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략 회의
복신의 주재 아래 사비성 공략을 위한 작전회의가 열렸다. 도침과 지수신 흑치상지가 상좌에 앉고 세 명의 통령과 다섯 명의 방령이 배석했다. 복신은 그동안 소수의 병력으로 아직도 성을 지키고 있는 이례성을 비롯 옹장성 사정성 등 이십 여개 성과 연락해 당나라군이 점령하고 있는 사비성 탈환을 위한 연합작전을 도모해왔다. 날짜가 정해지면 각각 은밀히 약속장소에 집결하기로 한 것이다. 모두 합하면 족히 삼 만에 달하는 병사였다. 작전 여하에 따라 사비성을 탈환하고 사비성을 중심으로 단합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복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우선 결전 날짜부터 정하기로 합시다. 기탄없이 의견을 내놓아보시오.”
“흑치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습니다. 가급적 서두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선 선발대부터 출발시켰으면 합니다.”
“선발대라면 척후병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규모는 한 방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진은 언제 출발하는 것이오?”
“출발 준비를 하려면 열흘 정도는 걸릴 것이라 생각됩니다.”
“소승의 생각은 다릅니다. 기병은 신속이 그 생명인데 선발대 따로 본대 따로 움직이면 기밀이 누설되어 적의 방비가 튼튼해질 것입니다.”
“제 생각은 백강 부근을 집결지로 삼아 그곳에 집결하는 날자와 시각을 정해 각 성에 통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만 신속행군으로 움직이는 시 간을 단축하도록 미리 일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방금 지수신 장군의 말씀이 합당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리 하기로 하고 집결지와 집결 시간에 대해 말씀해보시오.”
“일통 최천동이 한 말씀 올립니다. 이번의 기병은 일거에 사비성을 점령해 백제의 명운을 개척하자는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다면 군략을 세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군략보다 더 중요한 것?”
“그렇습니다. 이번에 온 힘을 쏟아 부어 사비성을 수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오나 그 사비성 탈환만으로 막강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세력을 국경 밖으로 온전히 내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성의 수비부담만 늘어날 뿐, 국면전환은 난망하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지금 자네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게야.”
“뚱딴지가 아닙니다. 본시 나라란 위로 왕 폐하를 모시고 국토와 백성을 건사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인데 지금 왕 폐하는 당나라에 볼모로 가 계시고 국토는 신라군에게 유린되어 백성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따라 서 사비성 탈환이라는 소국적 전투보다는 국토수복과 백성을 어우르는 대국적 전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보니 자네 전투가 무서워 겁부터 먹고 있군 그래.”
“영군장군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왜, 내 말이 섧게 들리나 보군. 자네가 무슨 군략을 안다고 나서는 게야.”
“아~아, 그만들 하시오. 듣고 보니 일통의 말에 일리가 있소. 우리는 사비 성 탈환만 생각했지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었던 것 같소. 자, 오늘 은 늦었으니 이만하고 밤새 좀 더 생각하여 내일 다시 모이기로 합시다.”
싱거운 군략회의가 되고 말았다. 최천동은 임존성을 찾아오기 전부터 백제부흥의 의미를 되새겨 왔다. 백제의 나태와 나당연합군의 공격, 황산벌 싸움의 패배, 왕조의 몰락, 유민들의 고초, 의병들의 열망 등을 정리하면서 백제부흥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고 부흥이 이루어지면 어떤 나라와 제도, 위민정책이 수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서 일단은 꺼져 가는 불씨부터 살려야 된다는 생각으로 뜻을 같이 하는 동모들과 임존성을 찾았던 것이다.
입성 후 두 달 동안 각종 군사제도를 정비하면서 느낀 것은 의분과 결기만 있을 뿐, 나라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특히 지도부인 삼장장군 복신과 그의 참모격인 영군장군 도침은 독선적인데다 의외로 욕심이 많아 흑치장군이나 지수신 성장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거드름을 피웠다. 최천동은 우연하게 도침의 내심을 파악할 기회가 있었다. 군사편제에 관해 보고하는 자리였다.
“자네는 이러한 제도와 편제만으로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겐 가?”
“전투의 승패를 겨루기 전에 예단하는 것은 병법에 어긋나는 줄 압니다만…….”
“그러나 싸움에 이기는 조건은 있는 법이지.”
“장군님은 그것을 무엇이라 여기시는지요.”
“첫째는 군사가 잘 훈련되어 있어야 하고…….”
“둘째는요?”
“둘째는 용병술과 군략에 능한 지휘자가 있어야 하고……, 예를 들면 나 같이 육도삼략에 능통한 지략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일세.”
“………!”
“셋째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인데, 새로 세우는 나라의 목표일세.”
“새로운 나라요?”
“그렇지. 새로운 나라에는 어떤 국가목표가 있어야 하지.”
“장군님은 그 목표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세히 설명하려들면 어렵지만 간단히 말해 불자대국일세.”
“불 ․ 자 ․ 대 ․ 국이요?”
“그러네. 불교가 국가의 중심이 되는 나라일세. 당연히 온 백성은 불자가 되어야 하고 오로지 불국정토에 힘 쏟는 그런 나라란 말일세.”
“이왕의 백제도 불교를 숭상하고 백성들도 불교문화에 빠져들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온전하지 못했어. 겉만 번지르르 했지. 오히려 왜로 건너간 불교가 제 모양을 갖추어 가고 있는 게야.”
“그것은 우리 백제의 것을 그대로 베껴간 것이 아니옵니까. 그리고 우리는 신라의 것을 상당부분 베껴오지 않았습니까.”
“잘못 알고 있는 게야. 신라의 불교는 불교를 위해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 불교를 이용한 것이지. 소위 호국불교라는 게야.”
“불국정토의 의미에서라면 이거나 그거나 마찬가지 아니옵니까?”
“아닐세, 아니야. 불국정토를 이룩하려면 반드시 불자가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하네.”
“불자가요?”
복신의 야욕을 눈치 챈 천동은 왠지 씁쓰레했다. 부훙운동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다. 도침은 도침이라지만 복신은 복신대로 꿍꿍이속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군략회의가 있던 바로 그날 밤, 부름을 받고 찾아간 복신의 처소에서였다. 복신은 반쯤 술에 취한 상태였다. 비단보다 귀하게 여기는 무명옷자락이 어지럽게 구겨져 있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을 치뜨며 천동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명했다.
“아까 일통의 얘기는 잘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대국적 전략이란 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보겠나?”
“…………….”
“아~ 아, 뭐 망설일 것 없다. 여기에 엿듣는 자는 없네.”
“……………?”
“이 성내에도 내말을 엿듣고 전파하려는 자들이 있는 듯 해 요즘엔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네. 지금은 괜찮을 게야. 어서 말해보게. 그 대국적 전략 이란 것을 말이야.”
“백제의 예전 국경까지 고스란히 되찾는 전략이 되겠습니다.”
“예전 국경까지?”
“예. 현재의 군사력으로는 이십여 개의 성을 확보할 수는 있습니다만 실지를 회복하여 왕권과 국권을 확립하려면 힘을 더 길러야 합니다. 다행이 여 기 저기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백성들의 호응이 대단하므로 좀 더 크고 견고한 성으로 옮겨 군사를 모으면 곧 대항할 힘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왜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그들의 군사를 끌어오는 것도 한 방편입니다.”
“원군을 요청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동안의 교류와 협력관계를 감안하면 우리의 원군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신라와 고구려, 당나라의 침공을 늘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이치를 따져 말하면 반드시 응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군. 왜국엔 풍 왕자님이 계시긴 하다만………. 나라의 주인이 될 만한 그릇이기는 한지.”
“……… 예?”
“아, 아닐세. 그러면 이번 사비성 공략은 그만 두라는 뜻인가?”
“아닙니다. 절반쯤의 군사로 사비성을 맹공하여 저들의 기세를 꺾은 다음 시간을 벌면서 본성 이전과 원군요청을 추진하면 가할 것입니다.”
“…………….”
“소인 괜한 말씀을 드린 것이옵니까?”
“아니야. 깊은 성찰이구나. 일통은 당장 내일부터 옮겨야 할 튼튼한 성을 물색하도록 해라. 지리적 이점과 요새의 강점이 완벽한 곳을 찾아야 할 것이야.”
“흑치 장군과 지수신 장군의 허락이 있어야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겠지. 다만 영군장군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하게 나.”
“분부 모시겠습니다. 충.”
<다음은 '소리를 빚는 독'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