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유해선사의 은근한 부추김에 덩달아 따라나섰던 달래는 후회가 막급이었다. 할머니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달래의 금산사 구경을 만류하지 않았다. 달래는 혹 유정스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라 하고 법당으로 들어간 선사는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날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요사체인 듯, 대웅전 옆의 건물에 등불이 하나 둘 밝혀지더니 이어 법당에서도 환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무료하게 기다리던 달래는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고 별자리를 가늠했다. 처음 몇몇 개만 나타났던 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가 늘어났다. 유정이 일러주던 대로 북쪽을 향해 북극성을 찾았다. 국자모양이던 북두칠성이 아직 나타나지 않아 확실한지는 모르겠으나 밝게 빛나는 별이 하나 반짝이고 있었다. 항상 정북 방향에서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던 북극성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훗날 북극성을 자기별 삼아 오랜 기다림을 하소연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동자승 하나가 다가와 합장을 하고는 소매를 이끌었다. 저녁 공양을 하자는 것이었다. 어찌할 지 잠시 망설이다 뒤를 따랐다. 선사님은 분명이 여기서 기다리라 했는데 나중에 찾을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목기에 반쯤 채운 쌀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것을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무쳐놓은 산나물에서 들기름의 고소한 냄새가 식욕을 돋우었다. 자기를 인도했던 동자승은 달래의 숟가락 놀림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조금 후 달래는 그 자리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먼 길을 온데다 빈속을 가득 채우니 식곤증이 몰려왔던 것이다. 유정이 다가와 손을 끌어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유정의 큼지막한 손에 자기 손을 맡겼지만 부끄럽지가 않았다. 유정스님에게서는 예전의 그 냄새가 풍겼다. 싫지 않은 냄새였다. 이윽고 언덕의 꼭대기에 도달하자 유정스님은 잡았던 손을 놓더니 달래에게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라고 당부하면서 고개를 꾸뻑하고는 언덕길을 휘적휘적 내려갔다. 가사자락이 나부끼는 듯 했다.
따라가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려 했으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펄럭이던 가사자락은 점점 멀어지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니 안타깝기만 했다. 이윽고 스님을 목청껏 불렀다. 그러나 입만 벌렸을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부르려고 몸부림쳤다. 그때 동자승이 몸을 흔들어 깨웠다. 꿈을 꾸었던 것이다.
“꿈을 꾸셨나 봅니다.”
“………”
“무슨 꿈이기에 그리 손을 휘저으며 몸부림을 치셨습니까.”
“지가요?”
“예. 무슨 악몽인 듯 했습니다. 하도 보기가 안돼서 제가 깨웠습니다.”
“무슨 꿈이 그리 답답혔는지 모리겄구만이라우.”
“꿈은 반대라고 했으니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봅니다.”
“좋은 일요?”
정신이 들어서도 꿈 속 아쉬움이 가시질 않았다. 아직도 가사자락이 눈앞에 펄럭이는 것 같고 처음 느껴본 냄새가 여전히 코끝에 남아있는 듯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어쩐지 불길하게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동창이 밝아오고 있었다.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와 법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선사님이 아직 법당에 있을 것이란 짐작에서였다. 달래가 법당 앞에서 주춤 거리는데 법당 문이 열리고 아닌 게 아니라 선사님이 단정한 모습으로 나왔다. 달래가 반가운 마음으로 쪼르르 달려가 인사를 하자 선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너 여기에 밤새 서있었던 것이냐?”
“예? 아니고만이라우. 저 아래 집에서 저녁 먹고 잠들었다가 지금 막 깨어 난
참이고만이라우.”
“뭣이? 그럼 유정은 어디 있느냐!”
“유정 스님이요? 지는 못 보았는디요.”
“허어. 이럴 수가. 어젯밤에 바로 만나지 않았더냐.”
“예. 지는 선사님만 지둘르고 있었고만이라우.”
“그랬구나. 음. 그랬구나. 나무관세음 보살.”
“유정스님이 어찌 되었능가요?”
“아니다. 다 부처님의 자비하심이니라. 달래야. 저 아래 개울에 가서 소세하고
오너라. 나하고 함께 아침공양을 하고 내려가자꾸나.”
“…………”
“어서 서둘러라. 절간에서는 늦은 사람 밥 안주느니라.”
달래의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어젯밤 꿈자리도 개운치 않았지만 선사님이 뜬금없이 금산사 절을 구경하자며 데리고 나선 것도, 유정스님의 행방을 물었던 것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일 뿐이었다. 달래는 이날의 일들이 평생을 사는 동안 가슴의 못으로 자리 잡을 줄도 미처 몰랐다. 아침공양이 끝난 후 진외가에 돌아올 때까지 가닥을 잡아보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왠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기만 했다. 달래의 이러한 마음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사님은 시종 아무 말이 없었다. 어떤 땐 빙그레 혼자 웃는가 하면 미간을 좁혀 무언가 골똘 하는 모습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유정은 밤새 걸어 내장사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어젯밤 유해선사님이 밖에 달래가 와서 기다린다면서 ‘달래가 너를 괴고 있느니라.’라고 귀띔한 의미가 무엇인지 곱씹느라 고단한 줄도 몰랐다. 불문에 몸담은 출가인으로서 아직 어리다고는 하나 한 여자의 굄에 마음을 쓸 수가 없었다. 출가한 이상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어야 한다며 삼년이 지나도록 친가조차 잊고 지내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일단 피해 나왔던 것이다. 달래가 괴고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자기의 마음이 몸 밖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서 차마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해 내장사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피였다. 이튿날 저녁 늦게 당도한 유해선사는 유정부터 찾았다.
“선사님. 다녀오셨는지요.”
“못난 놈. 네가 아직 뿌리를 잘라내지 못했구나. 어리석은 놈.”
“…………”
“내 이르지 않았더냐. 뿌리가 하나인 것을 억지로 부정한다고 뽑히겠느냐.”
“선사님께서는 저절로 뽑힌다고 하시오나 뿌리가 더 내리기 전에 잘라버리는
게 더 쉽지 않겠습니까.”
“너는 뿌리의 실체를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하고서 어떻게 자른다는 것이냐.”
“연한 뿌리라야 자르기 쉽지 않사옵니까?”
“연한 뿌리든 질긴 뿌리든 흔적은 남느니라. 곪는 상처는 더 곪을 때까지 가만
두어야 스스로 터지고 상처도 쉽게 낫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느냐? 미련한 놈.”
“…………”
“너는 어찌 남녀관계를 합일로 보지 않고 교합으로만 여기려 한단 말이냐. 더
욱 정진하거라. 못난 놈.”
“예. 선사님. 소인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소서.”
<다음은 '군략 회의'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