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통의 활약
막손이 백사십여 명의 당나라 군사를 포로로 잡아오자 임존성의 사기가 한층 높아졌다. 흑치 장군은 목막수의 공을 치하하고 방령으로 승차시켰다. 막손이 알아온 정보를 토대로 복신은 사비성 공략을 준비했다. 아직도 사비성에 갇혀있는 백제 군사를 되찾아 오자는 게 목적이었다. 당나라군은 이미 주력부대가 철수를 했고 신라는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한 상태에 있어 사비성을 수복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거기에다 신라와 당의 혹심한 약탈에 넌더리가 난 백제유민들의 호응이 예상외로 거세어 충분히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흑치장군이 신촌에 다녀 온지 달포가 지날 즈음 소달구지 이십여 기가 성문에 도달했다는 전갈이었다. 바로 신촌의 최성기가 보내기로 약조했던 군량미였다. 쌀이 이백 섬에다 보리쌀 오십 섬, 콩과 팥 등 잡곡이 열 섬이나 되었다. 받아들여 임시 창고에 쌓는데 반나절이 후딱 지났다. 달구지를 몰고 온 사람들은 늦은 저녁을 먹자마자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밤길이 오히려 펀하다면서 만류를 한사코 뿌리쳤다. 흑치장군은 물량확인서와 함께 간절한 고마움이 담긴 서찰을 들려 보냈다. 그들을 배웅하고 나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결코 무심치 않으리라는 확신을 다짐하고 싶어서였다. 유성이 길게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사흘 후 또 한 차례의 달구지 행렬이 줄을 이었다. 삼십여 기를 따라온 사람도 이십여 명에 이르렀다. 제법 의관을 갖춘 젊은이 셋이 앞장서고 있었다. 지수신이 그들을 맞아 물량을 확인하느라 부산을 떠는 동안 앞장섰던 세 젊은이가 흑치장군을 만나겠다며 처소로 찾아왔다.
“지는 신촌에서 온 최천동이라 합니다. 성자 기자 되시는 아버님의 분부를 받고 강경포와 벽골의 동모들과 합류하느라 며칠 늦었습니다. 이쪽은 강경 포 정우치 어르신의 둘째 자제인 정수탁이옵고 그 옆은 벽골 아주생 어르 신의 둘째 자제인 아중달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다지 흡족한 군량미를 마련해주신 어르신들께 뭐라고 고마운 말씀을 드려야 할지……”
“어르신들께서는 우선 일차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정이 끝나는 대로 곧 더 준비하겠다는 전갈을 올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흰내말의 최치랑 어르신께서도 참 양식 백 섬을 변통해주셨습니다.”
“흰내말이라면 여기서 수 백리 길인데 이리 쉽게 당도했다니 정성에 감탄 할 뿐이오.”
“아닙니다. 흰내말에서는 강경포에서 미리 염출하면 나중에 변제하시겠다 해서 우치의 어르신께서 장만하셨습니다.”
“아~, 그렇게들 소통하셨군요. 어쨌든 군사를 움직이는 힘에 걱정을 덜었으니 이제 군략만 튼튼하면 되겠습니다. 원로에 피곤하실 테니 요기부터 하고 좀 수시지요.”
“그 보다는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이번에 저희 셋이 동반한 것 은……”
“으응? 그러면 입영하겠다는 의사로?”
“그렇습니다. 재주는 별로 없사오나 곁에 두시면 작은 힘이라도 되실 것입니다.”
“힘이 되다마다요. 군량미 염출에다 자제분들까지 공출하신 어르신들의 충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아~ 그럼은요. 우선 삼장장군에게 고하겠습니다.”
“삼장장군요?”
“예, 복신장군을 삼장장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도침선사는 영군장군이구요. 하하하…… ”
흑치장군의 웃음이 어딘지 허허했다.
“장군! 저희들은 흑치장군의 휘하에 몸담겠다는 생각으로 달려왔습니다. 저희 가친께서도 그리 당부하셨고요.”
“그래요? 그러면 이리 합시다. 군사훈련은 차차 이수하기로 하고 우선 나 의 수하에서 각자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나씩 맞기로 하지요.”
“저는 셈법을 좀 아니까 군수물자를 관리해보았으면 합니다만……”
“아, 그래요? 그렇잖아도 그 방면에 사람이 꼭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치 중대는 지수신 장군이 책임지고 있으니까 내 잘 일러두겠습니다.”
“저는 문서작성이나 정리하는 일을 맡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럼 저는 병장기 만드는 일이나 깃발 같은 것 만드는 일을 맡아보겠습니다. 손끝으로 하는 것은 뭐든 자신이 있거든요.”
“아~아 그래요?. 모두들 한 가락씩 가지고 있군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 이구만.”
오천이 넘는 군사를 운용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군략이야 장군들이 짜낸다 하더라도 전술로 옮기려면 군대의 조직편제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각종 물자 특히 식량의 확보와 소모량 책정도 주먹구구식이어서는 곤란하다. 또 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는 각종 포상과 능력에 따른 승차는 물론 징계에 관한 것도 군율로 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예전 황색군 출신이 소수 있기는 하나 대부분은 격문을 보고 몰려온 의용대였다. 군사지략을 알고 있는 복신도 이 점에서 늘 아쉬워하던 터라 흑치의 진언을 흔쾌히 따랐다.
셋 중 연장자인 강경포의 정수탁은 물자관리를, 신촌의 최천동은 각종 제도의 확립과 문서정리를, 제일 연소자인 벽골의 아중달은 제복의 도안과 군기제작 등을 맡아 흑치장군을 돕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물류관리를 옆에서 보아온 수탁은 셈에 남달리 능했다. 천동은 서書와 부賦에 통달, 가히 명문장가라 할만 했으며 당나라 말과 일본말에도 능했다. 아주생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유정스님이 된 아지달의 형인 중달은 남다른 손재주가 있어 눈대중만으로 무엇이든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
수탁이 맨 먼저 착수한 일은 창고에 쌓아놓은 군량미의 양을 계수하는 일이었다. 그는 바닥면적과 창고높이만으로 정확한 양을 계산해냈으며 이를 곡류와 부식별로 일목요연하게 기장했다. 그리고 취식인원에 맞게 취사도구의 용량을 조정하고 배분하는 양곡의 양도 정확하게 계산하여 지급토록 했다. 처음에는 너무 까다롭다며 불평하던 취사반원들도 배식 후 거의 남는 음식이 없을 정도로 오차가 발생하지 않자 오히려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수탁은 창고 관리를 맡은 후 열흘 쯤 지나서 흑치장군을 찾았다. 특별한 보고가 필요할 성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지수신 장군도 함께 있어 시간을 잘 맞춘 셈이 되었다.
“특별한 보고라니 무슨 불편이라도 있는 것인가?”
“예? 아닙니다. 그동안 조사한 물자 현황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으응, 마침 성주님도 계시고 하니 어서 말해보게나.”
“예. 지금 창고에는 쌀이 삼백예순다섯 석, 보리쌀 이백서른 석, 콩 마흔일 곱 석, 팥 서른세 석, 좁쌀 열여덟 석, 찹쌀 열네 석이 있습니다. 모두 합 하면 칠백일곱 석인데 찹쌀 열네 석은 별도로 치고 참 양식과 잡곡이 각각 삼백예순다섯 석과 삼백스물여덟 석으로 반반입니다. 따라서 참 양식 과 잡곡을 반반씩 섞어서 한 사람 당 하루에 두 홉씩을 배정하고 있습니다.”
“아~ 잠간! 한 사람이 하루에 두 홉씩을 먹는다는 얘긴데, 그러면 지금 확보한 양으로는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예, 그걸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지금 성내에 상주하는 인원은 모두 구천삼백스물두 명입니다. 성 바깥으로 파견된 인원은 백 명쯤 되는데 이들은 대부분 현지조달을 하고 있어 제외했습니다. 그러니까 탁상 계 산으로는 서른 닷새 분이 됩니다만 예비 량과 결손 분을 감안하면 한 달 보름은 견딜 수 있습니다.”
“한 달 보름이라……… 그렇다면 서둘러서 군량확보에 나서야 되겠군.”
“그런데 장정이 하루에 두 홉씩으로 양이 찰는지 모르겠군.”
“예, 여자와 소년이 덜 먹는데서 벌충하면 문제가 없습니다만………”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겐가?”
“부식이 문제입니다. 아무래도 겨울을 나려면 배추와 무절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인근의 농가에서 조금씩 부조를 받아 해결하는 수밖에………”
“제 생각입니다만 병장기와 군복을 마련하려면 아무래도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군상軍商, 즉 보부상을 운영하는 것이 하나의 방책이라 여겨집니다.”
“군대보부상?”
“예, 예전에도 군상을 통해 필요한 물자를 구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네의 얼굴을 보니 방책을 세운 것으로 보이네만.”
“그렇습니다. 우선 백 명쯤의 인원을 동원할 생각입니다만.”
“그리 하게나. 인원은 목막수 방령이 뽑아줄게야.”
“알겠습니다. 준비 되는대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백제는 일찍이 군사물자를 조달하는데 양곡과 포목 등의 징세 외에 보상과 부상을 운용해왔다. 전시에는 배속된 부대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지만 소강상태일 때는 선질꾼(보상褓商)과 바지게꾼(부상負商)으로 나서 부족한 물자를 보총했다. 물물거래 수완이 있는 자들 중심으로 구성된 군상은 바닷가의 소금이나 해산물을 내륙지방의 산간에 공급하고 내륙지방의 특산물을 해안지방에 보급하면서 생긴 이문으로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이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의 또 다른 임무는 적정의 탐색이었다. 일종의 간자였던 것이다. 수탁은 곧 군상의 선발과 훈련에 착수했다.
한편 중달의 임무는 의외로 막중했다. 전투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병장기의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창을 만드는 데는 삼년 이상 자란 곧고 단단한 대나무를 베어다가 여섯 자 크기로 자른 다음 끝을 뾰족하게 잘라 불에 그슬려 창의 대용으로 삼았다. 가벼워 다루기 쉽고 간편했다. 삼지창은 낡은 농기구를 수거해 벼렸다. 수량에 한계가 있어 오장 이상 급에만 지급했다. 칼과 활궁, 화살대, 화살촉도 만들었다. 화살은 큰 것, 작은 것, 중간 것으로 분류해 각자의 체중과 근력에 맞는 것을 골라 쓰도록 하되 궁수부대는 각 방령의 휘하에 쉰 명씩을 편제했다. 화살대는 인근에 시누대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어 조달하기 수월했다.
중달이 특히 솜씨를 발휘한 것은 군병들의 전투복과 각종 깃발이었다. 부녀자들에게 치자 우린 물과 황토 물을 섞어 담황색으로 물들인 포목과 본을 나누어주어 바느질 하도록 했다. 상의는 앞가슴과 등에 박달나무를 얇게 절단한 편린을 겹쳐 꿰매도록 해 아예 찰갑札甲(갑옷) 겸용으로 만들었고 하의는 바지의 통을 좁게 해 활동성이 편하도록 했다. 방령 이상의 지휘관들의 찰갑은 거북이 등딱지나 조재껍질을 다듬어 붙였다.
군기는 일, 이, 삼, 사 군으로 나누어 흰 바탕에 각기 색깔이 다른 술을 닮으로써 구분할 수 있도록 했고 지휘부의 군기는 황색으로 통일해 장군호칭을 수놓아 위엄을 과시토록 했다. 밥만 축내고 있던 병사들은 준비 작업에 모두 열중이어서 달포 만에 대충의 작업을 완료했다.
동짓달을 며칠 앞둔 맑은 날 새로운 군복과 병장기로 대오를 갖춘 부흥군이 연병장에 도열했다. 일만 군사의 위용이 근사했다. 사기 또한 하늘을 찔렀다. 삼장장군 복신과 영군장군 도침, 흑치장군, 지수신 성장이 누대에 올라 흐뭇한 표정으로 정렬한 대오를 굽어 살피고 있었다. 선임 방령의 우렁찬 보고가 끝나자 복신이 앞으로 나서 사자후를 토했다.
“부흥군 여러분!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오늘 여러분의 당당한 위용을 보니 우리의 숙원인 백제부흥이 이뤄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곧 수복전투에 나설 것이다. 한 사람도 뒤처지지 말고 앞장 서 백제민의 의기로써 당나라와 신라의 침탈을 막아내자. 고향에 두고 온 여러분의 부모와 처자식의 생사와 안위가 바로 제군의 손에 달렸다. 기필코 승리를 이뤄내자.”
일만 군사의 환호가 지축을 울렸다. 부흥군의 결기가 그렇게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흑치장군과 지수신 성장은 군율과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최천동과 물자의 조달과 관리를 요령 있게 정비한 정수탁, 각종 병장기 및 복색을 본새 있게 제작한 아중달의 공에 대해 각기 통령의 지위를 내릴 것을 복신에게 상주, 허락을 받았다. 복신은 도침과 의논해 최천동을 일통, 정수탁을 이통, 아중달을 삼통으로 정해 참모 역할을 다하도록 특명했다.
이후 삼통의 활약은 부흥군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있어 절대적이었다. 장군은 물론 간부들도 대부분 항상 이들의 자문에 의지했으며 병사들도 무슨 일만 생기면 이들을 찾아 하소연 했다. 이후 병영에서는 하나의 우스갯소리가 유행했다. 조그만 공을 세우거나 뽐낼 일이 있으면 저마다 사통을 자처했다.
“내가 바로 사통이란 말이여.”
“뭐여? 사통? 자네 같은 꼴통이 개뿔은 무슨 사통. 그냥 꼴통이라고 혀!”
“뭇이? 꼴통? 내가 꼴통이면 너는 똥통이게?”
“아니, 뭐? 으하하하.”
<다음은 '악몽'으로 이어집니다.>