당황했지만, 사색이 된 승객을 붙들고 물어 볼 상황도 아니었다. 단지 직감적으로 큰 사단이 벌어진 것 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젠장!!"
강철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가 이 상황의 모든것을 담고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내온 온갖 인생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뭐 이런 지랄같은 인생이 있나 싶었다. 어쩌다 자신에게 찾아온 최초의 행운이 최악의 불행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비행기가 기우뚱 거리며 흔들리자 여기저기서 날카로운 비명이 쏫아져 나왔다. 고도가 낮아지고 있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영화에서나 재미있게 보았을 동체 착륙을 직접 몸으로 격어야 한다니 무엇보다 극심한 공포가 밀려들었다.
서서히 고도가 낮아지고 있음이 몸으로 전해져 왔다. 창밖으로 지상의 눈덮인 산의 숲이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충격에 대비해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시간은 백분의 일초단위로 흐르고 있었다.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며 일차 충격으로 비행기가 잠시 떠 올랐다가 다시 떨어져 내렸다. 아찔한 비명소리와 함께 동체 꼬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고, 태풍처럼 바람이 휘몰아 닥쳤다. 거친 마찰음이 이어지다가 순간 강한 충격과 더불어 의자에 묶여진 채 비행기를 벗어나 강철의 몸이 붕 떠 올랐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눈을 꼭 감았고, '안녕' 이라는 두 글자만이 그의 머리속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